[더오래] 성만 네 번 바꿨다…깡패한테 안 맞으려고 주먹 배운 목사

[라이프]by 중앙일보

[더오래]



[더,오래] 허호의 꿈을 찍는 사진관(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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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한국컴패션 직원과 함께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에서 멀리까지 가게 된 이유는, 귀한 이야기를 가진 후원자를 만날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지요. 거기에서 만난 사람이 컴패션 후원자인 하명근 목사였습니다. 사전에 대강 이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거리를 전전하다 12세에 컴패션에 등록돼 수혜 받았고, 나이 지긋한 지금은 자신처럼 가난으로 어렵게 지내고 있는 컴패션 어린이를 오랜 시간 후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연세가 70세이었고 작년까지 장애인을 돕다가 코로나로 문을 닫은 상황이라니 그 표정과 얼굴, 특히 분위기에서 세월과 수고의 흔적이 덕지덕지 남았을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과장해 카메라만 들이대도 느낌이 오지 않을까 살짝 기대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부산역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분이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우선 부드러운 갈색 계통 체크 콤비 양복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손님 온다고 최대한 격식을 차린 거죠. 거기에 빨간 행거치프를 멋들어지게 꽂고, 청바지에 구두까지 광을 냈습니다. 척 보기에도 탄탄한 체격의 부산 사나이였습니다. 연세가 70세라는데 나이는 어디로 가고, 그 험한 시간을 보냈다는데 체력은 저보다 좋아 보였습니다. 이런 말 하기 죄송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목사 이미지도 아니었습니다.


그 모습에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목사님은 직접 차를 운전하며 우리를 부산 전역으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이분은 부산 영도 출신이었습니다. 이분이 이전에 도움을 받았던 보육원 자리를 둘러보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찾아가 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도의 옛날 자취가 없어져 사진을 찍기에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더 고민이던 참에 예전에 뉴스에서 피난민이 모여 살던, 벽화가 있는 산비탈 동네를 본 것이 기억나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습니다. 사진에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배경을 찾고자 한 것이지요. 목사님이 흔쾌히 그곳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곳에 가보니 목사님 이야기와는 크게 연관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도 이야기이지만 느낌을 원했던 것이 더 컸는데, 그런 느낌도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추천한 곳도 가봤지만 상상과 달라 그곳도 패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유엔묘지에 가자고 의견을 냈습니다. 그곳에 갔을 때에야 험난한 세월을 굳게 이겨낸 목사님의 모습과 맞아떨어지는, 그 느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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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는 부산 영도 보육원 출신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영도는 부산의 엄청난 슬럼가였습니다. 그곳 보육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 처지가 어땠겠습니까. 성이 네 번이나 바뀔 정도로 사연도 많고 버림 받은 기억만 있었겠지요. 깡패에게 맞기도 많이 맞아 살려고 합기도와 태권도도 익히고 주먹 좀 쓴 거죠. 그런 중에도 공부 잘 하고 똘망해 입양을 갈 뻔했지만 부모가 찾아올까봐 거절했답니다. 어느 날 교육감상 같은 것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랑스러웠는데, 일정을 맞추다 보니 보육원에 돌아가는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총무라는 사람이 다짜고짜 그를 때렸습니다. ‘와, 자기 자식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속으로도 억울했다고 했습니다.


컴패션 설립자 에버렛 스완슨 목사는 하명근 후원자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소중하다는 의미를 알려준 사람이었습니다. 보육원에는 한 두 명도 아니고 수많은 어린이가 있는데, 자기 눈을 유심히 보더랍니다. 작은 어린아이의 작은 눈 속의 작은 점을 그는 찾아냈답니다. 그리고 아동자선병원으로 보내 수술을 받도록 수술비까지 지원해줬다. 병원에서도 정성을 다해 수술해줬습니다. 그덕에 지금까지도 부작용 하나 없이 눈이 건강하답니다. 사실 그 점은 점점 자라는 점이었고, 그냥 두었으면 하명근 후원자는 한쪽 눈을 실명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단 한 번의 마주침은 어둡고 힘들기만 했던 그의 인생에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을 남긴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 어렵던 시기를 이겨내고 장애인을 돌보는 사역까지 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하명근 후원자가 계속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나 어렸을 때 참 예뻤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겪었기에 옛날 생각을 하면 지금은 아쉬움과 후회, 원망이 담기도 겨 있기도 할 수 있는 말이지요. 하지만 스완슨 목사와 같은 누군가 한 사람이 자신을 발견해 주고 바라봐줌으로써, 그 말은 후원자에게 그저 지나가는 말 이상이 되었습니다. 자신 삶의 한 부분이 되었죠. 제가 받은 후원도 아닌데, 스완슨 목사의 한 소년을 발견한 일이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고 신비로울 수 없습니다.


사진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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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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