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아닌데, 자식 몰라보고 욕지거리...밤새우는 습관이 부른 병

[라이프]b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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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82·여)씨는 고혈압약을 먹지만 또래보다 건강한 편이다. 혼자서도 잘 걷고 옷 입기, 목욕하기 등의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어 남편과 둘이서만 지냈다. 하지만 집에서 넘어져 고관절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후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입원 중인 병실을 손녀의 집으로 알았고, 반복적으로 산소마스크와 인공 도뇨관(소변줄)을 뽑아 가족의 애를 태웠다. 이씨의 병명은 요로감염으로 인한 섬망. 다행히 항생제와 항정신병 약물을 투여하자 며칠 만에 이씨의 의식은 또렷하게 회복됐다.


나이 든 부모님이 성격이 변하거나 가족·지인을 못 알아볼 때, 횡설수설하거나 헛것을 보는 경우 흔히 치매·뇌졸중을 의심한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 특정 상황에서, 갑자기 시작됐다면 한 번쯤 의심해야 할 병이 섬망이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중선 교수는 “섬망은 수술·염증·약물과 탈수·영양부족, 전해질 불균형과 같은 신체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뇌가 일시적으로 고장 나는 병”이라며 “특히 입원 환자의 최대 80%가 경험할 만큼 흔한데도 의료진과 보호자가 잘 몰라 치료 결과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섬망, 건강의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야

섬망은 ▶고령층 ▶입원 환자 ▶암이나 치매·뇌졸중·파킨슨병과 같은 뇌 질환을 앓은 환자 ▶장기 기능이 떨어진 환자에서 잘 발생한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수술·감염 등의 자극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병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병이 위중할수록 발병률이 높아 일반 병실(10~30%)보다 중환자실(30~80%) 입원 환자가 훨씬 많이 경험한다. 주요 증상은 치매와 비슷하다. 집중력·판단력이 흐려지고 시간·장소·사람을 혼동한다. 언어장애와 망상·환각, 얌전하던 사람이 욕을 하며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반대로 말수가 줄고 우울해 하는 인격·행동 변화 역시 섬망의 특징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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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단, 섬망은 치매와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치료 가능성이다. 순천향대서울병원 외과 강민창 교수는 “섬망은 치매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지만, 원인을 찾아 교정하면 개선되고 대부분은 인지기능 저하와 같은 합병증도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부적인 증상도 각각 다르다. 만성적으로 서서히 악화하는 치매와 달리 섬망은 갑자기 시작되고 주로 낮보다 밤에 증상이 심해진다. 말기 치매 환자에게서 두드러지는 집중력·지남력 저하 역시 섬망은 초기부터 시작한다는 차이점도 있다. 대화가 어려워지고 자기가 왜 병원에 왔는지, 옆에서 병간호하는 가족이 누군지 모르는 식이다.


전문가들은 섬망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과도한 걱정도 무분별한 방치도 모두 환자에게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섬망 자체가 몸 상태가 나쁠 때 나타나는 데다 콧줄·수액 등을 빼는 과격한 행동이 동반될 경우 사망 위험마저 커질 수 있다”며 “의학적인 검사 결과 이상이 없어도 섬망이 나타나면 ‘건강이 악화하겠구나’ 생각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섬망을 건강의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정의학회지, 2009)에서 사망 10일 전에는 51%, 3일 전 87%로 섬망 발병률이 증가했다. 섬망이 나타나고 사망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13일이었다.


안타깝게도 섬망 자체를 치료할 방법은 없다. 항정신병 약물이나 진정제·수면제로 증상을 완화할 수는 있지만 몸이 약한 상태에서 잘 발병하는 만큼 약물치료가 불가능하거나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되레 약물이 뇌에 부담을 가중할 수 있어 교과서적으로도 추천하지 않는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외과 정은주 교수는 “섬망은 원인을 해결하면 개선되지만 기저질환이나 체력 저하 등의 원인을 단시간에, 전부 교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라며 “예컨대 섬망이 수술로 인해 발병한 경우 외과적 손상을 회복하기까지 며칠이 지나야 하듯이 ‘시간’이 필요한 병”이라고 말했다.


섬망의 발생·악화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방이다. 특히, 기저질환이 있는 고령층이 수술하거나 입원할 때는 미리 섬망에 대비하는 게 바람직하다. 첫째, 주변 환경을 정비한다. 입원 환자는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 다인실 사용으로 인한 불편함, 건강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스트레스에 취약한 상태가 된다. 정 교수는 “병실에 가족사진이나 평소 자주 쓰는 물건을 두고 보호자·가족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환자 상태를 진정시키는 데 효과적”이라며 “안경·보청기 등을 쓴다면 치료 후 조기에 착용해 원활한 의사소통을 유지하는 것도 섬망 예방에 도움된다”고 말했다.

환자에게 익숙한 입원실 환경 조성

둘째, 수면 패턴 유지다. 낮에 자고 밤에 깨인 수면습관은 섬망을 부른다. 낮에는 걷기·앉기·스트레칭 등으로 최대한 몸을 움직이고 밤에는 조명을 끄고 투약·검사 시기를 조절해 충분한 수면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강 교수는 “운동량을 늘리는 것 자체가 입원 환자의 섬망 발생을 예방한다는 연구가 많다”고 덧붙였다.


셋째, 복용 중인 약물을 의료진에게 알린다. 섬망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이 있다면 사용량을 조절하거나 교체하고, 입원 치료로 인해 영양·수분 불균형이 예상될 경우는 신속히 영양제·수액 투여를 결정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섬망은 재발률이 높으므로 이전에 경험했다면 의료진에게 미리 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섬망이 발생한 후에는 원인 치료와 더불어 환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과격한 증상을 보이는 경우 억제대로 환자의 손·발·가슴을 묶는 것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이 교수는 “섬망이 심해 억제대를 사용했는데 보호자가 몰래 풀었다가 환자가 중요한 주사 라인을 제거해 사망한 사례도 있다”며 “필요할 땐 사용하는 것이 환자에게는 안전을, 보호자에겐 안정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렬 기자 park.jungryul@joongang.co.kr

2023.01.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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