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강스매싱…그녀는 코트 밖에서도 전설이었다

[이슈]by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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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US오픈을 끝으로 은퇴를 시사한 ‘테니스 여제’ 세리나 윌리엄스. 메이저 대회 23승을 거둔 흑인 운동선수의 아이콘이다. AFP=연합뉴스

“‘세리나 시대’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테니스의 공식 소셜미디어는 최근 한 흑인 선수의 캐리커처를 올린 뒤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는 “누군가는 경기를 하지만, 누군가는 경기 자체를 바꿔 놓는다”고 덧붙였다. 29일 미국 뉴욕에서 개막하는 US오픈을 끝으로 공식 은퇴를 선언한 ‘테니스 여제’ 세리나 윌리엄스(41·미국)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윌리엄스는 지난 10일 “살다 보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때를 정해야 하는 시간이 오기 마련”이라며 “사랑하는 일에서 떠나야 하는 것은 힘들지만, 이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US오픈을 끝으로 은퇴하겠다는 뜻이다. US오픈은 호주오픈·프랑스오픈·윔블던과 함께 테니스 4대 메이저로 불리는 대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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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의 은퇴 투어를 응원하는 팬들. AP=연합뉴스

지난해 6월 윔블던 이후 부상으로 휴식을 취했던 윌리엄스는 올해 초 은퇴를 고민하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에게 조언을 구했다. 우즈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2주간 매일 코트에서 뛰어본 뒤 결정하라”고 대답했다. 우즈의 말대로 테니스에만 몰두한 끝에 윌리엄스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US오픈까지 뛰기로 결정했다. 지난 6월엔 1년 만에 코트로 돌아왔다. 지난 9일 US오픈 모의고사인 여자프로테니스(WTA)투어 내셔널뱅크 오픈 단식 1회전에선 14개월 만에 승리를 따냈다.

2016년 US오픈 관중, 4명 중 1명이 흑인

그의 은퇴 소식을 접한 미국 언론은 앞다퉈 윌리엄스 특집 기사를 싣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2일 ‘당신도 세리나 윌리엄스 덕분에 테니스 팬이 됐나’라는 기사를 통해 윌리엄스의 업적을 재조명했다. ESPN과 CNN도 “세레나의 은퇴 투어가 시작됐다. 함께 지켜보자”고 전했다.


윌리엄스는 테니스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8세였던 1999년 US오픈 여자 단식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이래로 메이저 대회 단식에서만 23차례 우승했다. 남자 레전드 라파엘 나달(스페인)은 메이저 22회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윌리엄스는 올림픽에서도 4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며 남녀를 통틀어 4명뿐인 ‘커리어 골든슬래머(4대 메이저+올림픽 우승)’가 됐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선 단식과 여자 복식 2관왕에 올랐고, 2000년 시드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여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복식 우승은 모두 언니인 비너스 윌리엄스(42)와 합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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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라이벌이자 친구인 윌리엄스 자매. 세리나(왼쪽)와 언니 비너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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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테니스 선수들은 보통 20대가 전성기다. 30대가 되면 체력이 떨어져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윌리엄스는 30대 중반을 넘어서도 꾸준한 경기력을 유지했다. 미국 인터넷 뉴스 웹사이트인 레딧의 공동 창업자 알렉시스 오해니언과 2017년 결혼한 윌리엄스는 같은 해 호주오픈에서 우승한 뒤 임신 사실을 공개했다. 그해 9월 딸 올림피아를 낳은 뒤 코트로 돌아왔다. 복귀 후에는 메이저 대회에서 4차례 결승에 올라 모두 준우승했다. 최근 메이저 대회 단식 결승 진출은 2019년 US오픈이었다. 올해는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에는 불참했고, 윔블던에선 1회전 탈락했다.


윌리엄스는 코트 밖에서도 편견과 맞서 싸운 개척자였다. 그는 1999년 US오픈 단식에서 우승했는데 흑인 선수가 메이저 대회 여자 단식에서 우승한 것은 1958년 알테아 깁슨 이후 41년 만이었다. 이후 수퍼 스타에 등극하면서 흑인 테니스 선수의 아이콘이자, 흑인 스포츠 선수들의 우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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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윔블던 우승 후 점프 세리머니를 펼치는 윌리엄스. AP=연합뉴스

2022년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여자 스포츠 스타 수입 1위에 올랐다. 특히 윌리엄스는 백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테니스에서 정상의 자리에 올라 많은 흑인에게 영감을 줬다. 이들은 윌리엄스의 활약을 보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미국테니스협회(USTA)에 따르면 윌리엄스가 전성기를 달리던 2016년 US오픈 관중 중 약 25%가 흑인이었다. 윌리엄스가 출산으로 불참한 2017년 US오픈에선 흑인 관중이 전년보다 10%나 줄어들었다. 세계 11위 코코 고프(18·미국)는 “어려서 윌리엄스의 경기를 보며 자랐다. 그는 내가 테니스를 하게 된 이유였다”며 “테니스 코트엔 흑인이 별로 없는데 윌리엄스가 경기를 지배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화려한 유니폼, 윔블던 출전 때마다 화제

윌리엄스는 언니 비너스와 함께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빈민가에서 자랐다. 마약과 범죄가 판치는 곳이었다. 경찰은 흑인의 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여성은 상대적 약자였다. 스타가 된 이후에도 그는 편견과 차별을 향해 강스매싱을 날렸다. 성 평등을 부르짖었고,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8년 US오픈 결승에서 심판에 항의하다 벌금 1만7000 달러의 징계를 받았다. 당시 그는 “남자 선수보다 처벌이 가혹하다. 명백한 성차별”이라며 항의했다. 남성 중심의 코트 문화에 당당히 맞선 일화다. 흑인 인권 운동인 ‘BLM(Black Lives Matter)’ 캠페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USA투데이는 “세리나는 코트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출신, 헤어스타일, 체형, 복장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출산 후에도 현역 선수로 활동하자 따가운 시선을 받은 것도 사실”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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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감각이 뛰어난 윌리엄스. 자신의 의류 브랜드도 론칭했다. AP=연합뉴스

윌리엄스의 패션도 화제였다. 2003년부터 나이키 후원을 받은 세리나는 윔블던에 출전할 때마다 코트를 런웨이로 만들었다. 2008년 대회에선 바바리코트 스타일 유니폼을 입어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패션 잡지 보그는 윔블던에서 멋진 스타일 뽐낸 스타를 발표하며 윌리엄스를 포함했다. 2004년엔 이름을 거꾸로 쓴 패션 브랜드 ‘아니레스(ANIRES)’를 런칭했고, 2009년에는 가방과 주얼리 사업체까지 차렸다. 은퇴 인터뷰도 스포츠 잡지가 아닌 보그와 가장 먼저 했다. 그는 “나는 은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단어는 진화”라며 “테니스에서 멀어져 다른 것들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2022.09.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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