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고향까지 300km, 나를 찾아가는 길

[라이프]by 전성기

올해 19년 동안 일한 대학병원을 정년퇴직한 강민지 씨. 주변에서는 이제부터 남편과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손님을 맞으며 자유롭고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 면 되겠다고 예상했지만 그녀는 정반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로 서울에서부터 자신이 나고 자란 뿌리가 있는 김천까지 약 300km를 온전히 두 발로만 걸어보는 것. 이 계획에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내걸고, 그녀는 퇴직한 첫 해의 가을을 오롯이 배낭 하나 짊어지고 길 위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정년퇴직 후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걷기 여행을 생각하게 된 출발점이 궁금합니다.

고향 떠나 40여 년을 서울에서 지내며 언젠가부터 늘 마음 한편에 품고 있던 생각이었어요. 1981년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고향을 다니러 갈 때 차로 잠깐씩 다녀온 것이 전부였는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컸는지, 풍경은 여전한지 천천히 음미하듯 걸어서 가보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사실 막연한 생각이었어요. 스스로도 그게 가능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죠. 그러다 정년을 2년 앞둔 어느 날 퇴직 후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바로 이 여행을 첫 번째 미션으로 정한 거죠.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도 그때 생각해둔 거였어요.


정년퇴직하는 날 제일 먼저 다짐한 것이 오롯이 혼자 걸으며 진솔하게 나 자신과 만날 수 있는 철저히 개인의 수양을 목적으로 한 순례의 여정을 떠나겠다는 거였는데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퇴직한 지 1년이 다 되어가고, 문득 퇴직 후 첫 번째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바로 배낭을 꾸렸지요.

서울에서 김천까지 장장 약 300km, 무려 17일을 혼자 걸어서 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준비 과정은 어땠나요?

퇴직 이후에는 아침마다 집 근처 우이동 계곡길 끝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 거기서 다시 오봉전망대까지 걸으면서 운동했어요. 틈틈이 북한산둘레길도 걸었고요. 그러다 김천으로 떠날 날을 정한 다음, 출발 5일 전부터는 집중적으로 예행연습을 했죠.


1시간에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 하루에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최장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등 현재 체력을 가늠해보고 거기에 맞춰서 전체 코스와 일정을 정리했어요. 하지만 코스를 너무 촘촘하게 계획해두진 않았어요. 지도를 펼쳐놓고 자전거 노선을 기본 뼈대로 하고, 숙소에 맞춰 그날그날 유동적으로 조금씩 변경하기로 했죠. 자전거나 자동차와 달리 기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걷기 여행에서는 숙소 위치가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되거든요. 사실 논밭만 있는 시골길에서는 숙소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하루 전날 숙소를 결정하고, 그 위치에 따라 다음 날 걷는 거리와 출발 시간을 결정하기로 했죠.


그리고 배낭을 꾸릴 때 가장 신경 쓴 건 무게였어요. 내내 짊어지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물건으로 단출하게 꾸렸죠. 제가 걸친 옷을 제외하면 헤드 랜턴, 체온 유지용 점퍼, 우비, 양말, 비누, 수건 정도만 챙기고 물 500ml에 사과나 사탕, 초콜릿 같은 비상식량만 조금 담았어요. 그렇게 없으면 안 되는 것 위주로 넣어도 무게가 5kg 정도 되더라고요. 그런데 중요한 건 예행연습을 할 때 배낭 무게를 생각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리고 배낭 없이 걸었는데도 제가 너무 천천히 걷더라고요. 다리 힘이 약한 편이기도 하고요. 그런 점을 감안해서 일정을 조금 여유 있게 잡고 시작하긴 했는데, 과연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 출발 전부터 걱정이 많았어요.

난관도 있고 우여곡절도 많았을 것 같아요. 어떻게 걷고,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잤는지 길 위에서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쌍문동 집 문을 나서면서부터 걷기가 시작됐어요. 서울은 저녁에도 가로등과 조명 덕분에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니 8~9시까지 부지런히 걸어서 첫날은 잠실에서 잤어요.


어느 날은 18km, 어느 날은 20km를 훌쩍 넘게 걷기도 했죠. 대신 안전을 위해서 숙소에 4~5시에는 도착할 수 있도록 그때그때 조율했어요. 많이 걸어야 할 땐 새벽 6시쯤 동이 트자마자 걷기도 했죠. 그렇게 매일 오후 숙소에 도착하면 그날 입은 양말과 티셔츠를 세탁해 다음 날 걸을 채비를 해둔 후 쉬었어요.


무엇보다 걷는 법을 따로 연습하지 못했는데, 길에서 걷는 법을 제대로 배웠습니다. 하루는 어스름 무렵인데도 숙소에 도착하지 못해서 마음이 조급했는데, 마침 도로에서 공사하던 아저씨에게 왜 이렇게 속도가 안 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제가 철퍼덕철퍼덕 걸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내딛을 때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펴면서 걸으면 힘이 들어가면서 추진력이 생긴다고 알려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아저씨에게 배운 대로 걸었더니 진짜 속도가 나는 거예요. 그리고 3일째 되니 발에 물집이 잡혔어요. 바셀린을 발라봤지만 차도가 없어서 소독약을 사려고 읍내 약국에 들렀는데, 물집은 화상이라면서 화상 치료 테이프를 주시더라고요. 그걸 붙이니까 한 5일 만에 싹 낫더군요. 그렇게 하나 또 배웠죠.

걷다 보면 길 위에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걷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일 텐데 그들과의 교감은 어땠나요?

자동차나 자전거로 여행할 때는 길 위의 사람도 그저 풍경처럼 지나쳐가곤 하잖아요. 그런데 걷다 보니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더라고요. 하루는 28km를 이동해야 하는 날이라서 새벽 6시에 길을 나서 9시쯤 어느 마을에 접어들었는데, 길가에서 들깨를 털고 계시던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눴어요. 어디를 그렇게 부지런히 가냐고 물으시길래 고향까지 걸어가고 있다고 답하니, 아니 거길 왜 걸어서 가느냐며 “걷지 마~ 걷지 마~”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자연스럽게 주저앉아 하루 종일 같이 깨를 털었다니까요. 점심밥, 저녁밥을 맛있게 얻어먹고, 서로 사는 이야기도 실컷 나누고, 잠까지 푹 잤는데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데, 어제 일한 수고비라며 5만 원짜리 한 장을 한사코 쥐여주시는 거예요. 냄비 밑에 슬쩍 넣어두고 오긴 했는데, 시골 인심을 새삼 느꼈어요.


음성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하늘이 꾸물꾸물하던 날 가을걷이하던 논을 지나는데, 아저씨 한 분이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훠이~ 훠이~” 하시더라고요. 뭐 하시나 궁금해 물으니 구름이 비를 몰고 와 나락이 젖을 수 있어서 구름을 쫓고 있다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길을 나서려는데, 이분도 저에게 5만 원짜리 지폐를 기어코 주시는 겁니다. 저와 나이 차이도 많지 않으신데 마치 막내 여동생이나 조카에게 용돈주는 것처럼요. 예전에는 타작하는 날이면 새참을 푸짐하게 준비해서 일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 건너편 다른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나누곤 했대요. 그런데 새참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가다가 꼭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영동 황관에서도 대봉과 두유를 가득 챙겨주신 72세 아주머니를 만났고요. 걷는다고 절로 사람을 만나지는 건 아니에요. 그저 걷기만을 목적으로 스쳐 지나갔다면 모두 만나지 못 했을 분들이에요. 먼저 마음을 열고 말을 걸어야 좋은 사람과 이야기 나눌 수 있고, 그들의 좋은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아요.

부모님 산소에 도착하는 것으로 대장정이 끝났어요. 도착하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은데요.

종착 지점에 가까워지면서 아는 길이 나오기 시작하니 슬슬 마음에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사람들을 만나 잠시 쉬기도 하고, 막걸리 한 병에 북어 한 마리 사 들고 유유자적 걸었어요. 그리고 드디어 산소에 도착했을 때가 마침 해 질 녘이었죠.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내가 진짜 한 발 한 발 내디뎌 결국 여기까지 이르렀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열한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아담한 마을을 산소에서 내려다보니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그리고 내려가서 한동안 비어 있던 고향집 문을 열고 들어가 아궁이에 불을 때고 마당을 쓸었어요. 아버님이 열여섯 살 때 할아버지와 함께 지은 집이죠. 평생을 한결같이 바지런했던 시부모님의 손길이 느껴져 그 집에 대한 기억이 참 좋았는데, 그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났어요. 길고 긴 여정 끝에 결국 내 보금자리에 돌아온 느낌이랄까? 마냥 그 집에 머물고 싶었어요.

중장년에게는 사실 장거리, 장시간 걷는 것이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걸어야 할까요?

떠날 때는 저 혼자 먼 길을 걸어서 가는 여행이 위험하다고 모두 말렸어요. 그런데 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일단 무조건 시작하면 그 이후에는 자신도 모르게 에너지가 생겨 다 해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그 여정에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거예요.


구체적이지 않더라도 일단 몸을 일으켜 시작하면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발현되기 마련이에요. 우리 같은 중장년도 그럴 겁니다. 무엇보다 도시의 일상은 대체로 하루하루가 별반 다르지 않잖아요.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느낌이랄까. 퇴직한 이후에는 더욱 그렇겠죠. 그런데 걷는 동안 하루하루가 다르고, 저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저녁에는 늘 지쳐서 겨우겨우 씻고 잠이 드는데, 아침이면 다시 원기가 충전되는 느낌이에요. 거울에도 그대로 비쳐지더라고요. 조금씩 햇볕에 그을리는데도 어딘가 더 생기 있고 건강해지는 제 얼굴이요. 화장을 잘 안 하니까 평소 거울을 잘 안 보는 편인데도 매일 아침 스스로가 너무 멋있어서 거울 속 저에게 멋있다고, 아주 잘하고 있다고, 그리고 오늘도 잘할 수 있다고 칭찬하곤 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요즘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혼자 걷다 보니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하루라도 젊을 때, 그리고 두 다리에 힘이 있을 때 더 멀리 더 힘든 여행을 다녀오세요.


여행사진 강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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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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