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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취재후

정박 사고 막는다던 방충재, 몽땅 ‘불량 제품’이었다!

by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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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방충재(또는 펜더)

방충재가 뭐기에?

피아노 검은 건반 같은 모양부터 엎어놓은 테이블 모양까지. 부두를 따라 줄줄이 설치된 이 시설물, 방충재 또는 펜더(fender)라고 불리는 설비입니다. 이 시설물은 배를 댈 때 사용되는 필수 설비이자 기본 설비입니다. 부두에 정박하려는 배가 '쿵'하고 부두의 시멘트벽에 세게 부딪히는 것을 막아 충격을 흡수하고 일부는 다시 튕겨내 선박이 부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비인 거죠. 전문 용어로 접안, 이안할 때 쓰인다고도 표현하기도 합니다.


방충재는 해양수산부의 에 따라 설계되는 '계류시설'의 일부입니다. 특정 부두에 몇 톤급 선박이 정박할지 결정되면 해당 선박이 받을 충격을 '안전하게' 감당할 수 있는 방충재의 종류, 크기, 수량 등이 부두 시설의 일부로 설계된 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방충재가 설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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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에 접안하는 선박과 방충재

정박 사고 막는다던 방충재, 수년째 불량 제품이 납품됐다?

그런데 이 방충재가 수년째 부실한 원료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해양경찰청이 최근 수년 동안 불량 방충재를 납품해온 제조업체와 브로커 업체, 납품 과정에서 뒷돈을 받은 정황이 포착된 관계 기관 직원 등 20여 명을 입건해 이 가운데 일부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 사실이 KBS 취재 결과 확인된 겁니다.


범죄 혐의가 입증된 것만 따져봐도 지난 2013년부터 최소 5년 동안, 전국 항만 공사에 납품된 7,583개의 방충재가 부실한 원료로 만들어진 불량 방충재였고, 돈으로 따지면 총 254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해경은 제조업체들의 이런 불량 방충재 문제가 오래된 '관행'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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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발된 불량 방충재 규모

그동안 선박 운항 중 방충재가 떨어져 나가거나 배가 파손될 경우 선박 운항자의 '운전 미숙'으로만 여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소모품인 방충재가 내 차례에서, 운이 안 좋게 떨어졌다고 여기고 항만 시설과 선박의 파손 비용을 내야 했던 항만 이용자들 입장에선 황당한 이야기인 거죠.


취재 과정에서 사실은 원래부터 규격 미달 불량 방충재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선박업계 관계자들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라면서 "지금까지 배와 부두 시설이 망가지지 않도록 최대한 살살,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운항을 해왔는데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리 수치 입력해 검증 과정 '눈속임'…납품 과정 '뒷돈' 관행도

적발된 업체들은 질이 좋지 않은 재생고무를 사용하거나 클레이(진흙 또는 찰흙과 비슷한 물질)등의 불순물을 섞는 방식으로 생산 단가를 낮췄습니다.


황당한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방충재 납품 과정에서 제조업체들은 제품의 가로, 세로, 높이 등 규격과 고무 성분에 대한 인증을 받습니다. 또 해당 제품이 선박의 무게와 충격을 얼마나 견디는지 등을 보기 위해 진행되는 성능 시험 때에도 발주처 직원들 또는 공사 감독 감리가 직접 업체를 방문해 시험 과정을 지켜봅니다.


그런데 이런 검증 과정을 거친 방충재 제품이 대부분 불량이었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요?


업체에 따라 정도는 다르지만 '눈속임' 수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합니다. 문제 업체들은 고무 성분 인증을 보내는 표본 조각인 시편은 제대로 만들어 보내고 실제 물건은 질이 좋지 않은 고무를 사용해 만들었던 겁니다. 크기 규격만 맞추면, 비전문가의 '눈'으로 좋은 고무가 쓰인 건지 나쁜 고무가 쓰인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층층이 고무를 쌓아 만들기 때문에 겉에 드러나는 고무만 좋은 고무를 사용한다 해도 알아낼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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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충재 성능 시험 모습

관계자들이 직접 나와 지켜본다는 성능 시험 때에도 대범한 범행은 계속됩니다. 제품에 압력을 가하면 기계에 연결된 모니터에선 숫자가 올라가고 그래프가 그려집니다. 방충재에 가해지는 에너지를 얼마나 흡수하고 튕겨내는지를 보는 건데 실험은 실제로 하되 수치를 조작하는 겁니다. 이미 합격 기준을 충족하는 수치를 입력해놓고 그 수치대로 그래프가 '성공적'으로 그려지도록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지켜보는 와중에 그런 일이 가능한지를 묻자 "프로그램 잘 모르니 저장된 수치를 불러오는 건지 뭘 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납품 과정에서 뒷돈을 주는 관행도 업계 관례로, 암암리에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담뱃값에 돈을 둘둘 말아 넣어 슬쩍 쥐여주기도 하고 두툼한 봉투를 몰래 쥐여주기도 한답니다. 차비, 여비 명목으로 50만 원, 납품까지 잘 마치면 2백만 원에서 많게는 천만 원까지. 추적을 피하려고 현금으로 마련되는 이 뒷돈을 받기 위해 관계 기관 직원들이 너도나도 입회 조사에 가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었습니다.

"시장 질서 잡히지 않으면 반복될 것, 새로운 점검 시스템 마련해야"

해양수산부는 제조업체들의 불량 제품 납품 제보를 입수한 뒤 조사를 실시해 해경에 수사를 의뢰했다고 했습니다. 또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증 과정을 강화했다고 답변했습니다. 납품이 확정된 뒤에도 설치를 위해 현장에 들여온 방충재 가운데 10%를(최소 1개 이상) 무작위로 선택해 성분 시험과 성능 시험을 추가로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방충재 업계에선 시장 질서가 바로 잡히지 않으면 이런 문제가 계속될 거라고 지적합니다. 항만 시설의 공사를 건설 업체가 발주처로부터 따 오면 방충재 업체들에 경쟁 입찰을 붙이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가격'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계약을 따오는 브로커 업체까지 끼게 되면 제조 업체가 가질 수 있는 돈은 더 적어집니다. 브로커 업체에서 수주 금액의 10% 정도를 떼어간다고 하니 제조업체는 공장 운영을 위해 '더 싸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항변합니다. 항만 시설 공사에서 제조업체들에 할당되는 비용에 대한 마지노선을 법으로 정해준다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현장 동행 취재를 다녀온 전문가는 납품 과정을 바로잡는 동시에 새로운 점검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해양대학교 선박운항과 이윤석 교수는 "현재 시스템으로 항만 시설에 설치된 방충재에 대한 점검은 '눈'으로만 진행된다"며 "방충재가 터지고 너덜너덜해지거나 떨어져 나가지 않으면 제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방충재는 소모품이다 보니 보통 5~7년의 주기로 교체하기는 하지만, 설치된 방충재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박민경 기자 (pmg@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