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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명당’을 탐하다…왕실 사찰은 왜 한순간에 사라졌나?

by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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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당'에서 흥선대원군은 절을 태우고, 그 자리에 아버지의 무덤을 조성한다. 왕을 바꿀 땅이요, 나라를 들썩일 수 있는 '명당'이라는 지관(地官)의 '맹랑한' 말 한마디에, 천년 고찰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돼 버린다.


'명당'에 대한 집착은 옛날이야기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미래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바뀌는 것이지 조상의 무덤을 어디에 썼는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명당'에 대한 탐욕의 흔적들을 만날 때마다 참 허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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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회암사지. 한창때는 3,000명이나 되는 승려가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승려들이 만든 물건을 거래하기 위해 절 근처엔 큰 장이 섰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권좌에서 물러난 뒤 말년을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정청지(正廳址)'에서, 은퇴한 왕은 정사(政事)도 일부 보았다. '정청지'는 정면 세 칸에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고, 넓이는 71㎡였다. 그래서 회암사는 '왕실 사찰'로 불린다.


지금은 터만 남은 회암사지. 무슨 무슨 '지(址)'로 끝나는 곳은 터만 남았다는 뜻이다. 한때 회암사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았다고 해서 '회암사지'라고 한다. 회암사지는 양주시 천보산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터만 남았는데도 웬만한 거대 사찰만큼이나 아직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것은 이 터 자체가 상징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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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지공·나옹·무학대사

사실 회암사는 고려 시대부터 존재했던 사찰인데,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이는 1326년 고려에 들어온 인도 승려 지공(指空, ?~1363)이다. "회암사의 산수형세(山水形勢)가 인도의 나란타 사원과 같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佛法)을 일으키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했다.


지공의 제자인 승려 나옹(懶翁, 1320~1376)이 1376년에 사찰을 262칸 규모로 중창했다. 승려 나옹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를 지은 분이다. 이후, 지금의 서울을 새 왕조 조선의 도읍지로 추천한 인물인 풍수지리의 대가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가 회암사에서 수행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승려들인 지공과 나옹, 무학대사의 뜻이 한 데 모여 회암사의 유명세는 더해졌다. 하지만 그리도 유명하고, 그리도 사세가 대단했어도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회암사는 1566년에서 1595년 사이 역사의 무대에서 홀연 사라진다. 이상한 것은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주시가 1997년부터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일부 유물에서 불에 탄 흔적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회암사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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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나옹·무학대사 부도탑

회암사지에서 1㎞ 정도 더 올라가면 지공과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탑(浮屠塔)이 나온다. 부도탑은 승탑(僧塔)이라고도 하며 입적한 승려의 사리를 수습해 모신 곳이다. 가장 높은 곳에 나옹, 중간에 지공, 맨 아래에 무학대사의 부도탑이 순서대로 자리해 있다. 세월이 오래되기도 했지만, 부도탑 곳곳이 손상돼 있다. 자세히 보면, 일부러 훼손한 것 같이 보이는 부분도 있는데, 이 훼손에도 명당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개입돼 있다.


지공과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탑이 조성된 곳이 천하의 '명당'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1821년

경기도 광주에 사는 한 유생이 부도탑과 비석을 훼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기 아버지의 산소를 썼다. 훼손의 정도가 매우 심각해서 지공의 비석 일부는 인근 시냇가에 버려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유생은 벌을 받았고, 7년 후 순조의 명에 따라 부도탑도 다시 세워졌지만, 무도한 훼손의 흔적은 탐욕의 현장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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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마곡사 군왕대

충남 공주에 있는 마곡사에도 '명당'에 얽힌 사연이 전해진다. 마곡사가 자리 잡은 태화산 정상으로 올라가다 보면 '군왕대(君王垈)'라는 곳이 나온다. 소나무와 활엽수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어 낮에도 해가 잘 안 보이는 작은 평지이다. 세조가 이곳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라지만,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라고 했다는 얘기가 안내문에 적혀 있기도 하지만, 예로부터 땅의 기운이 강해 군왕이 나올 만하다고 해서 '군왕대'라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조선 말기에 군왕대 일대를 파헤쳤더니 암매장된 유골이 많이 나왔고, 나라는 그 유골들을 모두 치우고 돌로 채웠다. 누구의 조상이 묻혀 있는지도 모를 곳에다 부모나 조부모의 시신을 묻은 뒤, 깊은 밤 들킬세라 몰래몰래 태화산을 내려왔을 그 후손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지 헤아리기 어렵다.


선재희 기자 ( ana@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