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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큰물에 수천 명 사망” 조선은 홍수를 이렇게 수습했다!

byKBS

조선 팔도서 '큰물'…수천 명 숨진 기록도

수해 백성에 특별 식량 배급…감세에 노역도 면제

백성 굶주리자 임금도 반찬 가짓수 줄여

KBS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이 가을에 삼남에 홍수가 났다. 충청도의 문의·회인· 청주…등의 고을은 민가 1천여 호가 떠내려갔고 익사한 사람이 수천 명이었으며, 무림사 수백 간이 일시에 물에 잠겨 승려와 속인으로서 죽은 자가 대단히 많았다. 경상도의 거창·대구·밀양 등 고을은 물에 떠내려간 것이 1천 수백여 호였고 익사자가 또한 1천 명을 넘었으며…”

위 내용은 경종실록(1723년)에 실린 기사(실록의 기록)입니다. 삼남이란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를 의미하는데, 당시 조선의 남부 전역에서 물난리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제방 시설이 열악했던 조선 시대에는 그야말로 팔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홍수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전국의 피해를 쉽게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고 합니다.

“팔도에 큰물이 졌는데 영남과 관동이 더욱 혹심하였다. 낙동강 일대가 모두 큰 바다를 이루었고 사람이 빠져 죽은 것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숙종실록, 1717년)

이처럼, 472년간의 조선 역사를 담은 조선왕조실록에는 홍수 발생과 그로 인한 손실 그리고 구체적인 상황 설명이 곳곳에 기록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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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물에 빠진 아이 구하다 3대가 숨져”

순조실록(1815년)에는 “지난달 24일과 25일의 비로 평지의 물 깊이가 석 자나 되어서 함안 등 여러 읍이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가 2천19호이며 물에 빠져 죽거나 깔려 죽은 자가 5백70명…”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석 자는 약 90cm를 의미합니다. 성인 남성의 허리춤까지 물이 차오른 겁니다.


현종개수실록(1661년)에는 “경상좌도에 큰물이 져 1백 20여 호가 침수되고 70여 명이 죽었다. 언덕과 골짜기가 뒤바뀌고 개천의 물길이 달라졌으며 농토가 망가지고 곡식이 물에 잠기는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현종 시대(1659~1674년)는 홍수와 관련한 기사가 가장 많았던 때로 확인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서비스에 따르면, ‘홍수’ 혹은 홍수를 뜻하는 다른 단어인 ‘큰물’이 표제어에 포함된 기사는 307건인데, 이 중 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에 수록된 건 63건입니다. 인조(56건·1623~1649년), 숙종·효종(28건) 때도 홍수 관련 내용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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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현종실록에는 홍수 중 있었던 본보기가 될 만한 이야기가 기록돼 눈길을 끕니다.

“황해도에 홍수가 나서…송화 사람 이시영은 자기 아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되자 시영의 어머니가 그를 구원하려다가 또 빠졌다. 시영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가 구원하다가 또 빠졌다. 그래서 조모와 아들과 손자가 같은 날 죽었다.”(현종개수실록, 1663년)


현종은 정문을 세워 이 가족의 효성을 표창했다고 합니다. 정문(旌門)이란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말합니다.

홍수에 휩쓸린 민심…임금은 개인 돈 보내고 노역 면제

범람한 강물은 인명과 재산을 휩쓸어 갔고 농경지에도 심각한 피해를 줬습니다. 수확할 곡식이 사라진 백성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고 수해의 여파는 길게 이어졌습니다. 임금은 실의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여러 구제책을 시행했습니다.


①백성에 쌀 주고 임금은 개인 돈 보내기도


강이 범람해 물바다가 됐던 지역에 임금은 내탕전을 보냈습니다. 내탕전이란 임금이 쓰는 돈을 말합니다. 수해 복구를 위해 임금은 개인 돈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철종실록(1851년)에는 "여름·가을의 홍수는 근래에 드물게 있는 것으로…특별히 내탕전을 관서에 3천 민, 해서에 2천 민을 내려 하찮은 물력이나마 고락을 함께 하는 뜻을 보이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민(緡)이란 ‘동전 꾸러미’를 세는 단위입니다.


나라에서는 수해를 입은 백성들에게는 휼전을 제공했습니다. 휼전(恤典)이란 이재민 등을 구제하기 위해 내리는 식량 등 특전을 말합니다.


영조실록(1763년)에는 “강원도에 큰 홍수가 나서 민호가 표몰되고 사람과 가축이 많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휼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고 돼 있고, 현종개수실록(1670년)에는 “정이원 및 자녀 손자 남녀 6명이 모두 죽었다.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세종은 1441년 황해도에 홍수가 나 벼농사가 손상되자 그 도에 명령해 구황할 자료를 예비하게 했다고 합니다. 구황이란 굶주림에 빠진 빈민을 구제하는 일을 말합니다. 영조는 1732년 홍수가 난 제주에 호남의 곡식 1천5백 석을 보내 백성들의 기근을 막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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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감세…“억울하지 않도록 차등”


수해 입은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줄이려는 조치도 병행됐습니다.


태조실록(1395년)에는 ”왕이 광주와 천녕 사이에서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었으므로 그 토지의 세곡을 면제하고 또 집집마다 쌀과 서속(기장·조)을 주게 하였다“고 돼 있습니다.


영조실록(1755년)에는 “‘당년조 환곡을 집이 떠내려간 자에게는 받는 것을 중지하고, 사람과 가축이 갈려 죽은 경우는 탕감하도록 하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어 조세 감면의 차등 기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당한 조세를 막기 위해 수해 지역을 일일이 방문해 피해 정도를 맨눈으로 확인하는 수고도 감내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1789년 “‘강가나 산골짜기 부근에서 침수되거나 씻겨나간 전답을 철저히 조사하여 단 한 사람의 토지에 대해서도 억울하게 조세를 징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고종은 1892년 의정부에서 “냇물에 떠내려간 토지의 결세는 허물어져 내린 면적의 사실에 따라 처리하고 진흙땅으로 된 곳은 일일이 답사하여 세액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하고 아뢰자 이를 윤허했다고 합니다.


민심 회복을 위해서는 강제 노역도 면제됐습니다. 고종실록(1873년)에는 “물에 집이 떠내려갔거나 물에 빠져죽은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감사와 수령들이 진실로 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고락을 함께할 것이니, 부역을 줄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고 안착시키기 위한 온갖 방도를 다하기에 힘쓰도록 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③ 반찬 줄인 임금…“당파 간 협력하라”


임금은 고통을 겪는 백성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감선했다고 합니다. 감선이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근신의 의미로 수라상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것을 말합니다.


영조는 1758년 홍수에 벼와 보리가 잠기자 10일간 감선을 명했고, 정조도 1779년 천재지변이 자신의 부덕 때문이라고 탄식하며 감선했다고 합니다.


1673년 현종은 홍수가 잦자 “그대들 백관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 받아 편당을 짓지 말고 함께 화목하게 협력해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세상의 원망도 도맡아 나서고 충성을 다 바칠 것은 물론, 과인의 잘못과 시정의 병통을 극언하여 잘못을 살피고 고칠 수 있도록 하라”며 당파 간 협력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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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홍수 못 막은 좌의정 “면직해 주옵소서”


태종·세조·숙종실록 등에는 수해에 책임을 지고 좌의정, 우의정 등이 스스로 면직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좌의정 목내선과 우의정 민암이 큰 비와 홍수의 재앙을 이유로 면직되기를 청하였으나, 다른 건백하는 대책은 없었다”(숙종실록, 1693년)

백성들을 대피시키지 않아 인명 손실을 야기한 관직자에 대해서는 문책이 있었습니다.

“판의주목사 이상흥·판관 김상안 등이 일찍이 낮은 지대에 사는 백성들을 옮겨두지 않았으므로 지난 6월에 큰물이 져서 민가를 떠내려가게 했으니 상흥은 장 80에 해당하고, 그 나머지 사람은 각각 90에 해당하며…”(세종실록, 1431년)

⑤ 수해로 숨진 백성 위해 나라서 제사 지내


수해로 숨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나라에서 제사를 도맡기도 했습니다.


정조실록(1792년)에는 “공주목 옥천군에 홍수가 나 1백 40여 호가 잠기고 59인이 빠져 죽었다. 관에서 거두어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 위로하라고 명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조실록(1741년)에도 “관동에 큰 홍수가 나서…익사한 자들에 대해서는 단을 설치하여 사제할 것을 명하였다”고 돼 있습니다.


그래픽 : 권세라


김재현 기자 (honor@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