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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미국 향하던 일본차 3천 대 국내에서 폐차…무슨 일이?

by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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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상한(이상한) 배가 한 척 통영에 들어왔어요, 그거 압니까(알고 있나요?)? 불에 끄실렸는지(그슬렸는지) 군데군데 새까만 게(시커멓고), 녹도 억수로(아주) 많이 슬었던데…."


지난해 5월 마지막 금요일, 퇴근을 앞둔 늦은 오후였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A 씨로부터 수화기 너머 다급한 기운이 전해졌습니다.


남해안 수산업의 전진 기지, 한때 중소 조선업체들이 밀집했던 경남 통영 앞바다에는 하루에도 수백 척의 배가 드나드는데, 도대체 어떤 배가 들어왔기에 A 씨는 그렇게 다급한 전화를 걸었는지,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저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자동차 운반선 '신세리티 에이스' 사고

지난 2018년 12월 31일, 일본 요코하마를 떠나 미국으로 가던 5만 7천 톤급 자동차 운반선 '신세리티 에이스'호가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 사고로 선원 5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화물선에 실려 있던 일본 자동차 3천여 대가 불에 타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보험 업계에 따르면 이 사고는 재산 피해 금액이 천억 원이 넘는 대형 해상 사고로 기록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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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리티 에이스’호 화재 사고 순간

문제는 파나마 국적, 일본 선사가 운영하던 이 선박의 국적이 우리나라 국적으로 바뀌면서 일어났습니다. 선주와 선사, 화주 등에 대한 손해 배상이 끝나고, 이 선박은 국제 중고 선박 시장에 매물로 나왔는데요. 국내 한 선사가 경쟁 입찰을 통해 약 35억 원에 해당 선박을 인수했습니다. 이후 지난해 2월 우리 정부의 일본 영사관을 통해 선박의 임시 국적을 취득하고 우리 영해로 '기구한 운명'의 선박은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불에 탄 화물선에 가득 실린 '황색 폐기물'

불이 났던 '신세리티 에이스'호는 화재 피해로 자력으로 운항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길이 200m에 이르는 대형 화물선은 그동안 울산과 마산, 여수와 목포 등에서 정식 입항 허가를 받지 못해, 예인선에 이끌린 채 남해안 일대를 한 달 가까이 떠돌았습니다. 그러다 예인선의 기름이 떨어져 가자, 선주는 해경에 긴급 구난을 요청하며 경남 통영시 안정국가산업단지에 입항했습니다. 화물선이 들어오자 관세청과 해양수산부, 해경 등 관계 기관은 말 그대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바로 화물선에 실린 불에 탄 자동차 3천8백여 대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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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및 그 처리에 관한 법률’

환경부 등 관계 기관은 불에 탄 자동차를 국가 간 이동이 엄격히 규제되는 폐기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및 그 처리에 관한 법률'과 '바젤 협약'으로 불리는 국제 협약에 따르면, 불에 탄 자동차에서 나오는 폐타이어, 브레이크액, 부동액, 배터리 등은 OECD 국가 간 황색 폐기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즉 양국 정부의 승인이 있어야 국가 간 이동이 가능하도록 엄격히 제한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고심하던 환경부, 1년여 만에 폐기물 수입 허가

해당 화물선을 인수한 선주 측은 경남 통영항에서 불에 탄 화물선을 수리해 다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화물선에 실린 불에 탄 자동차, 즉 엄청난 양의 폐기물에 대한 정식 수입 허가를 받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폐기물 수입 허가가 늦어지면서, 선주 측은 수십억 원의 손해를 봤다고 하소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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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리티 에이스’호 내부 모습

폐기물 수입 허가 여부를 놓고 고심하던 환경부는 지난달 화물선에 실린 자동차에 대해 정식 수입 허가를 내줬습니다. 일본 정부는 불에 탄 자동차의 경우 일본에서 수출한 폐기물이 아니라며, 폐기물의 국내 반입에 자신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관계 법령과 유사 사례를 찾아 분석하고, 일본 정부와 수차례 문서를 주고받으며 화상 회의까지 거듭하던 환경부는 오랜 고심 끝에 폐기물의 국내 반입을 정식 허가했습니다. 그동안 선박 입항 이후 1년 하고도 한 달이 더 지났습니다. 환경부 관계자는 이번 사례처럼 공해 상에서 발생한 선박 화재 사고와 그 폐기물의 국내 반입 사례는 아주 드문 경우라고 밝혔습니다.

일본 자동차 3천8백여 대, 국내에서 고철로 폐기

통관 절차를 마친 불에 탄 자동차들은 최근 하역 작업을 시작해, 앞으로 2달 동안 경기도의 한 전문 업체로 옮겨져 전량 폐기될 예정입니다. 일본 자동차 3천8백여 대가 국내에서 고철로 폐기되는 이례적인 작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세관 허가를 받아 작업이 시작된 선박에 직접 올라가 봤는데요, 내부에는 잿더미처럼 불에 탄 자동차가 가득했지만, 화재 피해를 보지 않아 비교적 멀쩡한 자동차 9백여 대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일부 차량은 시동이 걸릴 정도로 멀쩡해 보였습니다. 일본산 제품 불매 운동의 영향으로 일본 수입차에 대한 인기가 예전 같지 않지만, 이번 화물선에 실린 차량과 부품 등은 국내에서 재판매되지 않도록 세관 등 관계기관에서 엄격하게 관리해 전량 폐기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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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리티 에이스’호 차량 폐기 모습

일본에서 선박을 사들인 선주는 차량의 폐기물 처리가 끝난 뒤 불에 탄 선박의 이동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국내에서 선박 수리나 개조 여부 등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조선소 안벽 사용에 적지 않은 비용을 내야 하는 상황이어서 더는 이곳에 선박을 묶어둘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1년 넘게 통영에 발이 묶였던 선박은 오는 10월쯤 통영 바다를 떠날 것입니다.

화재 선박 정박 주변은 청정 바다의 땅… 혹여나 애타는 바다 어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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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리티 에이스’호가 정박한 통영 바다

근처 통영 앞바다는 미국 FDA(식품의약국)가 인정한 청정 해역으로, 굴과 가리비 등 각종 수산물 양식장이 밀집된 곳이기도 합니다. 통영 지역 주민들은 장기간 방치되는 이번 선박으로 인해 자칫 '청정 바다의 땅'이라는 지역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2차 오염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까 오랜 기간 남몰래 속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환경부와 관세청 등 관계기관도 후속 대책 마련에 착수했습니다. 환경 오염의 우려가 있는 수입 화물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아예 하역을 금지할 수 있도록 관련 법 개정 절차가 이미 시작됐습니다. 환경부는 '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및 그 처리에 관한 법률'에 허점은 없었는지, 이번 사례처럼 폐기물이 선박에서 장기간 방치되지 않도록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기구한 운명'인 이 선박의 다음 항해지는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례는 국내 폐기물 수입과 처리와 관련해 중요한 사례로 남을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황재락 기자 (outfocus@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