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금'엔 홍대 앞으로 책 읽으러 가요

[컬처]by 경향신문
'불금'엔 홍대 앞으로 책 읽으러 가

‘홍대 앞’ 동네서점의 터줏대감 격인 서울 마포구 땡스북스가 지난 6월 불을 환히 밝히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2018 책의 해’를 맞아 매달 마지막주 금요일에 ‘심야책방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김유진 기자

‘불금(불타는 금요일)’의 대명사로 여겨져 온 서울 ‘홍익대 앞 거리’(이하 홍대앞)의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고들 한다. 불황과 취업난이 겹치면서 홍대앞을 즐겨 찾는 청년들의 소비도 덩달아 위축된 것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금요일 밤이면 신촌·홍대앞·합정 지역은 인파로 북적댄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맛집과 술집, 클럽 등지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이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색 있는 책방으로 숨어드는 이들도 있다.


폭염이 막 시작되기 전의 초여름, ‘불금’을 맞은 홍대앞 주변을 찾았다. 지하철역 출구로 통하는 계단에서부터 물샐 틈 없이 사람들이 들어찼다. 거리에서 버스킹 공연을 하는 뮤지션들과 호객하는 상인들을 지나쳤다. 목적지는 7년 넘게 홍대앞 상권 중심가에 있다가 얼마 전 지하철 합정역 근처로 이전한 ‘땡스북스’. 디자이너 이기섭씨가 운영하는 땡스북스는 주로 학습서나 베스트셀러를 취급해 온 기존 소형 서점의 이미지를 탈피해, 개성과 취향을 살린 책 큐레이션으로 승부하는 새로운 동네 서점의 탄생을 알렸다.

'불금'엔 홍대 앞으로 책 읽으러 가

땡스북스를 찾은 시민들이 책이 진열된 서가를 유심히 보고 있다. 김유진 기자

저녁 식사 자리가 무르익을 무렵인 오후 8시. 서점 안에는 30여명이 모여 있었다. 서서 책을 볼 수 있는 테이블 앞이나 창가 쪽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작가 지망생 이연수씨(가명)는 근처에서 약속이 있을 때면 일부러 한 두시간 전에 동네 서점을 찾는 습관이 있다. 이씨는 “대형 서점과 달리 주제별로 책을 분류하거나 베스트셀러 코너가 없다는 점이 더 좋다”며 “직접 서가를 둘러보다가 숨어있는 보석 같은 책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고 전했다.


땡스북스는 초창기 서점과 카페를 결합한 콘셉트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이전한 공간에서는 커피 등 음료를 팔지 않는다. 이기섭 대표는 “이미 대형 서점들도 커피와 굿즈를 파는 문화공간으로 바뀐 지 오래”라며 “다시 책이 주인공이 되는 공간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실평수 66㎡ 남짓 되는 작은 공간에 대표와 매니저들이 손수 고른 약 3000종, 7000여권의 책을 비치했다. 큐레이션은 단골손님들을 끌어들이는 요소다. 인근 대형 서점 매장에서 일하는 박현정씨는 “책방 주인의 가치관과 취향이 드러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전했다. 이 대표는 “이 정도 규모의 공간에서는 굳이 책을 빨리 찾아볼 필요가 없다”면서 “앞으로 긍정, 용기 등 키워드라든지 우리만의 분류를 도입해볼 생각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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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서점의 매력인 큐레이션을 살린 땡스북스의 책 진열 서가. 김유진 기자

홍대앞 동네서점의 터줏대감이라는 평판에 어울리게, 땡스북스에 오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서점 방문객의 상당수는 2030세대 여성이었다. ‘성인 10명 중 4명은 1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가장 독서를 많이 하는 세대다. 데이트하는 연인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온 남성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온라인 기반 독서모임 ‘트레바리’를 통해 사귀게 된 한 커플은 “서점이나 북카페에서 데이트하고 서로 책을 추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준수씨는 “동네서점에서만 파는 문고판 에디션이나 굿즈를 소장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땡스북스는 ‘2018 책의 해’를 맞아 매달 마지막주 금요일에는 자정을 넘겨서까지 서점을 영업하며 독자들을 만나는 ‘심야책방’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디자이너 우요한씨는 “이 시간에 불이 켜져 있어 신기해서 들어와봤다”며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는데 일반 서점과는 다른 분위기가 인상적이다”라고 전했다. 현장에서 만난 정은숙 책의해 집행위원장은 “책방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지역의 문화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 심야책방의 취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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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역 인근 ‘비플랫폼(B-Platform)’의 김명수 매니저가 시중 대형 서점에서는 접하기 힘든 희귀본 예술 서적이나 그림책을 경매에 붙이는 ‘책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김유진 기자

합정역 골목 안쪽 깊숙이 자리한 동네서점 ‘비플랫폼(B-Platform)’에서는 심야책방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흥미로운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희귀본 도서들에 대한 경매를 연 것이다. 김명수 매니저가 5000원부터 경매가를 부를 때마다 10여명의 손님들이 눈을 감은 채 귀를 곤두세웠다. 비플랫폼은 북바인딩, 팝업북 만들기, 프린팅 등 책 제작을 경험할 수 있는 워크숍과 함께 그림책 독서 모임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고객들에게 책에서 파생된 다채로운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셈이다. 김의주씨는 “북바인딩 워크숍을 통해 책의 형식이 주제를 표현할 때 시너지를 낸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 매니저는 “인근 교보문고는 ‘없는 책이 없다’는 점을 내세우지만, 여기는 우리만 갖고 있는 책이 있다”며 “출판예술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공간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맥주를 곁들여 책을 읽는 ‘책맥’ 공간들도 이 근방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책 좀 읽는다는 이들에게 소문난 연희동 ‘책바’는 자정 무렵에도 모든 자리(15석)가 차 있었다. 잔잔한 재즈 음악이 배경으로 흐르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고 있던 조문희씨는 “집중이 잘돼서 매주 한두 차례는 이곳에 오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떠들썩하지는 않아도, 독서가들의 ‘불금’은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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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에 설치된 이동책방 ‘캣왕성 유랑책방’을 찾은 시민들이 책을 보고 있다. 책의해 조직위원회 제공

홍대 앞 동네 서점 생태계 … 임대료 상승 압박 등으로 위기 겪기도

대학가, 인디예술의 터전, 소비문화 중심지 등 ‘서울 홍익대 앞 거리’(홍대 앞)를 특징짓는 키워드는 역사적으로 변천해 왔다. 상권으로써의 홍대 앞도 홍익대와 지하철 홍대입구역 부근인 서교동을 넘어 상수·합정·망원동은 물론 신촌 근처인 연남·연희동까지로 확장됐다. 유동인구가 많은 이 일대에는 이미 대형마트와 외식·의류·숙박 관련 프랜차이즈 업소가 속속 들어섰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홍대 앞의 또 다른 얼굴을 꼽는다면 바로‘책의 동네’라는 점이다. 우선 책을 생산하는 크고 작은 출판사들이 곳곳에 둥지를 틀고 있어, 전국 어느 곳보다도 편집자와 작가들이 많이 드나든다. 오프라인 서점업계 1·2위인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를 비롯해 온라인서점 알라딘과 예스24의 중고도서 매장도 인근에 포진해 있다. 위즈덤하우스의 빨간책방, 창비의 까페창비 등 대형 출판사들이 운영하는 북카페도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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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 2호점의 서가 풍경. 김유진 기자

무엇보다도 독서가들이 홍대 앞을 주목하는 이유는 골목마다 개성 있는 작은 서점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네서점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 ‘어나더북스’를 보면 홍대·신촌 지역 동네서점은 20일 현재 31곳에 이른다. 이 지역에 동네서점들이 집중적으로 생겨나게 된 배경으로는 젊은층과 문화예술인이 모여드는 지역적 특성을 들 수 있다. 마포구의 한 서점 관계자는 “출판사, 문화공간이 많은 홍대 앞은 책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란 기대가 있다”며 “지역 주민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찾아오는 서점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입지조건”이라고 전했다.


홍대 앞을 중심으로 조성된 동네서점 생태계는 다양한 분야·주제를 아우른다. 동네서점이 트렌드로 자리 잡기 전인 2011년부터 운영 중인 땡스북스는 예술 관련 서적들을 앞세워 세련된 감각의 큐레이션을 선보이고 있다. 유어마인드나 헬로인디북스 등 독립출판물만을 취급하는 서점도 여럿 있다. 그림책부터 시집·여행·사진·음악 등 전문화된 분야의 도서들을 구비해놓은 서점들도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동네서점들은 문화공간으로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을 펴낸 황부농 대표의 ‘이후북스’, 아나운서 김소영·오상진 부부가 연 ‘당인리책발전소’ 등에서는 소규모 북토크, 전시, 콘서트, 독서모임 등이 진행된다. ‘퇴근길 책 한잔’에서는 ‘책맥’(책과 맥주)을 즐길 수 있다.


계간 ‘동네서점’을 발행하는 앱 개발업체 퍼니플랜에 따르면 이달 기준 전국 동네서점은 401곳. 이 중 83곳이 최근 1년 이내 문을 열었으니, 주당 1.6개꼴로 새로운 서점이 등장한 셈이다. 하지만 폐점했거나 휴업 상태인 서점도 전체의 11%인 44곳에 달한다. 홍대 부근의 동네서점들도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임대료 상승, 대형서점과의 경쟁 등이 직접적인 요인이다.


한 서점 관계자는 “임대계약이 돌아오는 2년 이후의 상황을 대비할 수 없다 보니 늘 불안정하다”며 “젠트리피케이션이 빠르게 진행되는 홍대 주변 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또 다른 서점 관계자는 “대형서점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자본이 적은 동네서점들은 웬만큼 개성이 강하지 않고서는 경쟁이 되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2018.08.2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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