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기에 ‘어머니’는 부정적 존재였지만, 오히려 저를 살게 했던 대상”

[컬처]by 경향신문

산문집 ‘익숙한 길의 왼쪽’ 펴낸 황선미 작가

2년 전 산문집 ‘아버지’ 소재, 이번엔 ‘모친의 기억’ 다뤄

“결핍은 제 글쓰기의 원천, 상처받은 이들이 잘 보여…치유·위로의 글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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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창비 서교빌딩에서 황선미 작가를 만났다. 황 작가는 어머니와 내면의 상처를 솔직히 기록한 산문집 '익숙한 길의 왼쪽' 을 출간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황선미 작가(57)의 산문집 <익숙한 길의 왼쪽>(미디어창비)을 읽다보면 환상통처럼 여기저기가 아파온다. 밥을 먹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식구들이 먹을 숭늉을 가져오기 위해 매번 자리를 떠야 했던 여덟 살의 소녀가 서러움과 반항심으로 엎어버린 솥에 데인 발등, 엄마의 매를 피하지 않고 막아냈다가 부러져 버린 새끼손가락,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사랑 대신 장녀의 희생을 강요받았던 소녀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가 시리도록 아프게 느껴진다. 이제 예순을 향해 가는 나이의 작가 안에는, 아직도 상처받은 아이가 존재한다. 그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그는 글을 쓰고, 또 썼을 것이다. 그는 “엄마가 미처 챙길 수 없었던 내면의 빈틈, 나는 나의 틈을 메우고자 허구에 매달렸고 작가가 됐다”고 말한다.


황선미는 <마당을 나온 암탉>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동화로는 드물게 160만부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로 세계 29개국에 수출되며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했다. 영국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밖에도 <푸른개 장발> 등이 10여개국에 수출되며 호평을 받았다. <익숙한 길의 왼쪽>은 황선미가 ‘세계적 작가’라는 타이틀을 모두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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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중년. 자존심 강한 사람.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허점투성이. 잘 나서지 않으나 주목받고자 하는 욕망이 큰 여자. 콤플렉스 덩어리. 외로운 사람. 남보다 스스로의 한계와 싸우는 사람.”


읽는 사람이 도리어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황선미는 내면의 상처를 투명하게 응시한다. 2년 전 펴낸 산문집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가난했던 유년 시절에 대해 털어놓았다면, 이번엔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상처를 털어놓는다. 황선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응어리’의 8할은 어머니다.


“글쓰기 강좌에서 ‘자신’을 주제로 짧은 글 쓰기를 가르쳤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소재 삼아 ‘나’에 대해 쓰기를 했는데, 저도 수강생들과 함께 썼어요. 짧은 글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나의 내면에 엄마가 많아서 깜짝 놀랐어요. 성장하는 동안 부정적인 마음이 컸던 대상인데, 오히려 저를 살게 하는 대상이었더라고요.”


냉담하기만 했던 어머니가 한밤중 다래끼로 부어오른 눈을 혀로 핥아준 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새끼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가 되어갈수록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엄마가 느껴진다는 오빠에게 버럭 화를 내기도 하지만, 4월의 꽃잎을 보면서 젊은 나이에 생선 함지를 이고 시장을 떠돌던 엄마와 겹치는 조기 비늘을 떠올리며 애틋해하기도 한다. “내가 엄마를 가장 아프게 한 상처라서 엄마가 평생 그 흉터를 확인하며 살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라고 말한다.


황선미는 중년의 나이에 느끼는 몸의 노화와 부대낌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목과 어깨, 손까지 오른쪽이 온통 아파 글을 쓰기 힘들 정도로 “오른쪽이 망가졌다”는 걸 느끼자 “이제부터는 왼쪽의 삶에 무엇이 있는지 봐야겠다. 서툴고 느리고 두렵고 어색할 테지만 왼쪽 길에도 역시 도전할 만한 뭔가가 있지 않겠나”라고 말한다. 산문집 후반부엔 ‘왼쪽의 삶’을 모색하기 위해 해외를 방문하고 체류했던 경험담이 수록됐다.


황선미 소설 속 주인공들은 상처받고 소외된 인물이다. 황선미는 “<마당을 나온 암탉>은 생산이 끝난 여성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에서 원하는 걸 성취해 나가고자 하는 인물의 성장 이야기로 그려냈다”고 말했다. 지난해 펴낸 장편소설 <엑시트>에선 성폭력으로 아이를 임신한 청소년 미혼모의 문제를 다뤘다.


“결핍은 제 글쓰기의 원천입니다. 상처받은 이들을 주로 그리는 건 내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잘 보이기 때문일 거예요. 미혼모 이야기는 스위스에서 한국인 입양아에 대한 질문을 듣고 그 뒤로 그 문제가 저를 떠나지 않아 쓰게 됐어요. 자연스레 제 안에 이야기가 고인 거죠.”


황선미의 차기작은 장편소설 <엑시트>에서 다룬 미혼모의 아이 이야기를 다룬 동화책이 될 예정이다. 또 치유와 위로의 메시지를 담은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했다.


황선미뿐 아니라 최근 국내 어린이책 작가들이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일이 늘고 있다. 황선미는 “작가 혼자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출판사·에이전시·번역 등 중간 단계의 역할이 없으면 해외로 건너갈 수가 없다. 한국 작품은 경쟁력이 있고 훌륭하다. 정책적으로 치밀하게 해외에 소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2019.03.2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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