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잘란잘란’ 자유와 힐링

[여행]by 경향신문

인도네시아 발리

잘란잘란 : 인도네시아어로 어슬렁거리며 걷다
경향신문

발리는 제국주의로 뻗어나가던 유럽 문명이 ‘때묻지 않은 아시아의 자연’을 찾아 개발한 관광지다. 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불편할 때도 있지만 천혜의 자연환경은 여전히 ‘힐링의 대명사’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진은 발리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한적한 해변으로 꼽히는 쿠부비치.

발리는 네덜란드가 ‘마지막 남은 천국’이란 이미지로 포장, 원시 문화로 유럽인을 유혹하며 힐링의 대명사로 신과 자연과 인간이 시공간을 공유하는 이곳…마음 비우고 어슬렁 거리며 걷는 휴식, 오롯이 누리시라.


직업이 여행작가인지라 여행을 가도 오롯이 휴식을 누리기는 쉽지 않다. 이번엔 큰 맘을 먹었다. 발리 출장 끝에 3일을 더 붙여 나만을 위한 휴식을 갖기로. 여행작가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늘 여행만 다녀서 좋겠다’라는 것인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여행작가 중에서 의외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 회사원에게 사무실이 일터인 것처럼 여행작가에게 여행지는 일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휴일 하루조차 없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것 같은 불안감. 그런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힐링’이라는 뻔한 여행 목적엔 그 어디보다도 발리가 적절해 보였다.

힐링의 대명사가 된 섬

발리가 힐링의 대명사가 된 이야기는 1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구 사람들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산업화를 비롯한 문명의 진보라는 가치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럽 부르주아 사이에서는 ‘미개’라고 일컫는 문화를 체험하며 피폐한 정신을 치유하는 여행이 점차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그 당시의 힐링 투어인 셈. 여행 목적지는 주로 태평양 일대의 섬이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네덜란드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1931년 개최된 파리식민지박람회에서 네덜란드는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발리섬을 테마로 잡아 꾸몄고, 네덜란드 왕실 선박회사는 발리의 자연, 전통과 예술을 홍보했다. ‘마지막 남은 천국’이라는 이미지로 여행 상품을 개발해 팔기 시작했고, 신선한 광고카피와 낯선 원시 이미지는 유럽인들을 유혹했다.


서구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의 발리 모습을 상상해보자.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고갱의 그림, 타히티의 여인들처럼 19세기만 해도 발리 여인들은 상체를 모두 드러내고 살았다. 당시 멕시코 출신의 화가인 미겔 코바루비아스의 그림을 보면 사누르 해변에서 상체를 드러낸 채 머리에 플루메리아 꽃을 꽂고 앉아 있는 발리 여인이 있다. 이런 낯선 원시 이미지는 유럽인을 넘어서 호주,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기 충분했다.


미개한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적 시선, 열대 여성에 대한 우월주의는 발리도 비켜가지 못했다. 찰리 채플린은 발리 여인들이 가슴을 드러내고 다닌다는 점 때문에 발리 여행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유왕 록펠러도 허니문 장소로 발리를 선택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양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동경, 특히 열대 섬나라에 대한 환상은 이상하리만큼 커서 유럽 제국은 20세기 초부터 지배하던 식민지를 관광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정부도 당시 식민지였던 발리를 관광지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패키지 여행을 개발했다. 1924년부터 정기 항로가 개통되자 발리 관광 붐이 일기 시작했다. 찰리 채플린이나 록펠러 같은 유명인들이 발리를 다녀오자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 발리 여행이 인기를 끌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셀럽’ 효과가 매우 컸던 모양이다. 휴양지로 부상한 태평양의 작은 열대 섬나라가 힐링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은 현지 주민들의 뜻이 아닌, 제국주의와 백인남성우월주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하와이나 타히티, 발리에서 서구의 팝송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변질된 전통 춤이 좀 슬프게 느껴진다.

아름다운 바다를 찾는다면

그러거나 말거나 현대인에게 발리는 휴양지다. 섬이니까 당연히 여행자들은 발리에서 바다를 기대한다. 하지만 발리에 처음 오게 되면 하나같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 “발리 바다는 별로네!” 보라카이나 몰디브 같은 영롱한 해변을 기대한 여행자들에게 발리 바다는 대체적으로 어둡고 거칠어서 적잖이 실망하게 된다. 특히나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가는 서쪽 해안인 쿠타 해변을 본다면 더더욱.


발리에서 처음 개발됐다는 사누르에 갔을 때 첫인상은 잊을 수가 없다. 1966년 일본의 전쟁 배상금으로 지은 최초의 고층 빌딩이자 5성급인 발리 비치 호텔이 들어서면서 발리 관광붐의 시작을 알렸던 곳이 바로 사누르 해안이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현지 아주머니는 때 묻은 손으로 주물럭거리던 옥수수를 잿더미 위에서 구워서 팔고 각종 쓰레기와 해초가 둥둥 떠다니는 바다에서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며 놀고 있었다.


서양인들이 몰려들어 활기가 넘쳤다던 아름다운 해변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발리 사람들의 맨 얼굴만 거기 있었다. 지금은 주변 섬으로 이동하기 위한 배가 오가는 선착장으로 사용되면서 어촌 마을 특유의 생동감은 남아있다. 꾸밈없는 사누르의 풍경에서 비롯된 나의 실망은 곧 ‘개발된 휴양지’를 기대한 환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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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깔끔한 휴양지를 찾아 누사두아로 향했다. 공항에서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발리의 동남쪽 누사두아 지역은 정부 주도로 개발된 대규모 프로젝트의 성과다. 굳이 비교한다면 제주 중문관광단지 같은 지역이랄까. 발리는 1950년대 이전부터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60년대부터 사누르를 필두로 발리를 관광지로 개발했다. 1970년대엔 세계적 휴양지로 격상시키기 위해 누사두아에 초대형 리조트를 입주시켰다. 힐튼이나 하얏트, 웨스틴 같은 세계적 리조트 체인들이 바로 발리의 매스 투어리즘 시대의 시작을 알린 주인공이다.


누사두아 지역은 독특하다. 공항처럼 보안검색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치안에 엄격하다. 민낯의 발리를 마주칠 필요는 없다는 듯 격리시킨 기분이 든다. 전용 해변을 갖고 있는 리조트도 많아 허니무너나 가족단위 여행자가 많다. 같은 해안을 공유하고 있지만 위치에 따라 바다는 사납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한데, 별 개수가 같은 리조트인데도 비싸다 싶으면 해변의 상태가 낫다고 생각하면 된다. 리조트를 벗어나면 크게 할 것이 없다는 점은 단점이지만 격렬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여행자에게는 좋은 선택이 된다. 자본주의의 편안함을 느끼며 해변과 리조트 수영장에 누워 음식을 시켜먹고 룸번호와 사인을 적어내는 간단한 행위만 있으면 되니까.

마음 비우고 어슬렁거리며 걷기

검게 요동치다가 곧 갯벌이 드러나는 바다. 발리에서 이런 바다를 즐기는 사람은 유일하게 호주인이다. 서핑 같은 격렬한 해양스포츠를 좋아하는 데다 비행기로 4시간이면 닿으니 호주인은 우리가 제주도 가듯 발리를 찾는다. 아름다운 바다가 많은 호주인들은 바다 물빛에 집착하지 않지만 바다물빛에 관심이 높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발리에서 어디로 가야 할까?


유명 리조트의 전용 해변인 칸디비치나 쿠부비치에 가면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원시적이고 한적한 바다를 볼 수 있다. 물론 리조트 숙박객만 누릴 수 있는 호사라는 한계가 있다. 혹은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나왔던 파당파당비치 같은 곳을 찾아가도 되겠지만,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너무 많아 인증사진을 찍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신들의 섬’이라 불릴 정도로 사원이 많은 발리에서 바다의 신을 모시는 타나롯 해상사원을 찾아간다면 신비로운 분위기의 발리 바다를 마주하고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도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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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리조트에만 머물기에는 아쉬워서 다시 우붓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큰 산을 넘어야 했다. 발리의 교통체증은 뉴욕이나 이스탄불보다 훨씬 심각하다. 늘 주차장인 2차선 도로에서 매연을 온몸으로 마시며 한두 시간을 달리면 논과 카페, 갤러리가 펼쳐지는 우붓에 도착한다.


우붓 시내에서도 차로 30분 정도 더 들어가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왔다. 우붓이 흥미로운 것은 바다에 둘러싸인 섬 안에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밀림이 있고 다시 그 안에 푸르른 논이 끝없이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계단식 논은 산 꼭대기까지 이어지고 그 중심엔 사원이 있다. 발리에는 2만개 이상의 사원(푸라·Pura)이 있다고 한다. 정확한 수치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논 한가운데 사당이 덜렁 서있기도 하고 일반 가정집이 사원인 경우도 많다. 발리의 신은 사원뿐 아니라 길, 산, 바위, 나무, 강 등 모든 곳에 존재한다.


왜 발리에서 약간은 비현실적이고 조금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나 곰곰 생각해보니 신과 자연과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발리 섬의 독특한 분위기 그리고 전 세계에서 찾아온 아티스트들의 예술적 기운 때문인 것 같았다. 이번 여행에선 스스로에게 여행 강령 같은 것을 짜주고 실천해보았다. 결과는 꽤 괜찮았다. 늘 쫓기듯 바쁜 여행을 하는, 여행지에서 뭔가 하나라도 더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여행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알람은 필요 없다. 눈이 떠질 때 커튼을 열고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논을 바라보고 유기농 커피를 한잔 마신다. 아침 요가를 하고 버려도 될 만큼 낡고 헐렁한 옷을 입고 다닌다. 스마트폰은 꺼두는 것이 좋다. 집중하지 않아도 될 만큼 쉬운 책을 읽고 유기농 음식을 조금만 먹는다. 배부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논길을 잘란잘란(jalan-jalan·인도네시아어로 어슬렁거리며 걷는다는 뜻) 걷는다.”


필자 김진

2019.11.3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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