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 '기획해체설'의 진실은?···김우중의 말 VS 이헌재의 말

[이슈]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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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014년 8월26일 대우인회 주최로 서울 여의도동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린‘대우특별포럼’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정지윤기자

대우그룹을 일군 김우중 전 회장이 9일 별세했다. 30세에 주식회사 대우를 창업한 그는 섬유를 기반으로 중화학 분야에 진출하며 승승장구했고 한때 징키스칸에 빗댄 ‘김키스칸’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공격적 해외수출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한때 삼성, 현대, LG와 함께 한국의 대표 그룹으로 불렸고 때로는 21세기엔 삼성을 앞서나갈 것이란 보고서까지 나올 정도로 앞날이 창창해 보이던 ‘김우중의 대우’. 그러나 대우그룹은 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해체되고 만다.


대우그룹 해체의 ‘정사’는 방만한 경영으로 심각하게 부실해진 대기업 구조조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 회장은 생전에 대우가 당시 금융관료들로부터 ‘희생’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기획해체설’이다. 대우 해체 20년이 넘은 지금도 생명이 끊기지 않고 남아있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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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세계경영’ 대우의 상징이었던 옛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의 1995년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우중은 왜 ‘기획해체설’을 주장했을까.


김우중 전 회장은 한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로 대우받았고, 외환위기 돌파 해법을 놓고 경제관료들과 격돌하다시피 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독대하고 오면 관료들이 보고한 계획이 보류되는 일이 잦았고 심지어 관료들 앞에서 “관리들이 열심히 안한다, 핑계만 댄다”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양측의 충돌은 국제통화기금(IMF)식의 구조조정을 얼만큼 따를 것인가를 둘러싼 견해차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의 처방을 충실히 이행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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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1998년 8월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한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경제사에서는 대우그룹 기획해체설은 ‘야사’ 정도로 다뤄져 왔다. 그러나 여전히 제조업 한 축을 맡고 있는 다수 기업들을 배출해 낸 대우그룹 창업주의 생전 발언을 잠시 주목해 보기로 한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의 회고도 함께 덧붙여 양측의 견해차가 드러나도록 했다.


김우중 회장의 발언은 <김우중과의 대화>(신장섭 저, 2014년 출간),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현 여시재 이사장)의 발언은 <위기를 쏘다>(이헌재 저, 2012년 출간)에서 각각 따 왔다. 이른바 대우 기획해체설은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유동성 위기, 대우차 매각 과정에 주로 초점을 맞춰 두 사람의 발언을 비교·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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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2014년, 2012년 출간된 김우중 회장의 회고록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김우중과의 대화> 와 외환위기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낸 이헌재 여시재 이사장의 회고록 <위기를 쏘다> 표지. |북스코프, 중앙북스 캡처

대우그룹의 부채

막대한 부채와 유동성 악화. IMF 외환위기 당시 대우그룹의 문제는 이렇게 ‘요약’된다. 하지만 부채와 유동성 문제를 두고 두 당사자의 시각은 천양지차다. 김우중 전 회장은 대우그룹의 높은 부채비율은 외환위기를 전후한 급격한 환율변동에 따른 결과였고(달러 기준으로는 부채가 변동이 없었고) 금융당국이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선을 무너뜨리기를 저어하는 바람에 환율관리를 하지 않은 문제가 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대우의 유동성 문제가 악화된 것은 금융관료들과의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이라고 봤다. 한마디로 ‘돈줄 조이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헌재 이사장은 대우의 막대한 부채가 금융당국으로선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본다. 해외 투자자들이 먼저 대우의 유동성 위기를 알아챘다는 게 ‘대우몰락사’의 정설이기도 하다. 대우그룹의 막대한 부채와 유동성 문제에 대한 두 사람의 발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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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한 대학에서 열린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저자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 초청 강연회에 참석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눈물을 닦고 있다. | 연합뉴스

◇김우중 “정부에서 환율관리를 잘못하고 그걸 기업 부실이라고 몰아붙인 것도 큽니다. 대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이 1995년에는 300%였어요. 갑자기 환율이 무너져서 1불당 800원에서 1600원이 되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달러 부채가 하루아침에 두배가 올라간 거예요.(중략) 정부가 빨리 환율 관리를 했어야 해요. (1995년~1996년 시기) 1인당 국민소득 1만불 넘었다고 선전하다가 그게 잘못될 것같으니까 환율을 건드리지 못한 거지요. 정부가 환율 관리 잘못해서 기업이 피해를 당한 거지 기업이 외환위기를 일으킨 게 아닙니다.


◇김우중 (DJ정부 경제팀과의 견해차로 관계가 틀어진 이후에 대한 질문에) “개선할 여지가 없었지요. 그쪽은 (내가 DJ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자신들의 의견을 불신하게 만든다는) 확증을 잡았으니까…. 우리를 어떻게 제거하느냐는 것이 목표가 됐겠지요. 우리 약점을 잡아서 어떻게 공격하느냐를 생각했을 거예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얘기하는 것이냐’는 신장섭 교수의 질문에) 우리 돈줄을 죈 거지요. 그때는 (국내)은행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고 해외에서도 안되니까 유동성이 제일 문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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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는 모습. | 청와대사진기자단

김우중 전 회장은 현금흐름을 어떻게든 잇기 위해 기업어음과 회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정부가 그룹별 기업어음·회사채 한도액를 두는 조치를 하는 바람에 “유동성 문제에서 꼼짝을 못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우그룹의 경고의 ‘상징’으로 통하는 노무라 서울지점의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는 정부의 회사채 발행 제한조치 이틀 후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헌재 이사장은 대우그룹의 부채규모가 큰 데다가 계열사 간에 얽히고 설켜있었으며, 대부분이 해외채무여서 문제가 컸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면서 ‘워크아웃이 힘들 수도 있다’는 다른 관료의 발언을 전하는데, 한마디로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살려내기 어려울 수 있는 지경이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다른 그룹들은 나름대로 성실히 이행한 ‘자구노력’을 대우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헌재 “대우는 왜 소프트 랜딩(연착륙)하지 못했을까. 대우의 채권 구조가 복잡했던 게 큰 이유다. 대우는 채권자를 접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채무의 70%가량이 수익증권 등을 통해 수십, 수백만 명의 일반 투자자들에게 전가돼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수는 심지어 해외 채무였다. 게다가 계열사 간 채권·채무도 얽히고 설켜 있었다. 서근우 금감원 제3심의관이 “너무 복잡해 워크아웃이 힘들 수도 있다”고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이헌재 “대우가 해체된 건 시간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99년 7월까지 대우는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다. 자산 매각이든 외자 유치든 5대 그룹 중 꼴찌였다. 98년 5월 제출한 그룹별 구조조정 계획. 삼성·현대는 목표치의 100% 넘게, SK·LG는 90% 넘게 자구 노력을 달성했지만 대우는 고작 18.5%였다. 시장은 늘 꼴찌부터 삼킨다. 동물의 세계와 마찬가지다. 대우는 그런 시장의 법칙을 외면했다. 7월 19일에야 김우중 회장이 “모든 것을 던지겠다”고 나섰지만 너무 늦고 말았다.”

“심각한 부채와 부실,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VS “자기들(관료들)이 나서서 해체한 것”

김우중 전 회장은 ‘꼴찌부터 삼키는 시장의 법칙을 외면했다’는 이헌재 이사장의 발언에 대해 “자기들이 나서서 해체한 것이지, 어떻게 시장이 해체한 것이냐”고 회고록에서 반문했다.


자구노력에 게을리했다는 평가에 대해선 “수출해서 돈 벌 수 있는데 왜 자산을 팝니까”라고 대꾸하기도 했다. 그는 대우그룹 특유의 공격적 해외수출로 당시의 위기를 타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해외 국가에서는 통상적으로 하는 ‘수출금융‘을 정부가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수출금융이란 수출물건을 주문한 쪽에서 발행한 환어음을 은행이 할인해주는 것으로, 이런 절차를 거치면 수출업체에 바로 현찰이 들어오기 때문에 단기차입금이 필요없었다는 것이 김우중 전 회장의 설명이다.)

대우 몰락의 중심 ‘대우차’, 그리고 헐값매각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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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자동차가 1997년 출시한 중형 세단 ‘레간자’. 경향신문 자료사진

“자동차 빼고는 다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요 자동차도 사실은 실패라고 할 수 없어요 거의 다 됐는데 IMF사태를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니까.”


김우중 전 회장 스스로 이렇게 말할 정도로 대우자동차는 대우 몰락의 ‘정점’에 있던 기업이다. 하지만 대우차는 한때 김우중에게 ‘김키스칸’이란 별칭을 달아준 기업이기도 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1978년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한때 제너럴모터스(GM)와 지분 50 대 50으로 함께 운영하다가 14년만인 1992년 GM으로부터 지분을 모두 사들인다. 3년 후 GM과 대우차는 ‘경쟁자’로 맞붙는다. 폴란드 FSO 인수를 놓고서다. 당시 김우중 전 회장이 이겼고, 이 때문에 서구언론이 그를 징기스칸에 빗대어 ‘김키스칸’이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물론 대우차가 FSO인수에서 승자가 된 이유는 100% 고용승계 등을 내거는 등 GM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대우차는 GM과 결별하고 경쟁자로 맞붙은 이후에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는데 판매망과 부품사업 등 ‘협조’할 때 나오는 이득이 많았기 때문이다. GM에게도 대우차는 손잡을 때 이득이 되는 기업이었다. 특히 1996~1997년 대우가 잇따라 내놓은 누비라, 레간자, 라노스는 GM에겐 “없거나 약한” 스타일의 차종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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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자동차가 1997년 내놓은 ‘누비라’.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우중 전 회장은 외환위기 당시 GM과의 합작 협상은 이런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GM측이 먼저 제안해 와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이헌재 이사장은 전혀 다르게 본다. 당시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던 대우에게 GM과의 합작이 유일한 돌파구였고, 그래서 GM에게 매달렸다고 본다.


이헌재 “돌이켜 보면 김우중 대우 회장은 제너럴모터스(GM)와의 전략적 제휴에 모든 걸 걸었던 것 같다. GM에 대우차 지분 절반을 팔아 약 70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하려 했다. 그러면 정부의 구조조정 압박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불가능한 협상이었다.”

김우중 “(GM이 1997년 5월, 한국이 IMF 체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합작을 제안했다고 설명하면서) 그때는 GM이 힘들 때였다. 오펠(당시GM의 자회사)이 유럽이나 신흥시장에 팔 소형자들을 내놓아야 하는데 잘 안됐다. 토요타에 치여서 남미, 유럽, 중국에서 다 밀리고 있었다. GM이 중국시장에 빨리 들어가려면 우리 차를 갖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미 자동차 3종(누비라, 라노스, 레간자)을 개발하고 팔기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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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자동차가 1996년 출시한 소형 승용차 ‘라노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헌재 “대우의 오랜 협력·합작사였던 GM은 대우의 사정을 김 회장만큼 잘 꿰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자신들 편이란 것도 알았다. 조건을 바꿔 가며 질질 끌더니 1998년 7월 협상을 깨고 만다. 그러면서 대우가 스스로 살아날 방법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후 시간을 벌어주던 삼성과의 빅딜(삼성차 인수하고 대우전자를 삼성에 내주는 사업맞교환)마저 깨진 99년 6월 말, 김 회장은 사면초가에 빠진다.”

김우중 전 회장은 이헌재 이사장의 위 발언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1998년 7월) 그때는 모든 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중략) (이헌재 이사장이) 회고록에서 뒤늦게 그렇게 말하는 건 다른 의도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무슨 뜻이냐’는 신장섭 교수의 추가질문에 김 전 회장은 “대우 해체 시킨 다음에 대우차를 거의 공짜로 GM에 넘겼는데 그 잘못을 가리려고 하는 걸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김 전 회장은 그러면서 “GM이 경쟁사들보다 중국에 제일 늦게 진출했지만 중국시장에서 1등이 되어 있다, 거기서 많이 팔린 차들이 뷰익, 쉐보레인데 그 차들이 사실은 대우의 누비라, 마티즈, 라노스 모델에 이름만 바꿔단 것”이라면서 “GM이 대우차를 인수한 것 때문에 2000년대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예정대로 우리와 GM간에 합작이 이루어졌으면 중국시장을 우리가 함께 갖고 갈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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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송하진 전북도지사와 김승수 전주시장 등 도내 14개 지역 시장·군수가 ‘한국 GM 군산공장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GM 정상화와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GM이 한국을 빠져나가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되던 때다. 현재 GM은 군산공장 폐쇄에 이어 부평, 창원공장의 가동률도 줄이고 있다. | 연합뉴스

진정한 승자는 GM(?)

대우해체 뒤 2002년 GM은 대우차를 1조6000억원에 인수하는 ‘행운’을 누린다. GM 측이 대우와 협상을 벌이다가 1999년 12월 이헌재 이사장 앞으로 보낸 ‘비밀 인수의향서’상 인수액은 (부채는 인수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6~7조원이었다고 한다. 20%도 안되는 가격이다. 게다가 당시 GM은 산업은행으로부터 20억달러의 자금지원을 받았고 마티즈 라인도 함께 인수할 수 있었다. 1999년 말 감사보고서상의 대우차 자산가치는 약 150억달러였다. 잘못이 누구에게 ‘더’ 있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으로 남게될 지 몰라도 어쨌든 대우차가 헐값에 GM에 넘어간 것만은 ‘역사적 사실’이다.


2018년 GM대우 군산공장 폐쇄를 결정한 GM을 두고 한국으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은 이 기업이 결국은 한국을 빠져나가려 한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GM측이 GM대우 신차 배정 등을 약속하면서 논란은 잠시 가라앉는 듯 했지만 부평·창원공장의 가동률을 떨어뜨리고 비정규직부터 해고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대규모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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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GM 군산공장 | 연합뉴스

GM도 2008년~2009년 세계금융위기로 도산 위기를 맞아 구조조정을 겪은 적이 있다. 하지만 과정과 결과는 대우와는 전혀 달랐다. 신장섭 교수는 김우중 전 회장과의 대화록 서문에서 미국 정부가 GM을 인수하고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했다는 사실을 부각했다. 신 교수는 “(GM은 그후) 불과 4년만에 회생했다”면서 “정부도 투입자금 80% 가량을 회수했다”고 말한다.


신 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미국 정부는 GM에 부실 요인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구제했다. (미국은)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부실하면 시장원리에 따라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 ‘대마불사론에 사로잡히지 말라’라고 전 세계에 설교했지만 정작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마’라고 하는 회사들을 부실 여부와 관계없이 다 살려냈다.”

분식회계와 추징금

기획해체설을 어떻게 볼 것이냐와 별개로 김우중 전 회장이 이른바 ‘세계경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분식회계를 저지른 것은 그 자신도 인정하는 큰 잘못이다. 그는 21조원대 분식회계와 9조9800억원대 사기대출 사건으로 2006년 징역 8년6개월,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복역하다가 2008년 특별사면된다.


그는 회고록에서 “분식회계에 대해서는 국민들이나 다른 관계자들께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다시 드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분식을 했더라도 그 돈을 비자금이나 다른 용도로 빼돌린 게 전혀 아니다”라면서 이런 내용이 판결문에도 명시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당시 대우 사장단이 10조원에 대해서는 분식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그것까지 다 넣어서 분식 액수가 부풀려졌다”고도 했다.


추징금에 대해서는 “국내자금을 해외법인으로 보낼 때 신고하지 않은 것, 해외 현지법인 차입금 신고하지 않은 것 등을 전부 합산해 개인들이 외화를 불법반출한 걸로 잡아서 추징금을 매겼”다면서 “해외 현지법인 차입금은 상환하고 다시 차입하며 롤오버(roll-over)를 했는데 차입금만 단순 합산했다, 도박판에서 판돈 계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윤경·최민지 기자 기자 kyung@kyunghyang.com

2019.12.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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