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선 “예능이라는 전쟁터에서 버텼더니 ‘젖은 낙엽’도 다시 뜨네요”

[컬처]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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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달리는 댓글들은 대부분 ‘너무 지겹다’ ‘하나도 안 웃긴다’ ‘후배에게 자리 좀 양보해라’ 이런 이야기들이에요. 다 맞는 얘기예요. 그래요. 저 안 웃깁니다. 근데 여러분. 이렇게까지 못 웃기는데 이렇게까지 쓰는 거 보면 그것도 능력 아니겠습니까?”


1986년 데뷔 이후 어느덧 33년차

결혼 뒤 ‘주책맞은 아줌마’ 도맡아

‘순풍산부인과’ 계기로 본격 연기

‘세바퀴’ 등선 멘트 교통정리 두각

‘우결’ 때 공감능력·리액션 돋보여


지난달 16일 처음 방송한 KBS 2TV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 <스탠드 업> 무대에서 데뷔 33년차 예능인 박미선(52)은 당당했다. 후배들이 자신을 존경하는 이유는 “선배님처럼 웃기고 싶어요”가 아니라 “선배님처럼 오래 해먹고 싶어서”라며 셀프디스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말해온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박미선은 자신이 오랫동안 방송계에서 버틸 수 있었던 비법으로 ‘젖은 낙엽 정신’을 꼽았다. “2인자면 어때요. 결국 돌아봤을 때 인생을 완주하는 게 중요한 거거든요. 젖은 낙엽 정신으로 바닥에 바짝 붙어서, 그 대신 고개는 하늘을 쳐다보세요. 그리고 천천히 버텨 보는 거예요.”


‘67년생 박미선’의 말은 곧 여성 예능인의 역사다. ‘코미디계 대모’라 불리지만 지금도 남성 연예인들 틈을 “비집고 버티고 있는 중”이며, 이름보다 ‘누구의 아내’로 소환되는 날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박미선은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다. 젖은 낙엽 정신으로 버텨왔다는, 박미선의 33년을 되돌아봤다.

‘별난 여자’, 개그맨이 되다

원래 꿈은 연기자였다. 연극영화학을 전공했고, 1986년 연극배우로 처음 데뷔했다. 1987년에는 대하드라마 <토지> 서희 역을 맡을 배우를 찾는 오디션에 참가했다. 면전에서 퇴짜를 맞은 그는 충격으로 연기자의 꿈을 접게 된다. 그로부터 1년 뒤 MBC 개그콘테스트 금상을 수상하며 개그맨으로 방송 데뷔를 했다.


여성 개그맨들 역할이 주로 남성 개그맨들 옆에서 딴죽을 걸거나 분장을 통해 웃기는 것으로 제한되던 시절, 박미선은 한국형 스탠드 업 코미디의 시초인 MBC <일요일 밤의 대행진> ‘별난 여자’ 코너를 담당했다. 별다른 동작 없이 가만히 서서 시종일관 말로 게스트를 들었다 놨다 했던 박미선은 여성 개그맨의 세대교체를 알린 그야말로 별난 여자였다.


자신만의 독보적 입지를 다지던 20대 중반, 개그맨 이봉원과 결혼했다. 박미선은 그대로였지만 사회의 시선이 달라졌다. ‘사고뭉치’ 남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불행한 아내 역할을 강요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결혼을 하고 나이가 많아지면 ‘주책맞은 아줌마’로서 남편 험담을 하기를 원하지, ‘지금 너무 행복해’라는 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나는 남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데, 방송에서는 인간 박미선이 아니라 이봉원과 결혼한 박미선을 원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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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은 굴하지 않았다. SBS <순풍산부인과> 등 시트콤을 접점으로 연기 활동에 나섰고, 새로운 진행자 모델을 제시하며 대중 앞에 섰다. MBC <세바퀴> 등 소위 한 성격하는 출연자들의 멘트를 정리하고 빈틈을 메워주는 ‘교통정리’를 도맡았다. 박미선은 “오른쪽으로 가려는 사람 왼쪽으로 끌어오고 왼쪽으로 가는 사람 오른쪽으로 데려오고. 그게 사실은 내가 못 웃겨서 그런 것 같다”며 자평했다.

맨몸으로 전쟁터에 서다

남성 예능인이 사건·사고에 휘말리고도 예능계 중심으로 끊임없이 불려 들어오는 것과 반대로 박미선은 별다른 사고가 없었음에도 주변부로 밀려났다. 30대 후반에 들어선 2004년 SBS <세상에 이런 일이>를 통해 메인 진행자에서 패널로 자리를 옮기는 충격을 겪게 된다.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패거리 중심의 버라이어티 예능이 득세하면서 기혼 여성 예능인의 자리는 더 좁아졌다. 토크쇼 한구석에서 프로그램의 윤활유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줄하차는 피할 수 없었다. 2014년 6년간 진행했던 <세바퀴>에서 하차했으며, 합류할 당시 “한 달 써보고 괜찮으면 계속 쓰겠다”는 말을 들었던 KBS <해피투게더>에서는 2015년 전현무와 김풍 등 남자 연예인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저는 예능이라는 전쟁터에서 맨몸으로 32년을 버텨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 전쟁터에 나가지도 못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제가 왜 맨몸으로 싸워야 했는지 잘 알게 됐습니다.” 박미선은 책 <을들의 당나귀 귀> 추천사에서 예능판을 ‘전쟁터’로 비유했다. 데뷔 30년차를 넘긴 그는 자신이 건너온 길이 어떤 길인지 이제 안다. 자신과 동료들이 뛰어든 전쟁터, 공고한 남성연대로 기울어져 있는 그 황무지 같은 땅을, 박미선은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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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주분들, 저를 쓰세요!

박미선의 자리는 잠시 사라졌지만, 대중이 그를 기억했다. 편견과 달리 그는 꾸준히 우리를 웃겨왔다. 그리고 그 덕에 인터넷 ‘밈(Meme)’ ‘짤방’으로 사람들에게 소비되기 시작했다. MBC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보여준 탁월한 공감능력과 리액션은 ‘내 안의 박미선’이란 말로 대표되며 ‘망붕(망상분자)’의 상징이 됐다. SBS <순풍 산부인과> ‘미달이 방학숙제’ 편에서 미달이의 그림일기 숙제를 대신 해주며 ‘스토리는 내가 짤게. 글씨는 누가 쓸래?’라고 말한 대사는 누리꾼들 손에 수많은 형태로 변주되며 방송 20년 만에 유행어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의 세계에선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온라인에서 인기를 끈 ‘묻고 더블로 가!’ 김응수(<타짜>)나 ‘사딸라!’ 김영철(<야인시대>)이 광고주들의 러브콜을 받고 CF모델로 발탁된 것과 대조적으로 박미선의 유행어는 패러디물로 대신되며 무분별하게 ‘공짜로’ 광고에 쓰이게 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대체로 여성 연예인을 대상으로 이러한 꼼수가 횡행한다며 비난이 들끓었다.


박미선은 욱하거나 억울해하는 대신 노련함으로 대응했다.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에 출연한 그는 ‘광고를 하나도 못 찍었다’는 말에 “캐리커처를 하면 대신 (광고에) 쓸 수 있대요. 그래서 조금 기분이 안 좋았어요”라고 솔직한 심경을 밝힌 뒤 “광고주 여러분들, 저를 쓰세요!”라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스탠드 업>에서도 이 문제를 재치 있게 지적했다. “‘드디어 나에게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오나보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러분. ‘묻고’ ‘됐고’ ‘사딸라’만 광고를 찍더라고요.”

젖은 낙엽, 바람을 타고 날다

“거창한 목표 말고 작은 목표 하나하나 이루어 가다보면 어딘가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꼭 있어요.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해요.” 33년의 방송생활 중 단 두 달 휴식기를 가졌다는 그는 결국 자신에게 꼭 맞는 자리를 찾아냈다. 사회의 편견과 통념에 과감히 도전한 국내 최초 젠더 토크쇼 EBS <까칠남녀>(2017~2018)와 우리 사회 가장 뜨거운 곳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사 토크쇼 KBS 2TV <거리의 만찬>을 통해서다.


휴식기 이후 ‘스탠드 업’ 무대 복귀

“기회 생기면 목소리 낼 준비했다

그런 게 시대와 맞아떨어졌을 뿐

자리보다 뭘 할 수 있다는 게 중요”


박미선은 때를 만났다고 말한다.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목소리를 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런 게 시대와 맞아떨어진 거다. 도전하는 것을 좋아해서 두려움은 없었다.” 소리 지르고 우기고 서로 상처를 주는 ‘아재 엔터테인먼트’에 질려버린 시청자들은 박미선의 유연하고 품위 있으면서도 때론 허를 찌르는 우아한 진행에 반가움을 감추지 않는다. 그는 ‘꽃’ 혹은 ‘센 여자’로 정체화하지 않아도, 여성이 예능판에서 오래도록 일할 수 있다는 선례를 몸소 보여줬다.


젖은 낙엽처럼 엎드려 때를 기다리던 박미선은 ‘시대의 바람’을 타고 다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박미선은 후배들에게 당부한다. 끝까지 버티라고.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해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거기에 열정적으로 미쳐보면 또 다른 일들이 생겨요. 제가 그렇게 살았어요. 여러분도 하실 수 있어요.”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2019.12.3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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