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없이 콘돔 뺀 남성들… “스텔싱도 성범죄다”

[이슈]by 경향신문

독일 등 해외선 성범죄로 처벌…국내선 법 조항 자체가 없어

여성들이 피해 고스란히 감당…‘비동의 간음’부터 확립돼야

경향신문

연합뉴스

20대 대학생 ㄱ씨는 2018년 초 학과 행사에서 선배 ㄴ씨를 알게 됐다. ㄴ씨는 “행사에서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주변인들에게 말했다. ㄱ씨는 ㄴ씨의 발언과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이들은 연인이 됐다. ㄴ씨는 사귀자마자 태도를 바꿨다. 성관계 때 “콘돔을 사용하니 느낌이 별로”라며 빼고 하자고 조른 적이 많았다. ㄱ씨는 그해 8월 성관계를 가지던 도중 ㄴ씨가 콘돔을 제거한 사실을 알게 됐다.


중도 휴학을 한 ㄱ씨는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1년째 정신과에서 공황장애·우울증 등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학교에서 ㄴ씨와 마주칠 때면 손이 떨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는 성관계 도중 동의 없이 피임도구를 제거한 ㄴ씨 행위가 해외에서 성범죄로 처벌되는 ‘스텔싱’(stealthing)이란 것을 뒤늦게 알았다. ㄱ씨는 “여러 국가에서 스텔싱은 명백한 성범죄로 처벌하는데 한국에선 처벌 대상이 아니다. 사법부 판단을 받고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고소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ㄷ씨(24)는 피해를 두 번 겪었다. 첫 피해는 대학 시절 만났던 남자친구에게 당했다. ㄷ씨는 남자친구 ㄹ씨와 성관계를 가진 뒤 우연히 산부인과 검진을 받았다. 산부인과에서 피임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ㄹ씨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자 “네 주변에 남자가 많아 화가 나서 그랬다”는 답이 돌아왔다. ㄹ씨는 “네 부모님께 네가 문란하게 낙태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겠다”고 협박도 했다.


10월 만난 ㅁ씨도 똑같았다. ㄷ씨는 또다시 산부인과에서 사실을 알았다. ㅁ씨는 “네 주변에 이 일을 이야기하겠다”며 잠적했다. ㄷ씨는 밥 먹을 때도,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불쑥불쑥 당시 상황이 떠오른다고 했다. 1년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ㄷ씨는 온라인상에서 또 다른 스텔싱 피해자를 만나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는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빨리 알아채기 어렵다. 피해를 증명하기도 힘들다. 피해자 중심적인 제도나 의식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 스웨덴, 캐나다는 스텔싱을 강간에 해당되는 성범죄로 처벌한다. 지난해 12월 독일 베를린 지방법원이 성관계 도중 상대방 몰래 피임기구를 뺀 남성에게 유죄를 선고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국 법원은 스텔싱을 강간·준강간 등 성범죄로 보지 않는다. 스텔싱을 처벌할 수 있는 법 조항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손해배상 청구 등 민사소송도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제기하기 힘들다. 여성들이 피해를 고스란히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다. 이은의 변호사는 “한국에서는 피해자가 항거 불능 상태였거나 폭행·협박으로 피해자의 의사에 반했다는 게 명확해야 성범죄에 해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스텔싱은 성범죄로 의율될 수 없다”고 했다.


스텔싱을 성범죄로 처벌하려면 ‘비동의 간음’부터 확립돼야 한다. 비동의 간음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 전반을 성범죄로 보는 개념이다. 이 변호사는 “비동의 간음이 법체계 안에 들어온다면 스텔싱 등 여러 성범죄를 논의할 토대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

2019.12.2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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