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엘 “너 없이 원래 나 잘해”…홀로서기 나서도 ‘나쁜 기집애’는 계속된다

[컬처]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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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씨엘이 2016년 그룹 2NE1 해체 이후 약 3년간 이어진 공백기를 부수고 나왔다. 10년 넘게 함께한 YG엔터테인먼트와 결별한 씨엘은 지난달 앨범 <사랑의 이름으로>를 발매했다. 씨엘 제공

“다 안 해/ 너 없이 원래 나 잘해/ 얻다 대고 지금 탓해/ (…)/ 난 네 게 아니야 NO/ 멋대로 살 거야.”(‘+안해180327+’)


씨엘(CL·29)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지난달 4일, 씨엘은 2016년 그룹 2NE1 해체 이후 약 3년간 이어진 공백기를 부수고 나왔다. 10년 넘게 함께한 YG엔터테인먼트와 결별한 후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프로젝트 앨범 <사랑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Love)>를 발매한 것이다. 단숨에 토해낸 6곡의 신곡은 지난 10년간 단 4곡의 솔로곡 발매만을 허락했던 YG에 대한 날선 분노 위에 차분히 구축돼 있다. 곡명마다 빼곡하게 적힌 창작 날짜들은 음반이 발매되지 못했던 동안에도 꾸준히 음악 작업에 매달려왔던 씨엘의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씨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한결같다. 강하고, 멋지다. 그는 첫 솔로곡 제목이기도 한 ‘나쁜 기집애’ 그 자체였다. 그는 세상이 무시하고 모른 체하던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와 얼굴을 대표하며 한국 사회에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여성 아이돌’ 캐릭터를 구축해왔다.


편견과 차별에 상처 입은 모든 여성들 위한 연대의 음악 펼쳐 ‘멋있는 여자’로 우뚝

2NE1 해체 이후 3년 공백 깨고 새 출발…분노서 시작했지만 경쾌한 앨범 ‘주목’

“나는 ‘외계인’…누군가 선택해 주길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 갈 것”


“저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을 모두 사랑해요.” 그는 늘 ‘세상의 기준’ 바깥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는 이들과 연대해왔다. 특히 편견과 차별에 희생된 여성, 특히 아시아 여성을 대표하려 노력했다. ‘이 세상 모든 씨엘을 위해’ 새 앨범을 만들었다는 그의 말에서 ‘사랑’이 느껴지는 이유다. 데뷔부터 홀로서기까지 10년, ‘나쁜 기집애’로서 ‘사랑의 이름으로’ 연대를 지속해온 그의 시간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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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여성이 세상을 바꿀 때”

“우린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아시아 여성들이 앞으로 나와 세상을 바꿀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2012년 6월 프랑스에서 열린 칸 국제광고제에서 연설자로 참석한 2NE1 멤버들에게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이 나오자 씨엘은 이같이 답했다. 그해 프랑스 한류 팬 사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K팝 스타’로 꼽혔던 2NE1은 실로 세상을 바꿔가던 중이었다. 2009년 데뷔와 동시에 2NE1은 멤버 각각의 개성이 살아 있는 강력한 음악과 퍼포먼스로 K팝 역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파급력 있는 걸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파이어(Fire)’, ‘내가 제일 잘나가’, ‘아이 돈트 케어(I Don’t Care)’ 등 숱한 히트곡을 남기며 활동 기간 내내 ‘음원 강자’로 군림했다.


리더 씨엘은 2NE1의 중심이었다. 데뷔 때부터 ‘YG 공주’라 불리며 소속사의 핵심 인재로 지목됐지만 씨엘은 스스로를 YG가 만든 ‘기획’ 혹은 ‘상품’으로 축소할 생각이 없었다. “2NE1 활동할 때부터 여성을 대표하고 싶었다. (…) 아시아 여성에 대한 ‘소극적이다. 부끄러움이 많다’ 등 이미지를 항상 깨고 싶었다.” 일본·프랑스 등에서 국제학교를 다니며 성장한 그는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외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뼈아프게 간직해왔다. 특히 ‘아시아 여성’에게 가해지는 편견과 차별은 씨엘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2NE1으로 시작된 아티스트로서의 삶은 그로 하여금 전 세계에 개성 강한 아시아 여성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그는 패션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소신과 생각을 바탕으로 제러미 스콧, 스눕독, 윌아이엠 등 세계 유명 인사와 자연스레 교류했으며 전 세계 음악 팬이 열광하는 색깔 있는 여성 솔로 가수로서의 데뷔도 훌륭하게 치러냈다.

“그래 나는 세, 아주 사납게”

2013년 5월 발표된 씨엘의 첫 솔로곡은 ‘나쁜 기집애’였다. “그래 나는 세, 아주 사납게”라는 도입부 가사처럼 그는 강력한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적극적인 여성상을 선보였다. 이 곡에 대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 강해지고 더 당당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만들었다”고 밝힌 그는 제목의 뜻이 ‘나쁜 여자’가 아닌 ‘멋있는 여자’에 가깝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이 곡은 목소리를 채 갖지 못한 이들을 위한 연대의 음악이었던 셈이다.


앞서 씨엘은 2011년 발표한 2NE1의 곡 ‘어글리(Ugly)’ 탄생 비화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해요. 저 같은 경우 공적인 공간에서 많은 공격을 받기도 했죠. ‘아마 그 사람들에게는 제가 못생겼을 수도 있을 것’이란 대화를 나누다 곡을 만들게 됐어요.”


씨엘은 데뷔 직후부터 걸그룹답지 않은 외모를 지녔다는 터무니없는 힐난에 시달려왔다. 그는 외모지상주의에 상처입은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곡 ‘어글리’를 통해 비뚤어진 편견의 실체를 그대로 전시하는 방법으로 차별적인 사회와 싸워나간 것이다. ‘나쁜 기집애’는 ‘어글리’를 통해 위로받았던 여성들에게 바치는 ‘응원가’에 가깝다. 잘못된 편견에 순응하는 것을 ‘착하다’ 부르는 세상 속에서, 자기 ‘멋’대로 ‘나쁘게’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과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그는 늘 음악과 퍼포먼스로 강조해왔다.

평창올림픽 폐막식…“지구 한 바퀴 돌아봐 나 같은 여자는 없어”

아무리 ‘나쁜’ 여성을 표방한다 하더라도, 냉혹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시련 없이 살아남는 것은 젊은 여성에게 특히 불가능에 가깝다. 씨엘 역시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와 별개로 돌파하기 어려운 시기를 오랜 시간 견뎌내야 했다.


2014년 씨엘은 미국의 유명 연예기획자 스쿠터 브라운의 눈에 띄어 당시 아리아나 그란데와 저스틴 비버 등이 소속됐던 기획사 SB프로젝트와 계약을 맺으며 미국 진출을 한다. 스크릴렉스, 디플로 등 미국 유명 DJ와의 협업이 이어졌고 2015년 미국 데뷔가 확정됐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첫 프로모션 음원인 ‘헬로 비치스(Hello Bithes)’도 발표됐다. 2016년 발표한 ‘리프티드(Lifted)’는 한국 여성 아티스트 최초로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순항하는 듯한 미국 데뷔는 씨엘이 2NE1의 마지막 앨범 준비를 위해 귀국하면서 미뤄지게 됐다. 그러나 당시 YG는 알 수 없는 이유로 2NE1의 앨범 발매를 연기하다 결국 2017년 1월 2NE1 해체를 일방적으로 결정해 발표하게 된다. YG의 결정에 따라 2NE1의 마지막 앨범도, 미국에서의 첫 데뷔 앨범도 발매하지 못한 채 씨엘은 계속해서 곡을 써나갔다. 끝내 발매로 이어지지 않아 팬들에게는 가닿을 수 없는 노래들을. 가수도, 팬도 원치 않는 오랜 공백기가 시작된 것이다.


오랜 어둠을 깬 것은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폐회식 공연이었다. 씨엘은 이 공연에서 ‘내가 제일 잘나가’와 ‘나쁜 기집애’를 부르며 이같이 외쳤다.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여,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불붙여 태워버리자!” 당시 언론과 댓글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곡으로 ‘나쁜 기집애’는 적절치 않다”는 비판 여론이 적지 않게 조성됐지만 씨엘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포함해 억압에 짓눌린 여자들에게 이 목소리가 전달될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듯이, 공연 준비에 도움을 주지 않는 YG에 대한 비판을 우회적으로 드러낼 뿐이었다.


“지구 한 바퀴 돌아봐 나 같은 여자는 없어.”(‘+ONE AND ONLY180228+’) 폐회식 직후 쓰인 이 곡에서 씨엘이 느꼈던 자부심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헬로 비치스(Hello Bithes)’ 뮤직비디오 캡처

“이 세상 모든 씨엘을 위해, 사랑의 이름으로”

“누군가 선택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씨엘로 돌아가 하나씩 스스로 해나갈 거예요. 제가 경험한 시간과 추억 그리고 감정을 함께 나눌 생각에 오랜만에 신이 나고 설렙니다. 이 세상 모든 씨엘을 위해. 사랑의 이름으로, 씨엘.” YG를 떠난 직후, 오랜 시간 쌓아왔던 곡들을 앨범으로 묶어 내며, 씨엘이 전한 글이다. 늘 그랬듯 자신만을 위해 노래하지 않는다. 자신처럼 스스로를 ‘외계인’이라 불렀던 모든 이들을 위해 노래한다. 대형 기획사의 도움은 필요 없다.


분노에서 시작했지만 무척이나 경쾌한 앨범이다. 가볍고 화사하다. “너나 잘해 웃기지 마”라며 비웃는 가사가 일품인 ‘+안해180327+’의 뮤직비디오는 해외 퍼포머들이 펼친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수화와 커다랗게 적힌 노랫말로 가득 차 있다. 청각 장애인들도 쉽게 즐길 수 있다. “제발 연락하지 마/ 전화 좀 하지 마”라고 외치는 타이틀 곡 ‘+DONE161201+’의 뮤직비디오는 또 어떤가. 산다라박, 박봄, 공민지 등 옛 2NE1 멤버들을 비롯해 안소희, 이하이, 알렉산더 왕 등 국내외 절친들이 보내준 릴레이 ‘립싱크 셀카’를 씨엘이 직접 편집해 만든 재치가 빛났다.


지금껏 씨엘이 겪은 억압이 무엇이든, 그 싸움은 결코 씨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듯이, 다양한 이들과의 ‘연대의 감각’이 빛나는 비디오들이다.


“모든 꽃과 나무가 주는 행복이 달라요. 우리만의 속도로 우리만의 꽃이 또는 열매가 필 거라 믿어요. 그러니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 최근 한 인터넷 라디오 DJ로 나서 팬들을 다독이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서 자신을 위해, 또 우리를 위해 결코 포기하지 않는 단단한 긍정을 본다. 막 YG라는 좁은 화분을 떠나, 대지 위에 새롭게 심어진 씨엘이란 나무의 울창한 미래를 기대한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2020.02.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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