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코끼리 뛰노는 산 속에서 자라는 인도 커피···커피 뒤에 숨은 얼굴들을 만나다

[여행]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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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재료가 어디서 온 것인지, 근본을 따져가며 먹는 시대다. 배만 채우면 족했던 시대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유기농을 찾고 제철을 따지고 지속 가능한 밥상을 요구하는 흐름은 점점 더 확고해질 것이다.


그럼 밥보다 더 자주 찾는 커피는? 내가 오늘 아침 마신 커피는 어디서 왔을까. 그 커피를 기르고 수확한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일을 하며 행복할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좋은 식재료를 찾아 시골 농부를 만나고 다니는 유명 셰프들처럼, 커피 산지에 직접 가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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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지자면 자격도 충분했다. 나는 자격증 딴 지 10년이 넘은 바리스타 아니던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끈질긴 자기합리화를 더한 결과 몇주 후 인도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 ‘인도의 문익점’ 바바 부단


태국 방콕을 경유해 16시간 만에 인도 벵갈루루 공항에 도착했다. 정보기술(IT)산업 중심지답게 신식 공항 건물은 멀끔했다. 인도 여정은 전 세계 16개국 100여개 농장과 커피 생두를 직거래하는 커피리브레 서필훈 대표(44)와 동행했다. 서 대표는 국내에 생소했던 인도 커피를 10년째 꾸준히 들여와 유명하게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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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을 벗어나자 좁은 시골길이 이어졌다. 도로는 군데군데 파여 있었다. 가축들이 종종 앞을 가로막았다.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커피는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 열대 기후에서 자란다. 가난한 나라에서 키워 부자 나라에서 소비하는 상품, 커피를 만나러 간다는 실감이 났다.


커피 하면 보통 콜롬비아나 케냐 같은 중남미·아프리카 국가를 먼저 떠올린다. 그럼 왜 하필 인도를 갔냐. 인도는 2018년 기준 세계 7위의 커피 생산국이다. 생산량만 많은 게 아니라 커피 역사에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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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에티오피아의 염소 치던 목동 칼디가 처음 발견한 걸로 알려져 있다. 우연한 발견이었고, 본격적인 커피 재배가 이뤄진 건 홍해 건너 아라비아반도의 예멘이다. 커피와 동의어처럼 통하는 모카는 커피 무역이 이뤄지던 예멘의 항구 도시 이름이다.


17세기 이슬람 사제 바바 부단(Baba Budan)이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길에 모카항에서 반출이 엄격히 금지된 커피씨앗 7알을 몰래 숨겨나왔다. 그는 고향인 인도 남부 카르나타카주(州) 찬드라기리에 커피를 심었다. 그 커피가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세계로 퍼져나가며 아랍의 커피 독점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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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드라기리는 ‘인도의 문익점’을 기려 훗날 ‘바바부단기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리(giri)는 산·언덕을 뜻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바바부단기리에 있는 그의 묘를 참배하러 찾는다.


■ 그늘나무 사이 빨간 열매


인도 커피 역사가 시작된 카르나타카 지역은 지금도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치크마갈루(Chikmagalur) 인근이 주산지다. 1936년부터 치크마갈루에 커피농장을 여럿 운영해 온 ‘바드라 커피( Badra coffee)’ 소속 베타다칸 농장(Bettadakhan Estate)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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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쨍한 날이었다. 울창한 숲을 헤치고 1시간 가까이 비포장 산길을 구불구불 달려 산허리에 자리 잡은 커피밭에 도착했다. 스마트폰으로 확인한 해발 고도는 1500m를 왔다갔다 했다.


커피는 열매가 천천히 익어야 맛이 좋아진다. 일교차가 큰 고지대에 커피농장이 많은 이유다. 해를 많이 받아 웃자라도 좋지 않다. 그래서 커피밭엔 그늘나무(shade tree)를 많이 심는다. 인도에선 그늘나무로 실버오크, 로즈우드, 마호가니 등이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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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산비탈에 1~2m 크기의 커피나무가 푸른 융단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중간중간 자작나무처럼 수피가 하얀 실버오크가 하늘로 쭉쭉 뻗은 모습이 시원했다. 높은 우듬지 사이로 햇빛이 가늘게 부서져내리며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나무마다 체리라고 부르는 새빨간 커피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하나를 따서 입에 넣고 씹었다. 과육이 터지며 달콤한 즙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검붉은색으로 잘 익은 열매에선 대추 같은 맛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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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커피는 12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가 수확기다. 한 나무에서도 열매 익는 속도가 제각각이라 시간 차를 두고 4~5번에 걸쳐 수확한다. 잘 익은 것만 골라 하나씩 일일이 손으로 따는데, 머릿수건을 두르고 나무 사이를 헤치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보통 커피 한 잔에 원두 60알 정도가 들어간다. 커피 체리 하나에 두 개의 커피콩이 들어있으니 적어도 서른번 이상 누군가 몸을 움직여 땀을 흘려야 우리가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셈이다. 익숙한 그 한 잔의 무게가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 석양에 물든 커피밭


수확한 커피는 펄핑 공장으로 옮겨진다. 체리의 과육(pulp)을 제거하는 작업을 펄핑이라고 한다. 펄핑은 기계가 한다.


먼저 수확한 체리를 탱크에 쏟아부었다. 덜 익어 가벼운 것들이 물 위로 둥둥 뜨는 게 보였다. 우리가 볍씨나 콩 고르는 것과 비슷했다. 쭉정이는 골라내고 잘 여문 것들만 기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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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를 거쳐 껍질이 분리되자 파치먼트라 부르는 커피콩과 그 표면을 덮은 끈적끈적한 점액질만 남았다. 점액질은 잘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2~3일 발효시킨 뒤 물로 씻어내는데, 이걸 수세식 혹은 습식 가공(washed process)이라고 한다. 펄핑 공장 근처에선 발효 과정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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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개시설이 낙후한 일부 국가에선 체리를 껍질째 햇볕에 말린 뒤 콩을 분리해내기도 했는데, 이는 내추럴 방식(natural process)으로 불린다. 습식 가공이 더 수월하고 일반적이지만 최근엔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독특한 풍미 때문에 일부러 내추럴 방식을 택하는 농장도 많다.


인도의 커피농장들도 두 가공방식을 혼용하는 곳이 많았다. 동네 카페에서 파는 원두 봉지에 생산국, 지역, 농장 정보와 함께 가공방식까지 꼼꼼히 표기돼 있는 게 이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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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을 거친 생두는 만져보면 표면이 매끈하고 뽀드득 소리가 난다. 이제 말릴 차례다. 너무 빨리 말리면 커피의 단맛이 빠져나간다.


베타다칸 농장은 송풍기로 6시간, ‘아프리칸 베드’라고 불리는 건조대에서 이틀, 땅바닥에서 일주일 해서 총 열흘 가까이 건조작업을 거친다고 했다.


다 말린 생두 무게는 체리 때의 20%까지 줄어든다. 수분 함량은 9~12%까지 떨어진다. 한 움큼 집어 코에 갖다대니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벼운 단내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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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부터 가공까지 지켜보고 난 뒤 차를 몰아 근처의 힌두 사원을 찾았다. 해발 1917m 산꼭대기에 토굴을 파고 지었다는 사원은 고즈넉했다. 향 피우고 종 울리며 기도하는 사제 앞에서 고개를 숙였더니 작은 바나나 한 개를 내밀었다.


멀리 유순하게 솟은 바바부단기리의 능선이 보였다. 계곡 아래로 넓게 펼쳐진 커피밭이 석양에 천천히 물들어갔다.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라도 이곳에선 경건해지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언제까지 더 마실 수 있을까


다음날 바드라 커피가 운영하는 커피숍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사탕수수에 라임과 생강을 더해 갓 짜낸 신선한 주스가 입맛을 돋웠다. 식사하며 둘러보니 카페 주변이 다 커피밭이었다. 전부 로부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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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크게 아라비카(arabica)와 로부스타(robusta)로 나뉜다. 생산국과 품종을 따져 마시는 고급 커피가 아라비카, 인스턴트 제품을 만드는 저급 커피가 로부스타로 알려져 있다.


인도산 로부스타는 로부스타 특유의 불쾌한 향미가 적고 품질 관리를 철저히 해 고급으로 분류된다. 30년 정도면 상업적 가치가 다하는 아라비카와 달리 로부스타는 80년 넘도록 왕성하게 열매를 맺는다. 로부스타 고목은 마디마디 옹이진 모습이 근사해 가구로도 곧잘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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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숍에 붙은 발레호누르 농장(Balehonnur Estate)에는 아라비카보다 키가 크고 열매가 많이 열리는 로부스타 나무와 함께 후추와 카다멈(cardamom), 바닐라 같은 향신료부터 오렌지와 아레카 야자 등 과실류까지 다양한 작물이 함께 자라고 있었다. 후추의 고향인 인도의 커피농장에선 여러 향신료를 같이 재배하는 경우가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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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을 사무실로 이끈 농장 관계자가 사진을 보여주며 지난해 홍수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집들이 물에 잠기고 그늘나무엔 3m 높이까지 흙탕물 자국이 선명했다. 수십년 만의 기록적 수해로 커피 수확량이 평소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했다.


이상기후는 인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커피는 알맞은 때에 비가 와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데, 우기가 들쭉날쭉해지면서 전 세계 산지에서 커피 작황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기후 온난화로 30년 후면 지금의 커피 재배지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진단하는 학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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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세력의 개입으로 턱없이 낮게 책정되는 커피 가격도 문제다. 커피는 뉴욕(아라비카)과 런던(로부스타)의 거래소에서 가격이 결정되는데, 지난해엔 1파운드당 1달러 이하까지 떨어져 최근 10여년간 최저 수준까지 폭락했다. 생산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저개발국의 소농들은 재배 작물을 바꾸는 경우가 허다하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커피를 더 마실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 믿음을 사는 일


발레호누르 농장 한쪽에 마련된 커핑룸에서 커핑(Cupping)이 시작됐다. 커핑은 커피의 맛과 향을 감별해 점수로 평가하는 걸 말한다. 커피 산지 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생산자에겐 한 해 농사를 결정짓는 자리이고, 커피를 구매하는 바이어 역시 목돈 들여 헛돈 쓰지 않으려면 좋은 커피를 신중히 가려내야 하니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다.


커핑은 전 세계 커피전문가 단체인 스페셜티커피협회(SCA) 평가 기준으로 진행한다.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을 획득하면 스타벅스 같은 커피체인점에서 사용하는 일반 상업커피와 구별되는 고품질 커피라는 뜻에서 ‘스페셜티 커피’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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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번호만 표시된 20개의 로스팅한 커피 샘플이 놓였다. 서 대표는 곱게 간 원두의 냄새부터 맡았다. 이어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올라오는 향을 다시 체크했다.


커피맛은 뜨거울 때부터 식은 뒤까지 세 차례에 걸쳐 확인한다. 온도가 내려갈수록 드러나는 커피의 단점을 단계별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다. 식었을 때도 맛있는 커피가 진짜 맛있는 커피라는 설명이 귀에 쏙 들어왔다.


12번과 14번 샘플이 각각 85점·84점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서 대표는 “꽃과 과일향이 복합적이고 산미도 좋다”며 18번 샘플에 최고점인 87점을 줬다. “인도에서 이런 커피는 처음”이라는 칭찬에 일흔이 다 된 농장 매니저 수크마르의 표정이 환해졌다. 일행은 커피농장에서만 맛볼 수 있을 것이 분명한 커피꽃차와 커피잎차를 대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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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대표는 바드라 커피와 10년째 거래하고 있다. 첫해 1.8t을 구입했고 작년엔 77t을 샀다. 구매량이 40배 넘게 늘었지만 거래가격은 그대로다. 많이 사니까 깎아달란 말을 하지 않았고, 비료값과 인건비 등 원가가 올랐으니 값을 올려달란 말도 없었다. 서로 말 대신 신뢰를 쌓았다는 것일 테다.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로 관계가 변한다고 느꼈던 2~3년 전부터 수크마르가 대접했다는 특별한 커피를 함께 맛보는 행운을 누렸다. 먼저 지프를 타고 차밭과 커피밭이 우거진 산길을 20여분 정신없이 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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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머리를 닮아 엘리펀트 힐(elephant hill)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마루에 금세 테이블과 의자가 차려졌다.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가 작고 예쁜 커피잔에 옮겨졌다. 눈앞엔 겹겹이 둘러친 능선 너머로 막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커피 때문인지, 붉은 노을 때문인지 몰라도 몸이 따뜻해졌다. 영영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 호랑이 보호구역으로 가다


치크마갈루를 떠나 카르나타카의 몇 안되는 관광지인 마이소르(Mysore)를 통과해 남쪽으로 향했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행선지인 아티칸 농장( Attikan Estate)으로 가는 길은 유독 험했다. 전 세계 300여개 커피농장을 다녀본 서 대표가 “가장 아름다운 농장”이라고 극찬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차량이 호랑이 보호구역 안으로 진입했다. 마주 오는 차가 없었다. 길은 종종 사슴이나 몽구스의 차지였다. 나뭇가지 위로 원숭이가 날아다녔다. 구글맵에도 나오지 않는 좁은 산길을 3시간 넘게 덜컹덜컹 흔들리며 가다 결국 타이어가 터졌다. 양쪽으로 20~30m씩 뻗은 유칼립투스와 실버오크 숲이 내뿜는 청량한 기운이 숨통을 틔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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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칸 농장은 1882년 스코틀랜드 출신 랜돌프 모리스가 문을 열었다. 모리스는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양쪽 산비탈 전체에 커피나무를 심었다. 정상 부근 해발 1650m 고지에 방갈로를 지어 가족과 함께 살았다.


모리스의 아들은 인도 독립 후 가깝게 지내던 인도인 친구 바이디야나탄에게 농장을 넘겼다. 대를 이어 농장을 운영 중인 바이디야나탄의 손자 아파두레이가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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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에 지었다는 방갈로에서 이틀을 묵었다. 마당엔 130살 먹은 거대한 전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밑동엔 간밤에 곰이 할퀴고 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침이면 안개가 사방을 덮었다. 앞뒤 분간 안되는데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집 뒤로 작은 언덕을 넘으면 기가 막힌 선셋 포인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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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면 별 볼 일밖에 없었다. 인터넷은커녕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밤마다 벽난로에 불을 때고 잠을 청했다. 장작은 물론 커피나무였다. 새벽녘 불이 사그라들고 한기가 도는 방에서 부스스 눈이 떠지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었다. 잡생각을 하며 뒤척거리다 보면 어느덧 새 소리가 시끄러웠다. 일꾼들이 부엌에서 장작불을 때 커피를 볶고 아침 준비하는 소리로 부산했다. 그렇게 산속에서 하루가 길고 길었다. 일주일쯤 아니 한달쯤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커피 뒤에 숨겨진 얼굴


아티칸은 인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커피농장이다. 해발 1500~1700m 산지에 커피밭이 펼쳐져 있다. 현지 언어인 칸나다어(kannada)로 아티는 무화과, 칸은 숲을 뜻한다. 둘러보면 키 작은 커피나무에 그늘을 드리워주는 큰 나무가 전부 야생 무화과다.


아티칸에선 아라비카 중에서도 켄트, S288, S795 등 희귀 품종을 여럿 기른다. 커피 체리가 붉은색이 아니라 노랗게 익는 골든 아마렐로(옐로 부르봉)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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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을 둘러보는데 땅바닥에 수북이 쌓인 커피콩이 보였다. 사향고양이가 커피 체리를 먹고 싼 배설물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루왁이라 부르는 그 커피다. 농장 매니저 하리쉬는 “여기서도 비싼 값에 팔린다”고 했다. 원숭이가 과육만 발라먹고 뱉은 커피도 ‘몽키 커피’라는 이름으로 팔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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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칸엔 더 무서운 동물도 많다. 농장 설립자인 모리스는 산책 중 마주친 바이슨(들소의 일종) 뿔에 받혀 죽다 살았다. 그는 예수를 믿었지만 병상에선 힌두 신에게 기도했다. 완치된 후엔 소를 위한 작은 신전을 농장 근처에 지었다. 어떤 일꾼은 대낮에 코앞에서 호랑이를 마주쳤는데, 덜덜 떨면서도 석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더니 그냥 가더란다.


머무는 동안 나도 호랑이, 아니면 코끼리라도 한 번 꼭 보고 싶다고 큰소리쳤지만 바로 옆 덤불에서 새들이 날아가며 푸드덕 소리만 내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늘진 숲에서 이끼 덮인 바윗덩이만 봐도 멧돼지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도 좋았다. 우거진 숲과 정돈된 커피밭과 이름 모를 수많은 야생동물들이 공존하는 아티칸이 그렇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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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에 첫 직장을 그만두고 몇달간 중남미를 여행한 적이 있다. 지금도 과테말라나 멕시코, 페루에서 온 커피를 마실 때면 그곳의 풍경이 안개처럼 떠오른다.


앞으로는 매일 커피를 마실 때마다 인도 남부 산간 지방의 풍경을 그리게 될까. 달고 쓰고 뜨거운 액체를 삼킬 때마다 아티칸의 호랑이와 코끼리 울음소리를 상상하게 될까. 그저 흔한 기호품일 뿐이라고 하기엔, 한 잔의 커피 뒤에 숨겨진 너무나 많은 얼굴들을 알아버렸다. 늘 그리워하게 될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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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나타카(인도)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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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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