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모나리자처럼'…우리에게도 죽어도 빌려줄 수 없는 국보 보물이 있다

[컬처]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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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부여 외리 문양전(보물 제343호), 2위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국보 제91호), 3위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청이 최근 1960~2019년 사이 해외전시를 다녀온 한국문화재 순위를 집계한 자료를 필자에게 보내주었는데, 자못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부여 외리 문양전’(22회·6408일)이라는 유물이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59년 동안 22회였으니 그야말로 뻔질나게 해외를 드나든 셈이다. 그 뒤를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8회·2650일)와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7회·2255일)이 따르고 있다. 다소 의외가 아닌가. 1·2위를 달리고 있는 ‘부여 외리 문양전’과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가 어떤 유물이기에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을 앞질렀을까. 또 한국의 대표유물로 알려진 ‘신라 금관’은 왜 등수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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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1위 ‘백제문양전’


우선 두 말 할 것 없이 ‘부여 외리 문양전’(이하 백제 문양전)과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이하 신라 기마인물형 도기)의 문화재적 가치가 지극하다. 1937년 충남 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발견된 ‘백제 문양전’(무늬가 새겨진 벽돌)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장식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발견품 중 산수문전(2점), 귀신문전(2점), 봉황문전, 연화문전, 반룡문전, 구름문전 등 총 8점이 보물로 일괄지정됐다. 특히 산수화 무늬 벽돌인 ‘산수문전’은 산, 나무, 하늘, 사람 등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산수인물화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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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산수문전은 7세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산수화 자료”라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가운데 부분인 토산들은 직선적인 삼산형(三山形)을 이루며 도식화한 특징을 보인다. 안교수는 “이것은 순수미술을 단순화·도식화한 디자인의 모습”이라면서 “백제인의 빼어난 디자인 감각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밝힌다. 조원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문양전’에는 상상 속의 해중신산(삼신산)을 이상세계로 여기는 믿음이 녹아있다”면서 “이러한 삼신산 그림의 원류는 백제금동 향로와 무령왕릉 출토 은제 탁잔은 물론 조선시대 도자기에까지 구현되어 있다”고 전한다.


‘백제 문양전’이 유독 해외나들이가 잦았던 이유가 또 있다. 8점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중 ‘산수문전’(8회·2116일)과 ‘귀신문전’(8회·2738일)의 경우 비슷한 문양이 2점씩 있으니 해외나들이에도 부담이 적은 편이다. 금은 세공품과 같은 정밀한 유물이 아닌 벽돌이기 때문에 훼손 가능성도 그만큼 적은 편이다. 덕분에 해외전시 때마다 ‘백제의 대표선수’로 단골 출품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백제 금동대향로(1993년·국보 제287호)나 부여 왕흥사(2007년·국보 제327호) 및 미륵사지 사리기(2009년·보물 제1991호) 등 백제문화를 상징하는 유물이 속속 출토되었다. 따라서 향후 백제의 에이스 유물은 바뀔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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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은 왜 순위에 없을까


해외전시 2위를 달리고 있는 ‘기마인물형 도기’는 금관과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유물로 평가된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금령총에서 발굴됐다. 1쌍이 출토됐는데, 말을 탄 주인상(높이 23.4㎝ 길이 29.4㎝)과 하인상(높이 21.3㎝ 길이 26.8㎝)이었다. 안휘준 교수는 “두 인물상은 1970년대 말 미국에서 열린 ‘한국미술 5000년전’에서 상징물로 채택되어 편지지와 봉투 등 모든 문방구에 도안이 실린 예가 있을만큼 조형미가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한국유물의 해외전시 때마다 단골 대표 선수로 발탁된 유물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유약을 바르고 1500도 이상의 고열에서 구워낸 도기는 토기와 달리 표면이 단단해서 상대적으로 해외전시 중에도 훼손될 염려가 적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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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국 대표 문화재 중 에이스로 꼽힐만한 ‘신라 금관’은 왜 앞순위에 없는 것일까. 그도 그럴 것이 반출횟수별 순위를 보면 ‘금관총 금관 및 금제관식’은 7위(5회·1895일)에 머물고 있다. 해외에서 금관의 인기가 생각만큼 높지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금관은 5점(금관총·서봉총·금령총·천마총·황남대총 북분)에 이른다. 금관총(국보 87호)·천마총(국보 제188호)·황남대총 북분(국보 제191호)·금령총(보물 제338호)·서봉총(보물 제339호) 등에서 출토된 금관 모두가 국보·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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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해외 전시에 금관총 금관(5회·1895일)을 비롯, 금령총 금관(4회·1437일), 서봉총 금관(4회·602일), 천마총 금관(4회·361일), 황남대총 북분 금관(1회·198일) 등이 골고루 출품됐다. 5점 금관의 해외전시 횟수를 합하면 18회이고, 전시일수는 4493일에 달한다. 1960년부터 59년 동안 신라금관만 3년4개월에 1회꼴, 햇수로는 만 12년 3개월간이나 해외에 체류한 셈이 된다. 수없이 달린 금관의 달개(영락) 등의 훼손 및 멸실 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당연히 해외반출을 자제해야 한다. 게다가 금판의 두께가 종이 한 장 정도인 1㎜밖에 안되므로 쉬이 주저앉고 만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문화재=금관’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니 금관을 출품해달라는 상대국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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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와 78호 반가사유상


반출횟수별 순위 3위를 기록한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만큼 화제의 중심에 선 문화유산은 없을 듯 하다. 반가사유는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채 생각에 잠긴 자세를 가리킨다, 반가사유상은 출가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고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부처의 출가전 이름) 태자의 모습을 조각한 상이다. 삼국시대인 6~7세기에 유행했으며,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국보 78호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다. 두 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단독 전시방을 차지하고 1년 교대로 전시중이다. ‘세상사가 힘들 때 찾아와 영혼까지 치유받고 간다’는 관람객들이 생길 정도다.


그런데 두 불상에는 큰 차이가 있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1960년 이후 7번에 걸쳐 2255일의 ‘외유’를 기록한데 비해 78호는 단 2회(366일)의 해외전시만 경험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물론 두 작품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78호 반가사유상 역시 풍부한 조형성과 함께 뛰어난 주조기술을 선보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83호가 더 선호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본디 반가사유상은 ‘반가사유’라는 쉽지않은 자세를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조각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때문에 허리와 팔을 비현실적으로 가늘게 표현하기 십상이다. 바로 이러한 78호의 미흡한 측면을 해소한 조각상이 바로 83호라 할 수 있다. 민병찬 국립경주박물관장은 “83호는 신체 각 부분의 정연한 비례와 힘이 응축된 생동감, 앉음새의 전체적인 안정감 등 세 가지가 일치되어 빈틈없는 조화를 이룬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78호(키 80㎝, 무게 37.6㎏)에 비해 83호(키 93.5㎝, 무게 112.2㎏)가 키 13.5㎝ 더 크고, 무게 무려 74.6㎏이나 무겁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권강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기술적·양식적 측면에서 볼 때 78호는 6세기 후반, 83호는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83호 반가사유상은 일본 국보 1호(조각부문)라는 고류사(광륭사·廣隆寺) 목조미륵반가사유상과 ‘쌍둥이’라 할만큼 흡사하다. 관의 형태나 조각양식, 대좌에 늘어진 옷주름의 표현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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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는 절대 안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78호보다 더 선호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2013년 10월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잦은 해외나들이에 제동이 걸린 일이 생겼다. 83호 반가사유상은 그해 10월29일부터 이듬해(2014년) 2월23일까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리는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에 출품될 예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메트로폴리탄 전시가 난관에 봉착했다. 심의를 맡은 문화재위원회가 “해외로 반출되는 문화재가 너무 많고 대여기간 역시 너무 길다”면서 보류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연 600만명이 찾는 세계 수준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이니 한국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거듭 해외반출을 요구했다. 문화재위원회는 “유물 운송 및 포장관련 서류를 보완하고 앞으로는 장기간 혹은 대량의 국외반출은 자제한다”는 조건을 달아 허용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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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에는 당시 변영섭 신임문화재청장이 제동을 걸었다. 변 청장은 “해외전시가 잦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기마인물형 도기, 그리고 토기 표면에 토우가 여러 점 달려있는 ‘토우장식 장경호(목긴 항아리)’ 등의 해외전시는 불가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83호 반가사유상의 반출과 관련해서 자료를 보니 4~5년 전(2008~2009년)에도 무려 4개월10일간이나 벨기에 해외전시를 다녀온 적이 있더군요. 전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반가사유상같은 이런 유물들이 해외전시를 위해 수시로 짐을 풀고 다시 싸는 일을 반복해서 돼나요.”(변영섭 당시 문화재청장)


물론 당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측이 여러차례 요청하고 문화관광부까지 직접 개입하는 우여곡절을 거쳐 83호 반가사유상은 반출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기마인물형 도기’와 ‘토우장식 장경호’는 결국 미국땅을 밟지못했다. 이런 소동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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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문화재위원회 제2분과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를 기념하는 ‘한·일 문화재 상호 국보전’에 출품예정이었던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 287호)와 ‘영조 어진’(보물 제932호)의 반출을 불허했다. 당시 안휘준 문화재위원회 제2분과위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은 “백제 예술의 정수인 금동대향로를 중국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만큼 충분한 연구 후에 내보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반출불허 이유를 밝혔다.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또 “일왕의 유물이 해외에 나가지 않는데 굳이 영조의 초상화인 어진이 해외에, 그것도 일본에 출품될 이유가 없다”고 만장일치 결론을 내렸다. 19년이 지난 지금도 안휘준 교수의 입장은 흔들림이 없었다. 안교수는 지금도 “국보 중에서도 절대 해외에 내보내서는 안될 초특급 국보가 있으며 이런 유물들을 함부로 내보내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보·보물 유물 수백점을 내보낸 무모함


사실 한국문화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여러차례 대규모 해외특별전을 통해 소개됐다. 이때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한국 문화가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과도 다른, 독창성과 예술성을 갖고 있다고 전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57년 12월부터 1959년 6월까지 1년 반 동안 금관총 금관 등 197점의 문화재가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한 데 이어 1960년부터 62년까지 유럽전에 160여점을 선보였다. 또한 1976년에는 6개월동안 일본의 3개 도시에 348점을 내보낸바 있다. 특히 1979년 5월부터 2년동안 미국내 7개도시를 돌며 계속된 ‘한국미술5000년전’에는 국보·보물급 유물 264종 354점이 총출동했다. 빗살무늬 토기(신석기)부터 팔주령(청동기), 황남대총 및 천마총 금관과 반가사유상, 백제문양전 등(삼국)과 청자(고려), 백자 및 풍속도(조선), 산수도(이상범·현대 회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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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를 전세계에 알린 좋은 기회였지만 돌이켜놓고 생각하면 그처럼 무모한 대규모 전시가 필요했을까 싶다. 당시 홍익대박물관장이던 안휘준 교수가 ‘한국미술5000년전’을 끝내고 쓴 기고문(1982년 6월4일 동아일보)을 보라.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대규모 해외 문화재전시를 그렇게 자주, 또 그토록 오랫동안 개최한 사례는 없다. 문화재들이 지니는 막중한 가치와 해외나들이에 수반되는 위험부담을 감안하면 참으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이다…우리는 늘 상대국의 요청에 따라 문화재를 일방적으로 내보내기만 했을뿐….”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였던 이강승 전 충남대교수는 “이 행사는 군사정권의 홍보차원에서 기획된 특별전이라 할 수 있다”면서 “특별전을 끝내고 국보급 유물 354점을 내보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다들 입을 모았던 기억이 있다”고 돌이켰다. 해외전시는 엄청난 위험부담을 안고 진행된다. 유물의 포장, 이동, 전시, 반환 과정에서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1979년 샌프란시스코 전시 때 박물관에는 과거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파손된 유물 사진을 전시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작은 지진이 일어나 박물관 판매대에 놓여있던 중국 도자기 상품이 넘어져 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모골이 송연해진 당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 실장이 출품작 중 깨지기 쉬운 도자기들을 낚싯줄로 묶어 고정시켰다.


박물관 직원들은 해외전시된 유물이 무사귀환할 때까지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해외 전시되는 유물의 무게를 측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시 후 반환되는 유물의 무게와 단 1g이라도 차이가 나면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하기 때문이었단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넘어지는 유물을 간신히 잡았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도 전해진다. 그랬으니 국보·보물급 유물을 354점이나, 그것도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빈번한 도시의 순회특별전에 출품했던 일은 어떻게 봐야 할까.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문화재를 만천하에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과연 354점 유물이 100% 안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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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 반가사유상 vs 고류사 목조반가사유상


2001년 문화재위원회의 ‘금동대향로’와 ‘영조어진’의 해외전시 불가 결정, 그리고 2013년 ‘83호 반가사유상’ 해외전시 논란 이후 한가지 정리된 일종의 판례가 생겼다. 우리에게도 웬만해서는 해외반출이 어려운 문화재가 생긴 것이다.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한국의 ‘83호 반가사유상’과 일본의 고류사 목조반가사유상의 상호 교환 전시를 추진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불상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나름 의미있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고류사 측 주지가 끝끝내 “목조반가사유상의 해외전시는 절대 불가하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렇다면 한국측도 어쩔 수 없었다. ‘83호 반가사유상’의 출품 역시 어려웠다. 당시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두 불상 대신 추진된 교환전시가 바로 한국의 ‘국보 78호 반가사유상’과 일본의 ‘주구사(中宮寺) 목조반가사유상’(국보 23호·조각)이었다”고 전했다.


한국의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이 83호와 버금가는 작품이지만, 일본의 주구사 반가사유상 역시 고류사 소장 반사가유상과 함께 일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83호 반가사유상=고류사 목조반가사유상’의 교환이 무산되었으니 ‘78호 반가사유상=주구사 목조반사사유상’ 전시는 급수에 맞는 상호전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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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보려면 루브르로 직접 오라”


프랑스를 대표하는 ‘모나리자’를 예로 들어보자. 모나리자는 1962~63년 미국, 1974년 일본·구 소련 순회 전시 외에는 프랑스 땅을 떠난 적이 없다. 1974년 일본 도쿄 전시 때는 한 관람객이 ‘단 하루로 제한한’ 장애인의 박물관 관람권의 확대를 주장하며 붉은 페인트를 뿌렸다. 천만다행으로 페인트는 방탄유리상자에 뿌려졌다. 2013년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가 처음으로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던 피렌체시가 모나리자의 대여전시를 요청했지만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2018년 3월 흥미로운 소식이 들렸다. 프랑스 정부가 모나리자의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순회전시까지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는 기사였다. 모나리자와 같은 예술자산을 활용해 프랑스의 국제적 소프트파워를 확대하려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해외전시는 언감생심이고, 국내순회전시까지 끝내 보류됐다. 루브르 박물관 측이 “얇은 포플라 목재패널에 싸인 모나리자가 파손되기 쉽고 3개월 국내순회전시에만 약 3500만 유로(약 457억원)의 비용이 소요될 것”이라며 극력 반대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루브르를 찾는 관람객들은 어쩌란 말이냐”는 박물관의 항변이 통했다. 그렇게 모나리자를 보고싶으면 루브르로 직접 오라는 얘기가 아닌가. 모나리자가 전시된 루브르 박물관의 한해 관람객이 800만명이라니 그런 배짱이 통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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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반출불가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7월 예정된 ‘삼성퇴’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중국 측과 상호 교류전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측에서 한국의 국보에 해당되는 ‘1급 유물’ 24점을 보낸다고 한다. 대신 중국측에서는 한국의 역사를 통사로 볼 수 있는 유물들을 보내달라고 지목했단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측은 ‘출품하기 곤란한 유물목록’을 사전에 중국측에 알렸는데, 이중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백제금동대향로’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래도 문화재위원회(2001년)와 문화재청장(2013년)이 ‘해외 반출 불가’로 꼽아 논란을 일으킨 전례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한국도 모나리자처럼 ‘와서 보라’는 문화유산을 한 두 점 키워야 할 때가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앞으로 절대 해외반출이 불가한 유물’을 꼽을 수 있겠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너무 자주 나갔다는 평을 받은 걸작 ‘83호 반가사유상’과 백제 예술의 진수인 ‘백제금동대향로’, 조선 임금들의 초상화인 ‘어진’ 등이 있겠다. 독자여러분은 어떤 유물을 ‘죽어도 해외반출이 안되는 유물’로 꼽으실 것인가.


<참고자료>


안휘준, <청출어람의 한국미술>, 사회평론, 2010


조원교, ‘부여 외리출토 백제 문양전에 관한 연구“, <미술자료> 제74호, 국립중앙박물관, 2008


‘조선시대 도자기 그림에 대한 신해석-해중신산·삼신산 그림-,’ <문화와예술연구> 제12권,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콘텐츠연구소, 2018


민병찬, ‘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방법 연구-국보 78,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제89호, 국립중앙박물관, 2016


민병찬·고바야시 유코,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한국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국보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 특별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16


이연식, <위작과 도난의 미술사>, 한길아트, 2008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2022.08.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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