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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성급한 개학 역풍에…방역모범국 싱가포르의 ‘굴욕’

by경향신문

‘거리 두기 해제’ 잘못된 시그널에 1개월간 확진자 14배 늘어

사각지대인 ‘이주노동자 기숙사’ 순식간 집단감염도 주목

“한국, 개학 순차적으로 하고 농번기 이주노동자 주시해야”

경향신문

싱가포르 정부는 확진자수가 크게 늘지 않자 지난 3월23일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교 개학을 결정했다. 지난달 25일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학교를 나와 귀가하고 있다. 싱가포르 | AFP연합뉴스

최근 정부의 코로나19 브리핑에서 한국이 유심히 지켜보고 참고해야 할 사례로 싱가포르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세계적 ‘방역 모범국’으로 꼽히는 싱가포르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일일 신규 확진자가 50명 안쪽으로, 총 확진자 수도 1000명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이달 들어서만 확진자가 5500명 넘게 늘어나면서, 19일 기준 누적 확진자는 6588명으로 급증했다. 11개 동남아시아 국가 중 가장 많은 규모다.


국내 방역당국과 전문가들은 지난달 싱가포르가 강행한 개학 결정이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의 시그널처럼 작용한 것 등을 감염 확산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한국이 싱가포르 사례를 참고해 방역에 주의해야 할 만한 점을 정리했다.

‘개학=거리 두기’ 해제 시그널

싱가포르 확진자 급증의 시초는 ‘개학’으로 꼽힌다. 싱가포르 정부는 세계 각국이 학교와 직장, 상점 등의 문을 모두 닫고 강력한 봉쇄정책을 펴던 지난달 말 개학을 결정했다. 한국처럼 철저하게 확진자 동선과 접촉자를 추적해 빠른 진단검사를 실시해 확진자 증가세를 막았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많은 우려에도 지난달 23일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교 개학을 강행하면서 옹 예 쿵 싱가포르 교육부 장관은 “학교는 어린이들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말했다.


하지만 개학 후 불과 이틀 만에 한 유치원에서 확진자 18명이 나온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이후 일일 확진자가 50명을 넘기는 날이 계속되면서 싱가포르 정부는 2주 만에 개학 결정을 철회했다.


김강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1총괄조정관은 지난 16일 브리핑에서 “싱가포르의 경우 방역 모범국가로 평가받다가 학교를 다시 개학하고 일상으로 복귀한 후 1개월간 14배의 확진자 증가세를 보였다”며 “싱가포르 사례는 우리가 예의주시하고 분석하고 평가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 정부는 이달 7일부터 다음달 4일까지는 함께 사는 사람 외에는 가족과 친척도 만나지 못하고, 재택근무를 하지 않는 기업 대표는 아예 고발하도록 하는 등 강력한 물리적 거리 두기를 시행하고 있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개학이 마치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등 일상을 재개해도 된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여졌다”며 “싱가포르 사례를 보면 개학은 확진자 감소세만 보면서 2주 후, 4주 후에 한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기석 한림대 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도 “나중에 개학을 하게 되더라도 이를테면 고3 먼저, 한 반에 10명만 먼저 하는 식으로 계획을 세워서 순차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단감염 ‘사각지대’ 이주노동자

최근에는 한국의 신천지발 집단감염 사태를 연상케 하는 ‘이주노동자 기숙사 집단감염’으로 하루에 수백명씩 확진자가 늘고 있다. 지난 6일 이주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집단 기숙시설 2곳에서 확진자 91명이 나온 게 시작이었다. 이 여파로 신규 확진자는 최근 연일 300~400명대로 올라섰고, 지난 18일에만 무려 942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싱가포르 보건당국에 따르면, 전체 확진자 중 60% 이상이 이주노동자 기숙사 집단감염과 관련됐다. 풍골 지역에 있는 가장 큰 이주노동자 기숙사인 S11에서만 총 확진자의 22%(지난 16일 기준)가 나왔다. 일상적인 물리적 거리 두기와 발빠른 확진자 찾기에는 철저하게 대응해온 싱가포르 방역당국이 이주노동자 기숙사라는 고위험 집단감염군은 선제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서 한순간에 확진자가 급증한 것이다.


싱가포르에는 30만명가량의 건설부문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대개 미얀마, 인도, 중국 등에서 왔다. 이들은 주로 건설현장 근처에 있는 공동숙소에서 지내는데, 한 방에 이층침대를 여러 개 들여놓고 12~17명이 모여 산다.


싱가포르 정부는 확진자가 나온 기숙사 노동자 5000여명을 대상으로 이번주 안에 진단검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감염되지 않은 이들을 크루즈선에 분산 수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건설부문에서 취업 허가를 소지한 이주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20일부터 다음달 4일까지 2주 동안 재택 자가격리를 하도록 공지했다.


한국에서 신천지발 집단감염이 시작됐을 때 진단검사 역량을 대폭 늘리고, 구로 콜센터 집단감염 후 콜센터 인원을 분산하도록 한 것과 유사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싱가포르는 한국과 방역정책을 비슷한 수준으로 펼쳤고, 사람들의 평상시 위생수준도 굉장히 높은 곳임에도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했다”며 “한국도 이주노동자 집단감염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봄철 농번기가 시작되면서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모일 가능성이 있다”며 “이주노동자들은 집계도 잘 안되고, 아파도 병원을 잘 찾지 않아 관리 사각지대에 있다”고 말했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