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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다 알면서도 야만에 뛰어든 슬릭, 너는 나의 용기

by경향신문

‘공감성 수치’가 높은 사람이라면, 목요일 밤 9시30분에 방영되는 <굿 걸>의 1, 2화를 보는 동안 베개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공감성 수치는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해당 배역이 곤란한 일이나 창피를 당하는 장면을 볼 때 같은 감정을 느끼며 힘들어하는 증상이다.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가 엠넷이라는 야만의 한복판을 질주하는 장면을 응원해본 사람 역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굿 걸>에 등장한 슬릭을 지켜보는 마음 말이다.


<GOOD GIRL :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는 10인의 여성 뮤지션이 뭉쳐 ‘방송국을 터는’, 즉 공연으로 상금을 따내는 형식의 ‘힙합 리얼리티 뮤직쇼(엠넷의 표현에 따르면)’다.


캐릭터와 음악 스타일이 다양한 출연진 사이에서 슬릭은 단연 눈에 띈다. 페미니스트 아티스트이자 ‘꾸미지 않은 여성’은 언제나 존재했으나 미디어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다. 그것도 <언프리티 랩스타>나 <프로듀스> 시리즈, <쇼미 더 머니>처럼 여성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절대 프리티한 말은 안 나가는 엠넷. 출연자를 신뢰하는 마음과 별개로, 의심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경향신문

엠넷의 <GOOD GIRL :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에 출연하는 개성만점 10인의 여성 뮤지션 중에도 가장 눈에 띄는 슬릭. 자칭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인 이 출연자는 LGBTQ,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펄럭이는 무대에 맨발로 올라 여성인권운동을 의미하는 가사의 노래를 부른다(아래). 엠넷 홈페이지·해당 프로그램 영상 캡처

<굿 걸>은 형식상 출연자끼리 경쟁하는 경연이 아니다. 그런데 재미가 정체성인 예능에는 갈등과 대립 구도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번 쇼의 MSG는 슬릭의 ‘이질성’이다. 시청자를 사로잡아야 하는 프로그램 초반, 슬릭은 여기저기 바쁘게 동원된다.


1화에서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래퍼’로 소개되는 슬릭은 수수한 차림새 때문에 다른 출연자로부터 제작진으로 오해받았다. 출연자끼리 인사하고, 네일아트 같은 소재로 대화를 이어갈 때 슬릭이 소외되는 장면을 부각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성적인 퍼포먼스와 가사로 화제가 된 퀸 와사비와 슬릭의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언프리티 랩스타>의 여성 소비 방식을 비판했던 슬릭의 가사가 마치 치타에 대한 ‘디스’인 양 긴장감을 조성한다. 슬릭이 소녀시대를 향한 사랑을 고백할 때는 의외의 매력이 드러나지만, 그건 엠넷이 잘한 게 아니라 ‘숨겨도 트윙클 티가 나’는 슬릭의 사랑스러움과 동시대 여성이라면 할 말이 한 보따리인 소녀시대의 업적이니 패스하자.

출연진 중 단연 눈에 띄는 ‘슬릭’

꾸밈 거부하는 페미니스트 랩퍼

튀는 여성이 소외되는 구도 속에서

그는 고립된 것처럼 보인다해도

꼿꼿이 반기지 않을 목소리를 낸다

엠넷은 또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저 믿고 볼 뿐이다

재능 있고 용감한 출연자들을

우리는 이처럼 ‘튀는’, ‘낯선’, ‘다른’,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여성을 부담스럽거나 기묘한 존재로 분류하고 소외시키는 구도에 익숙하다. 여성 간 배제는 은은한 거리 두기와 미묘한 눈치 게임으로 전형화된다.


2화의 유닛 결정전은 마치 소풍에서 같이 놀 무리를 정하듯 소파에 함께 앉는 방식이었다. 1화에서부터 뭉쳐 앉은 다른 출연자와 혼자 덩그러니 소파에 앉아 있는 슬릭의 모습이 예고로 나왔다. 본인은 의연했고, 다른 출연자 역시 슬릭을 따돌린 게 아니지만, 그 그림에서 발생하는 효과가 있다. 슬릭은 고립된 것처럼 보인다. 보는 사람은 안절부절 애가 탄다. 2화의 마지막 장면은 유닛을 하게 된 효연과 슬릭의 의견 차이가 장식했다. 이런 긴장감과 캐릭터가 아마 슬릭의 캐스팅 목적 중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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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화요일에 송고하고 둘의 유닛 무대는 목요일 밤에나 볼 수 있다. 멋지게 해내기를 기대하지만, 실력 있는 사람끼리 뭉쳐도 결과물이 삐끗하는 사례는 사실 흔하다. 마블 코믹스에서 어벤저스를 모아놔도 손에 땀을 쥐잖아요? 골 엄청 때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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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슬릭의 유닛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면, 문제는 슬릭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슬릭이 페미니스트 래퍼이고, 강한 신념이 걸림돌이고 어쩌고저쩌고…. 확장하면 슬릭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 뮤지션에게도 해당한다. 여자라서, 여자 가수라서, ‘랩’보다 ‘예쁜 척’이 우선이라서…. 약자는, 타자는 개인의 정체성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당하며 실패할 기회를 보장받지 못한다.


그리고 슬릭은, 처음부터 다 알았을 것이다. 알고도 뛰어들었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을 반기지 않을 판에서, 어떻게 이용당하고 왜곡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소용돌이에서 슬릭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1화의 크루 탐색전에서 슬릭은 LGBTQ,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펄럭이는 무대에 맨발로 오른다. 처음 자기소개를 할 때 슬릭은 자신이 교차성 페미니즘을 공부했다고 밝혔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다양한 위계와 차별의 교차를 고찰한다. 인종차별 문제와 성차별 문제가 충돌하면서 부상한 교차성 페미니즘은 사회적인 위치성에 따라서 경험하는 구조적인 장벽이 단일하지 않으며, 다층적인 억압의 층위를 형성하는 것을 이론화한다. 교차적인 억압의 구조에서 개인은 기득권이기도 하고 사회적 약자가 되기도 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글을 쓰는 나는 여성으로서 불안에 떨며 밤길을 걷고 남자 작가들은 받을 일 없을 댓글이나 메일을 받는다. 한편 가시적인 장애가 없는, 서울 거주자, 이성애자로서 누리는 특권이 있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은 많은 부분 동물 착취를 기반으로 하며, 법적 성인이기에 어린이를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는 세상이 더 익숙하다. 차별과 억압은 겹치거나 가로지르며 다르게 작동하고, ‘나’의 위치 역시 요동친다.


슬릭은 자신의 곡 ‘Here I Go’를 부른다.

“SLEEQ got rainbow on ma wrist

Bread and Rose for ma women

for ma all gender queer

for ma all spectrum

고민하지 어떤 게 예술가의 삶

누구 위에 있기 위해선 존재하지 않아

고민하지 아무도 죽이지 않는 노랫말

그 앞에선 어떤 게임도 시작 버튼 눌리지 않아.”

경향신문

무지개와 젠더퀴어는 성소수자를, 빵과 장미는 여성이 생존권과 참정권을 요구했던 여성 인권 운동을 의미한다.


살아남으려면 타인을 짓밟는 것이 당연한 판에서 ‘아무도 죽이지 않는 노랫말’을 부르고 ‘어떤 게임도 시작 버튼 눌리지 않’기를 꿈꾼다. 게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용기로, 이기는 것이 곧 선이라는 세계관을 흔든다(슬릭이 공장식 축산업에 저항하는 실천으로 비건을 지향한다는 점 또한 2화에서 드러난다). 그렇게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이 담긴 ‘스펙트럼’을 노래한 슬릭은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는 연출이나 퍼포먼스도 잘 어우러졌다.


패널의 반응처럼, 누군가는 고까워하고 욕하고 부담스러워하고 외면하고 비난한다. 엠넷은 이런 이야기를 담기에 적절한 그릇이 아니다. 슬릭을, 슬릭의 메시지를 실컷 소비하고 버릴지도 모른다. 함께 팀을 이뤄야 하는 동료에게서 호감을 사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누구보다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선 슬릭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강렬했던 무대의 대가(?)로, 2화의 유닛 선택에서 슬릭은 혼자 남는다.


그러나 슬릭은 말한다. 혼자 보여줄 수 있는 무대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여러 위험 요소에도 불구하고 슬릭은 해냈다. 힙합이 저항 정신이라면, 그 순간 슬릭이 가장 힙합이었다.



<굿 걸>의 첫 방송 날, 퀸 와사비는 다른 출연자와 함께 ‘본방 사수’하는 영상을 올리며 이렇게 썼다.

“니네 진짜 슬릭언니 팬이 될 거여 진짜 속 깊고 솔직하고 착하고 무엇보다 너무 귀여우심ㅠㅠ 진짜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거 같애”.

정당한 경쟁도 ‘캣 파이트’로 바꿔버리는 엠넷의 세계관 속에서, 굿 걸들은 다행히 서로의 손을 잡고 잘 달리는 것 같다.


하긴 슬릭에만 포커스를 맞춰서 그렇지, <굿 걸>의 출연진은 모두 글 한 편이 뚝딱 나올 만한 서사를 가졌다. 여자가수로서 혹독한 다이어트의 고충을 토로했던 에일리, ‘국민 걸그룹’ 멤버로 무수한 환희와 비난과 공격과 분열의 강을 건너 단단해진 효연, 언제나 ‘쎈 언니’로 호명되는 치타, 의도적으로 한계를 넘어서는 ‘곤란한’ 섹스어필을 무기 삼은 퀸 와사비, 애매하고 복잡한 경계에서 이제 막 키를 쥐기 시작한 장예은….


출연자끼리도,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도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조각과 맞닥뜨린다. 다정하게 응원하고 뜨겁게 즐기게 될 것이다.


엠넷이 돌리는 패는 이번에도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저 믿을 것은 재능 있고 용감한 출연자들뿐. 굿 걸들에게, 슬릭을 부탁한다. 역시 슬릭에게, 굿 걸들을 부탁한다.


슬릭의 노래(Ma girls) 가사처럼. “나는 너의 용기”이고, “너는 나의 용기”니까. 굿 걸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시청자는 ‘다시 만난 세계’처럼,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이진송 | 계간홀로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