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미스월드’ 대회에 통쾌한 펀치를 날리는 ‘미스 올바름’

[컬처]by 경향신문

영화 ‘미스비헤이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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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 나이틀리, 제시 버클리, 구구 바샤로 주연의 영화 <미스비헤이비어> 는 1970년 달 착륙과 월드컵 결승보다 더 많은 시청자가 지켜본 미스월드 생방송에 잠입해 성적 대상화와 성상품화 반대를 외친 샐리 알렉산더와 조 로빈슨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판씨네마 제공

“아이고, 미스코리아 나가도 되겠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 ‘미스코리아’였던 때가. 요즘에는 이런 과거 이야기 뒤에 곧바로 “할머니!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하고 덧붙이는 것이 유행이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옛날도 아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해 등급을 매기는 스포츠 역시 성황이다. ‘무려’ 보건복지부에서 오픈한 국가건강정보 포털에서 유방성형술 안내와 함께 ‘아름다운 가슴’의 기준을 탑재했다가 논란이 된 것이 고작 4년 전이다. 탈코르셋 담론과 실천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는 한편에서는 여전히 외모와 관련된 모든 논의를 ‘페미들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으로 몰아간다. 그러니 “우리는 예쁘지도, 추하지도 않고 화가 났을 뿐이다”라는 <미스비헤이비어(Misbehaviour)>의 메시지에 가슴이 뛸 수밖에.


<미스비헤이비어>는 1970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미스월드 생방송에 잠입해, 1억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적 대상화와 성상품화 반대를 외친 ‘샐리 알렉산더’와 ‘조 로빈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1억명이요? 인류가 달에 착륙하는 것보다 많이 지켜보는 수영복 심사에 난입을? 1999년 도서출판 이프에서 개최한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를 보며 문화충격을 받았던 당시 12세의 어린이는, 29년도 전에 더 어마어마한 사이즈로 ‘깽판’을 친 역사는 미처 몰랐다.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면 샐리와 조가 힙합 듀오를 결성해서 진짜 ‘깡’이 뭔지 보여주고 음원차트 1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신발끈 꽉 매고, Call me 나쁜 페미.


영화는 샐리를 중심으로 1970년대의 사회문화적 풍경과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동시에, 다양한 여성의 스펙트럼을 섬세하게 독해한다. 즐거운 풍자와 올곧은 비판이 날리는 원투원투 잽은 물론, 안다리를 후리는 씨름의 기술까지 갖췄다는 뜻이다. 이런 식이다. 샐리는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다가, 체제 안으로 들어가 여성의 자리를 만들려는 자신에게 ‘유아용 의자’만 주어지는 현실을 깨닫고 미스월드 반대 시위에 뛰어들었다. 샐리는 고학력 여성이며 인종차별의 대상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방송 출연에도 주눅 들지 않고 토론에 당당하게 임할 수 있다(속에 천불은 좀 나지만). 한편 1970년 미스월드 대회에는 제3세계 여성, 소위 ‘흑인 후보’가 출전했다. 미스 그레나다 제니퍼 호스텐과 미스 ‘공아남’이다. 여기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문제가 교차한다.


2020년에도 인종차별 때문에 비무장 상태의 시민이 과잉 진압하는 경찰에게 목숨을 잃는다. 유색인종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조차 불법인 1970년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매년 ‘백인’ 후보만 낸다는 비판에 대응하고자 급하게 흑인 후보를 뽑아 공동 대표로 내보낸다. 자신을 ‘남아공’이 아니라 ‘공아남(Miss Africa South)’이라고 자조하는 후보는 신발공장 기계공 출신이다. 그녀가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공장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한다. 미스 공아남에게 미스월드 대회는 꿈의 무대고, 신체 자본은 그녀가 가진 유일한 무기다. 샐리는 왜 여성들이 외모를 통해서만 자격을 얻어야 하느냐고 질문하지만, 어떤 삶은 존재 자체만으로 자격 미달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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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쁘지도, 추하지도 않고 화가 났을 뿐이다”

영화는 1970년 ‘미스월드 반대 시위’ 속 다양한 여성의 스펙트럼을 품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 만이 유일하고 숭고한 투쟁이 아니며,

차별과 배제 속에서 인정을 구하는 선택을 누구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서로 다른 삶의 충돌과 연대의 방식을 고찰한다


제니퍼 호스텐과 미스 공아남은 취재 열풍에서 소외되는 등 공기처럼 퍼진 인종차별을 마주한다. 역사상 흑인 우승자는 없었다. 대회장 밖에서는 미스월드 대회가 여성을 성상품화한다는 비난이 맹렬하게 울려 퍼진다. 어디서도 두 사람을 반기지 않는 듯하다.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은 설레며 드레스를 고르고 백인 후보가 비인간적이라고 모멸감을 호소하는 워킹 연습을 해낸다. 차별과 배제의 악력에, 누군가는 버티고 인정을 쟁취하는 것으로 맞선다. 그 선택이 누군가의 눈에는 ‘부역’이나 ‘타협’으로 보일지라도 누구도 함부로 그것을 평가하거나 재단할 수 없다. 가나에서 온 방송인 샘 오취리의 사진이 동대문의 쇼핑몰에 걸린 것을 보고 그의 친구가 오열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970년에 제니퍼 호스텐이 미스월드로 뽑히지만, 1991년생인 샘 오취리는 여전히 어릴 때부터 “흰 것은 좋고 까만 것은 나쁘다”고 배웠다.


제니퍼 호스텐은 샐리에게 말한다. 나도 당신처럼 선택권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런 삶을, 샐리는 모른다. 샐리는 시위를 반대하는 엄마와도 충돌한다. 어린 딸의 입술에 립스틱을 발라주는 엄마를 비난하고, 가정에 얽매인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외친다. 샐리의 엄마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면, 너와 너의 언니는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항변한다. 동서양을 관통하는 엄마와 딸의 징글징글한 연결고리, 이건 우리 안의 소리! 좋아하는 작가 곽민지의 <걸어서 환장 속으로>라는 책에는 자유를 누리는 30대 비혼 여성인 딸이 엄마의 삶을 이야기하는 구절이 나온다. “어떤 삶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자신이 각오할 고통을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아아, 엄마, 엄마! 나에게 인식과 사유할 힘과 분열과 슬픔을 준, 아군이자 적군이며 가부장제 안에서 내가 모르는 싸움을 매일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딸까지 종종, 아니 자주 쳐버리는 앞세대의 여자! 함께 영화를 본 일행끼리 하니처럼 흐느끼며 각자의 엄마를 외쳤다. 엄마아…!


샐리와 대척점에 놓인 듯한 샐리의 엄마나 두 명의 후보는 멍청하거나 ‘덜’ 깼기에 샐리와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생계와 존엄과 각자의 목표가 다른 만큼 차별이 도드라지는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만이 유일하고 숭고한 투쟁 또한 아니다. 결국 영화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서로 다른 삶이 어떻게 충돌하면서 또 연대할 수 있는지 고찰한다. 반대 시위로 재판을 받고 나오는 샐리를 누구보다 열렬하게 안아주는 사람 역시 샐리의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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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비헤이비어>는 극적 재미의 강렬한 유혹인 손쉬운 대립 구도에 빠지는 대신,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파고든다. 미스월드라는 장이 여성을 가축으로 ‘대하는’ ‘대상화하는’ 구도임을 지적하는 동시에 참가자를 존중하고 그들 각자의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권력자가 A를 B로 대한다는 이유로 A가 곧 B라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미스월드 대회 반대 시위자의 구호와 영화는 세상‘이’ 가축이 ‘아닌 자’를 ‘가축으로’ 대하고, 그 안에서 가축처럼 다루어진다고 해서 가축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미스월드 심사가 여성을 성적 물화하는 시선을 폭로하되 카메라는 여체를 ‘훑거나’ 관음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간 폭력이 어떻게 유희나 성적 스펙터클로 연출됐는지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미스월드 대회의 사회자이자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밥 호프가 미스월드 대회 반대 시위자를 성희롱으로 조롱하다가 혼쭐이 나는 장면 또한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그는 더 이상 웃기지 않으며, 차별이 먹여 살린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노골적인 멘트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리지만, 우리는 사실 모두 알고 있다. 그 모든 장면은 1970년대, 지나가버린 야만이 아니라 극장을 나서자마자 마주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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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영화의 특별한 힘은 실존 인물의 용기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2010년, BBC 라디오 <더 리유니온>에서 샐리 알렉산더와 조 로빈슨, 그리고 제니퍼 호스텐이 만났다. 미스월드 반대 시위자와 우승자의 만남이라니. 엠넷이 너무나 탐낼 아이템이고 ‘여자의 적은 여자’를 좋아하는 성차별주의자가 돗자리 들고 헐레벌떡 달려올 자리다. 그러나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인해 다른 삶을 살았지만, 여성의 자유와 선택을 위해 최전선에서 함께 싸운 동료였다고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이 장면이 강렬한 영감이 되어 탄생했으니, <미스비헤이비어>의 곳곳에서 살아 숨 쉬는 여성과 손을 맞잡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2020.06.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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