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라 오해마라···김홍도의 맞수가 그린 '8m 대작’은 풍속화였다

[컬처]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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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정조)을 모시던 화원 가운데 묘수는 ‘그대’와 ‘늙은 단원’을 꼽았더니…‘단원’은 보이지 않고 ‘도인’만 화실에 퍼질러 앉아 여전히 세상에 있네”. 문인·화가·서예가인 신위(1769~1845)가 시집(<경수당전고>)에서 ‘묘수 화원’으로 꼽은 두 사람 중 ‘단원’은 두말할 것없이 김홍도(1745~1806?)를 가리킨다.

김홍도는 조선의 ‘만찢남’

그도 그럴 것이 단원 김홍도는 18~19세기 조선의 ‘문화 아이콘’이자 ‘시대정신’이었다. “그림 한 장을 낼 때마다 곧 임금(정조)의 눈에 들었고”(조희룡의 <호산외기>), “속화를 그리면 사람들 모두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외쳤다”(강세황의 <단원기>)고 했다. 게다가 “눈매가 맑고 훤칠하며 용모가 빼어나서 세속 사람 같지 않아서 세인들이 신선(神仙)이라 했다”(강세황·조희룡·홍신유)고 할 정도였다. “꽃피고 달밝은 밤이면 거문고와 젓대(대금)를 연주했고, 슬피 노래하는 마음이 들 때면 북받쳐 몇줄기 눈물을 흘렸다”(강세황)는 센티멘탈리스트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김홍도는 시쳇말로 만화를 찢고 나올 만큼의 완벽한 ‘만찢남’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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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위의 언급처럼 그런 단원과 쌍벽을 이룬 묘수이며, ‘퍼질러 앉아’ 그림을 그리던 ‘그대’와 ‘도인’은 누구인가. 바로 단원 김홍도와 ‘1745년 소띠 동갑내기’이자 ‘평생지기’였던 이인문(1745~?)이었다. 무엇보다 단원은 ‘허정노수도’에서 “이인문과 이유신(여항문인이자 화가)이 나란히 서있는 아래서 지극히 주제넘은 일”이라고 자평했다. ‘겸손한 단원’의 일면을 보여주지만 그만큼 평생의 벗인 이인문을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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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와 이인문의 ‘동갑내기 콜라보’

‘소띠 동갑내기’ 두 화가의 관계는 각별했다. 일찍이 도화서에 들어간 동갑내기는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같은 모임에 참여하여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린 뒤 서로의 작품에 글을 쓰기도 했다. 요즘 말로 ‘콜라보’다.


대표적인 예로 김홍도의 ‘마상청앵도’에는 ‘이인문이 증명하다’(李文郁證)는 내용과 함께 시 한편이 실려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꽃밭 아래서 천가지 목소리로 생황을 부나(佳人花底簧千舌)’라고 시작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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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도에 등장하는 또다른 마을 모습. 사람들이 모여앉아 쉬고 있거나 부지런히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인문이 김홍도의 집에서 그린 작품들도 있다. 이중 한 점이 ‘수간모옥도(數間茅屋圖)’이다. 그림에는 ‘고송유수관도인이 단원 집에서 그려 백하신동에게 주다(古松流水館道人寫檀園榻贈白下申童)’는 낙관이 있다. 또 이인문과 김홍도가 1791년(정조 15년) 중인 출신 시인인 천수경(?~1818)의 인왕산 집 이름(송석원)을 따서 결성한 시모임(‘송석원시사’)를 주제로 그린 그림 2점이 있다. 낮에 열린 시모임, 즉 시회(詩會)는 이인문(‘송석원시회도’)이, 밤에 열린 향연은 김홍도(‘송석원시사야연도’)가 각각 그렸다. ‘낮’은 이인문, ‘밤’은 김홍도가 그린 ‘콜라보’라 할 수 있다. 또 이인문과 김홍도가 글씨와 그림을 나눠 맡은 ‘송하한담도’(1805년)도 있다. 이인문이 그림을 그리고 김홍도가 글(오언율시)을 쓴 합작품이다. ‘노송 아래 폭포를 배경으로 담소를 나누는 두 인물’을 그린 이인문의 그림에 ‘…숲에서 우연히 노인을 만나(偶然値林叟) 담소 나누느라 돌아갈 줄 모른다(談笑無還期)’는 김홍도의 오언율시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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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은 ‘신필(神筆)’

김홍도만큼 ‘만찢남’은 아니지만 이인문도 ‘도인’ 혹은 ‘신필(神筆)’ 소리를 들은 천재였다.


우선 김홍도를 총애했던 정조 임금은 이인문에게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예컨대 1796년(정조 20년) 차비대령화원(국왕 직속으로 특채된 궁중화가)을 대상으로 두 차례 시험(녹취재)이 시행됐다. 녹취재는 차비대령화원을 대상으로 사과(정6품) 및 사정(정7품) 직급에 해당하는 녹봉을 지급하기 위해 치르는 특별시험이었다. 그런데 당시 채점을 맡은 규장각 관리들은 이인문의 성적을 7명 중 꼴찌, 9명 중 4등으로 각각 매겼다.


하지만 정조 임금의 재채점 결과는 달랐다. 정조는 규장각 관리들이 매긴 성적을 무시하고 두 번 모두 이인문을 1등으로 올려놓았다(<내각일기> 1796년 6월11일). 그만큼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인문은 1784년(정조 8년)부터 시행된 녹취재에서 25번이나 특별녹봉을 받았다. 이인문의 성적표에 기재된 평가는 ‘격조(格調)’와 ‘사의(寫意·외형보다는 내재적인 정신을 표현)’, ‘초범(超凡·비범)’이었다. 문체반정을 추구한 정조의 입맛에 꼭맞는 화가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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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도’에 등장하는 강변 포구마을의 풍경. 물자를 쉼없이 운반하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문인 학자인 성해응(1760~1839)은 “이인문의 이름은 김홍도와 같았다”면서 두 동갑내기를 같은 반열 위에 놓았다. 특히 이인문을 두고는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다”(<연경당전집>)고 했다. 문인인 남공철(1760~1840)은 “이인문의 두 눈동자 형형한 빛은 늙어도 흐려지지 않았고…올곶은 뼈 굳게하고 자신을 능히 지켜왔다”면서 “시정의 속된 무리를 소인배로 여기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남공철은 나아가 자기 집에 걸어놓은 이인문의 소나무 그림을 ‘신필(神筆)’이라 했다(<금릉집>). 문인인 유재건(1793~1880) 역시 “언젠가 이공(이인문)이 소나무 그리는 것을 보았는데 칠십노인의 필치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신필(神筆)이라 했다”(<이향견문록>)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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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에 비해 홀대받은 이유

그런데 이인문에 대한 평가 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바로 ‘세속에 타협하지 않고 산수화에 능한 신필’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산수화 그리기를 좋아했고 한 폭의 조각 종이일망정 깊고 먼 천리의 기세가 있어 찬탄을 자아낸다”(유재건)는 평부터 “정선(1676~1759)과 심사정(1707~1769) 이후 산수를 그리는 이를 보지 못했는데 고송유수관도인(이인문의 호)의 그 이름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다”(마성린·1727~1798)라는 평까지…. 바로 이 대목이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이인문이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은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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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는 보는 이들이 손뼉을 치며 열광할만큼 서민들의 생활이나 정서를 주제로 한 풍속화를 그렸다. 반면 이인문은 필묵의 기량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이고 정형화한 산수화 분야에서 ‘신필(神筆)’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18~19세기 조선의 민낯을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표현한 김홍도의 그늘에 가렸고, 한국적인 미감이 부족하고 개성도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평가에서 보듯 이인문이 18~19세기 조선 화단이 요구한 그림의 주제와 소재를 다루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같은 주제를 두고 ‘낮의 시모임’과 ‘밤의 향연’을 따로 그린 ‘송석원시회도’(이인문)와 ‘송석원시사야연도’(김홍도)를 보면 두 화가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이인문은 시모임보다는 배경산수 위주로, 김홍도는 시모임을 중심으로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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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도의 모티브는 ‘촉도난’

그런 이인문에게 회심의 역작이 있었으니 바로 ‘강산무진도’이다. 강산무진도는 길이 8m가 넘는 두루마리 대작(세로 43.8㎝×856㎝)이다. 2m짜리 비단 5폭을 잇대어 바탕을 만들었다. 파노라마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산수표현과 정교한 세부묘사가 일관된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조선을 대표하는 대작이라는 평을 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산수의 파노라마’라는 이 작품에 대한 연구는 소홀했다. 앞서도 언급했듯 조선 강토를 그린 진경산수화도 아니고, 조선의 실상을 묘사한 김홍도나 신윤복(1758~?), 김득신(1754~1822) 등의 풍속화도 아니라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산무진도’는 이인문의 스승으로 알려진 현재 심사정(1707~1769)의 ‘촉잔도’(1768년)를 모델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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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은 지금의 쓰촨성(四川省)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 싸여 있기에 촉 지방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낭떠러지 사이에 다리를 놓듯 아슬아슬한 ‘잔도(棧道·하늘사다리길)’를 놓고 힘겹게 왕래했다.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은 그 유명한 ‘촉도난(蜀道難)’에서 “촉 가는 길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蜀道之難難於靑天)”고 탄식했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촉나라로 몸을 피한 당나라 현종(재위 712~755)의 피란길을 그린 ‘명황행촉도’를 보면 현종 일행이 병풍처럼 펼쳐진 첨봉들이 둘러쌓인 깊숙한 산길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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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보면 ‘촉잔도’와 구성 모티브가 흡사하다. 넓은 평원에서 시작하다가 솟아오른 절벽이 보이는 전반부와 험준한 산세가 광활하게 그려진 중반부, 그리고 다시 잔잔한 평원으로 연결되는 구성이 그렇다.


또한 두 그림 모두에서 사람이 줄로 잡아당겨 끄는 협선이 보인다. 협선은 중국 양쯔강(揚子江) 중상류와 쓰촨 지방에 걸쳐 형성된 협곡인 싼샤(三峽)로 올라가는 배다. 또 ‘강산무진도’에서 보이는 많은 길은 ‘촉도난’의 잔도를 연상케 한다. 17~18세기 중국의 산수판화집에는 잔도가 쓰촨성을 표현하는데 활용됐다. 또한 심사정의 ‘촉도난’에서 보이는 도르래가 ‘강산무진도’에도 등장한다. 게다가 그림 속 다층누각의 건물은 무대가 조선이 아닌 중국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러니 ‘강산무진도’는 작가(이인문)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중국 촉나라 피난길을 그린 관념산수화 쯤으로 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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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인가 풍속화인가

하지만 이 ‘강산무진도’에 천착한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라고 한다. 중국풍의 단순한 관념산수화가 아닐 뿐 아니라 김홍도와는 완전히 다른 맛의 풍속화가 그림 전체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 무슨 소리인가. ‘강산무진도’는 심사정의 ‘촉잔도’와 완전히 다르다. 우선 ‘촉잔도’에 표현되는 황량하고 험준한 산세가 ‘강산무진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잔도를 표현했다지만 길이 매우 잘 닦여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길 위로 분주하게 사람이 이동한다. 이곳저곳의 마을에는 사람들과 나귀들로 북적댄다. 어떤 인물은 집안에서 친구와 담소를 나눈다. 또 어떤 이는 한가로운 때를 보낸다. 짐을 부지런히 나르는 짐꾼들도 이채롭다. 긴 나무막대기의 양쪽에 짐을 매달아 어깨로 나르거나 당나귀 혹은 수레를 이용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짐을 잠시 두고 마을 주막에 걸터앉아 밥을 먹는다. 지나는 마을마다 사람과 당나귀, 말이 북적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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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인가. 강에는 조운선과 같은 커다란 배가 떠다닌다. 그림에 등장하는 배는 총 100척이 넘는다. 이 배들이 마을 포구에 도착하자 짐꾼들이 도착한 짐을 부지런히 나른다. 또 ‘촉잔도’의 도르래와 ‘강산무진도’의 도르래는 조금 다르다. ‘촉잔도’ 도르래는 사람과 짐을 모두 태우고 있고 줄을 한쪽으로만 잡아당긴다. 하지만 ‘강산무진도’의 도르래는 짐만 나르는 운송도구다. 도르래 아래 위에서 줄을 잡아당긴다, 또한 도르래를 중심으로 절벽 위 아래에 마을이 보인다. 도르래 이용객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고, 마을은 당나귀로 북적댄다. 물자가 쌍방향으로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다. 이렇게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담고 있다. 산 중턱까지 집들이 있고, 멀리 산사가 보이며, 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여있고, 어촌마을이 있고 나루터에 사람이 모여있으며, 배가 자유로이 다니고, 물레방아까지 보이는…. 영락없는 풍속화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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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국과민’을 지향하는 중국 산수화 아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도연명(465?~427?)이 꿈꿨던 이상향, 즉 무릉도원을 그린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매우 어색하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그려진 무릉도원은 동아시아 유토피아의 전형적인 이미지다. 전란을 피해 온 사람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 철저히 분리되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공간이다. 정통의 관념 산수화가 추구하는 산수는 바로 그러한 현실 너머의 세상이다. 고기잡이에는 뜻이 없는 낚시꾼과 나무꾼, 고매한 스님과 시인이 유유자적 거닐거나 책을 펼쳐놓고 있다. 바로 노자가 꿈꾸던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사회이다.


즉 노자는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어야 하며(小國寡民) 문명의 이기가 있어도 쓰지 않고(使有什伯之器而不用) 백성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멀리 옮겨 살지 않도록 하며(使民重死而不遠徙)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고 갈 곳이 없는(雖有舟輿 無所乘之)…사회’를 꿈꿨다.(<노자> 80장) 노자가 꿈꾼 사회는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지 않고 이웃나라와 가까워도 서로 왕래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속 공간은 단선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고 사방으로 뻗어가는 개방적 구조이다. 또 다양한 신분·직업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강과 산을 넘어 움직이며 교역하는 역동적인 분위기는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는 노자와 배치된다. 게다가 문명의 상징인 다층건물과 인공의 수레바퀴, 도르래 역시 ‘문명의 이기는 쓰지 않는다’는 노자식 이상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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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말 탄 선비가 버드나무 위에서 노니는 꾀꼬리 한쌍에 넋을 잃는 모습을 그린 마상청앵도’에는 ‘이인문이 증명하다’(李文郁證)는 내용과 함께 시 한편이 실려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꽃밭 아래서 천가지 목소리로 생황을 부나(佳人花底簧千舌)’라고 시작되는 시이다.|간송미술관 소장

중흥군주 정조시대상인가

그래서 연구자 중에는 ‘강산무진도’가 조선의 중흥기인 정조 연간, 즉 18~19세기 흥청대는 서울, 그것도 한강 모습을 그린 ‘풍속화’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8세기 초 대동법의 확대시행으로 각 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게 되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지방에서 거둬들인 쌀을 팔아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서 쓰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시장이 발달했고,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민영수공업이 활발해졌다. 대동법 시행으로 바닷길과 한강의 포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세곡의 물류량이 급증했다.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된 서울에는 다양한 물화가 넘쳐났고, 저잣거리에는 유흥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중흥군주인 정조는 그런 ‘번창한 도시’ 서울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1792년(정조 16년) 정조는 한양(서울)의 저잣거리 풍물을 그린 ‘성시전도(城市全圖)’를 완성한 기념으로 규장각 관리들에게 ‘시 한편씩 제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박제가(1750~1805)가 지어올린 ‘성시전도시’를 보라.


“놀고 먹는 백성 없이 집집마다 다 부자요, 저울 눈금 속이지 않아 풍속 모두 아름답다. 인(仁)의 성(城)과, 의(義)의 시장에 나라를 세워 번성함과 화려함만 믿지 않는다.”


마치 이인문의 ‘강산무진도’가 표현한 다양한 인물들의 생활상 같다. 정조 임금이 누구인가. 1794년 규장각 검교직각 남공철(1760~1840)과의 대화에서 “과인의 정치가 요순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초심을 잃지는 않은 것 같다”고 은근 자랑한 임금이다. 말하자면 ‘내가 펼친 정치, 태평성대의 상징인 요순 시대에 근접하지 않냐’는 자부심을 피력한 것이다. 정조는 “우리나라 사방 6000리에 산도, 바다도 있어 수레와 배로 요동이나 심양, 중국이나 왜국까지 갈 수 있다”(<홍재전서> ‘도리총고서’)면서 예의 진취적인 기상을 펼쳐보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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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도는 풍속화이다

그런 배경지식을 갖고 ‘강산무진도’를 뜯어보게되면 ‘산수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그림의 ‘가는 길’은 중국의 촉 혹은 무릉도원이 아니라, 경제활성화 덕분에 성시를 이루던 ‘서울 가는 길’의 한강변이라는 느낌이 든다. 현실과 동떨어진 중국의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선의 이상향을 그렸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의 언급처럼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속세를 떠난 이상향의 산수화가 아니라 번영하는 인간의 산수화’이며, 혹은 ‘강산은 산수화지만 인간이 주인공인 산수화’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림에 과문한 필자가 감히 말하고 싶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산수화의 범주에 넣지 말고, 18~19세기 한강변을 살아간 조선 백성들의 삶을 그린 풍속화라 하면 안될까. 동갑내기인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하고는 다른 맛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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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이 그리고 김홍도가 글을 쓴 ‘송하한담도’(1805년). ‘노송 아래 폭포를 배경으로 담소를 나누는 두 인물’을 그린 이인문의 그림에 ‘…숲에서 우연히 노인을 만나(偶然値林수) 담소 나누느라 돌아갈 줄 모른다(談笑無還期)’는 김홍도의 오언율시가 붙어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8m 넘는 대작을 펼쳐보인다

이 강산무진도(보물 제2020호)는 국립중앙박물관이 7월21일부터 9월27일까지 개최하는 특별전(‘새 보물 납시었네-신국보보물전 2017~2019’)에서 소개된다. 당초 오는 23일 개막예정이었지만 코로나 19의 장기화로 일정을 한달 가까이 늦췄다. 2017~2019년 국보·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3건을 소개하는 이 특별전에는 ‘강산무진도’를 비롯,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4호·2019년),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국보 제327호·2018년), 신윤복의 ‘미인도’(보물 제1973호·2018년) 등이 출품된다.


한 점 한 점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지만 필자는 그중에서 ‘1745년 소띠 동갑내기’인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 가려있던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를 콕 찍어 공부해봤다. 강경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번 특별전에서 8m 넘는 대작인 ‘강산무진도’를 완전히 펼쳐 전시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산수화인듯, 풍속화인듯 조선의 18~19세기를 그린 산수인물장관의 파노라마를 찬찬히 뜯어봐야 하겠기에….(이 기사는 고연희·김소영·김정임·김미숙 선생 등의 논문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국립전주박물관 민길홍 선생의 글과 국립중앙박물관 이수경·강경남 선생의 도움말과 자료제공도 기사 작성에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김정임,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연구’, 서울대 석사논문, 2016


고연희, ‘강산무진(江山無盡), 조선이 그린 유토피아’, <한국문화연구> 24권,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2013


김소영,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연구’, 명지대 박사논문, 2015


안대회, ‘성시전도시와 18세기 서울의 풍경’, <고전연구> 제35권 35호, 한국고전문학회, 2009


강관식, ‘조선 후기 화원 회화의 변모와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 제도’, <미술사학> 17호, 미술사학연구회, 2002


김미숙, ‘18세기 조선시대 화원연구’, 공주대 석사논문, 2015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2022.08.0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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