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주탑과 흙빛 고사리밭길…남해는 기다린다, 그 옛날의 ‘영광’을

[여행]by 경향신문

남해대교와 남해각 바래길을 걷다

경향신문

남해각 전시실에 걸린 지난 2월 임시 개관한 남해각은 그 순간을 기록했다. 파독 광부 신병윤씨와 간호사 서원숙씨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기록을 읽어본다. 이들은 1971년 독일 루르 지방에서 만나 1974년 결혼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신씨의 고향 진해로 왔다가 ‘한국에도 현수가 생겼다’는 가족 말을 듣고 부부가 남해대교로 놀러와 사진을 촬영했다. 45년 뒤인 2020년 부부는 똑같은 장소에

중부 지방 사람들이 만개한 벚꽃에 감탄할 때 남부 지방 사람들은 져가는 벚꽃을 아쉬워했다. 벚꽃은 좁다는 한국의 땅도 위도로 나뉜다는 걸 확인해 주는 지표다. 지난달 30일 경남 남해를 찾았을 때 벚나무 꽃잎은 절반가량 떨어져 나갔다. 남해대교 부근 벚꽃 명소인 왕지벚꽃길은 떨어진 꽃잎들이 다시 꽃길을 이루었다. 남해각 오르는 계단에도 꽃잎이 쌓였다. 누군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땅에 쏟아진 꽃잎 위로 드리운 나무 그림자를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남해각에서 노량해협과 하동을 바라본다. 어김없이 붉은색 주탑의 남해대교가 드러난다.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된, 전형을 이룬 풍경이다. 산과 바다, 다리, 벚꽃길로 시선이 자연스레 흐른다. 남해각 오른쪽엔 거북선전시관·충렬사, 뒤로 남해 군도가 등장한다. 요샛말로 ‘인생샷 포토존’이다. 수학여행, 신혼여행, 가족여행 온 사람들이 남해각 모퉁이에서 교각과 하동 연대봉을 배경으로 삶의 좋던 한순간을 담아냈다. 갈 곳 없고, 볼 게 없던 시절 건축이 주는 미감을 이곳에서 느끼곤 했다.

경향신문

남해대교는 한때 한국 관광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 이 다리와 산과 바다, 벚꽃이 한데 어우러져 특유의 풍경을 만들었다. 남해 사람들은 붉은색 주탑의 다리를 집 대문으로 여겼다. 남해각 옥상에서 촬영한 남해대교 일대 풍경.

경향신문

하동 노량대교 부근에서 바라본 남해대교. 아래 포장도로가 남파랑길이다.

갈 곳 없고, 볼 것 없던 70년대

남해대교는 ‘인생샷 포토존’

노량대교 등 생기며 사람 줄고

빛바랜 ‘한국 대표 관광지’로


지난 2월 임시 개관한 남해각은 그 순간을 기록했다. 전시장 대형 패널로 걸어둔, 파독 광부 신병윤씨와 간호사 서원숙씨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기록을 읽어본다. 이들은 1971년 독일 루르 지방에서 만나 1974년 결혼했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나 신씨의 고향 진해로 왔다가 ‘한국에도 현수교가 생겼다’는 가족 말을 듣고 남해대교로 놀러 와 사진을 찍었다. 45년 뒤인 2020년 부부는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포즈로 촬영했다. 이들은 지금 독일마을에 산다. 남해각 아카이브(namhaegak.com)는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 제보를 받는다.


1970년대 이 다리는 한국 관광과 한국 건설을 상징하는 이정표였다. 1973년 개통 때 여러 언론이 ‘한국의 금문교’라고 불렀다. 현대건설이 1972년 8월25일자 경향신문에 실은 전면 광고 문구를 보면, “전장 660m, 교폭 12m인 이 다리는 미국의 금문교를 모방한 ‘서스펜숀 브릿지(suspension pidge)’로서 교각 높이는 80m(해저 20m, 지상 60m)”라고 나온다. “조국근대화에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남해대교”를 큰 제목으로 뽑았다.


1967년 5월10일 기공식을 열었다. 일본 IHI중공업이 탑과 항을 제작해 배로 옮겼다. 이 회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무기도 만들었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소송 대상 회사이기도 하다. 시공사인 현대건설이 조립했다. 대일청구권으로 받은 돈이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은 해군 함정과 UDT 대원까지 동원했다. 남해각 아카이브는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일본의 원조-군대동원-현대건설이라는 한국식 근대화, 압축적 경제성장을 증언하는 물적 증거물”이라고 정의한다.

경향신문

해태가 1975년 남해각을 지었다. 북쪽에 만든 게 임진각이다. 지난 2월 임시 개관한 남해각은 아카이브와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당시 남해 사람들도, 나머지 지역 사람들도 남해대교의 사회과학을 잘 몰랐다. 남해 사람들에겐 그저 ‘큰 빨간 대문’ 같은 존재였다. 여러 사람이 타지에서 고향으로 들어올 때 남해대교를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벌건 게 딱 보일 때! 아~ 우리 집에 왔구나.” 아카이브는 버스기사 김정곤씨 회고를 기록했다. 다리 개통으로 남해~부산, 남해~서울을 연결하는 버스편이 생겼다. 1980년대 ‘남해~부산’은 6~8시간이 걸렸다. 남해군 주산인 망운산 이름을 딴 망운산호 선장 정상종씨는 다리 개통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한때 남해각에서는 사진사 19명이 일했다. 박용길씨는 마지막 사진사였다. 사진 촬영증과 영수증이 전시장에 놓였다.


남해각은 1975년 남해대교 오른쪽 동산에 들어섰다. 주소는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제과회사로 유명한 해태가 해태관광이란 회사를 만들어 북쪽엔 임진각, 남쪽에는 남해각을 지었다. 숙박 시설이자 휴게공간이다. 남해 사람들이 1970년 출시된 브라보콘을 처음 맛본 곳이 남해각이다. 남해각 건물의 앞뒤 기둥은 남해대교 주탑을 형상화해 설계한 것이라는 추정이 아카이브에 나와 있다.

경향신문

남해각은 지난 2월 임시 개관했다. 옛 건물 대부분을 보존했다. 남해대교와 남해각 아카이브 결과물과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왼쪽은 서원태 감독 작품 ‘수집가들’ 중 옛 남해대교 영상. 오른쪽 창은 실제 남해대교다.

대교 오른쪽에 세웠던 남해각은

당시 버스기사·사진사 회고록 등

그 시절 순간 기록한 전시장으로


‘한국의 대표 관광지’라는 그 옛날의 영광은 지금 온데간데없다. 노량대교와 창선·삼천포대교 개통으로 남해대교를 찾는 사람이 줄었다. 남해 주변의 여러 토건 사업은 수도권과 부산 같은 대도시를 키우며 남해의 공동화를 이끌었다. 이 다리로 남해를 빠져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해각 직원 구주옥씨는 “다리 개통 때 남해군민만 10만명이 왔다고 해요. 당시 인구가 13만~14만명이었죠.” 일본인 기술자가 인파 때문에 다리가 무너질까 봐 가슴을 졸였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남해군 인구는 2020년 기준 4만2958명이다.


최근 수년간 뜬 관광지는 독일마을이다. 사람들은 남해대교 대신 사천과 남해를 연결하는 다섯 다리로 독일마을을 간다. 구씨는 “이왕이면 남해대교를 들른 뒤 (남해의 여러) 목적지를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서 남해대교 교차로에서 내려 걸었다. 교차로 소재지도 노량리(경남 하동군 금남면)다. 섬진강대로와 구노량길을 연결한다. 길은 이순신의 역사와 강의 지리를 품고 흐른다. 도로 아래로 남파랑길 하동47코스가 이어진다. 남해대교를 보려고 노량대교로 이동했다. 남파랑길은 바래길과 연결된다.

경향신문

남해엔 철도가 없다. 동대만 간이역은 관광 지원 시설이다. 주변에 유채꽃과 튤립을 심었다.

남해는 독일마을과 다랭이마을, 금산과 상주해수욕장 등지가 유명한데 바래길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바래길이 남해 명소를 대부분 잇는다. 2010년 개통한 바래길도 지난해 11월22일 재단장을 거쳐 ‘바래길 2.0’이라는 이름으로 시범 개통했다. 19개 코스를 다 걸을 수 있다. 말뚝 정비 작업 등이 조금 남았다. 윤문기 남해군 문화관광과 바래길 팀장이 추천한 곳은 제4코스 고사리밭길이다. 고사리 채취 기간인 3~6월 고사리밭길만 예약제(cafe.daum.net/namhaetrails)로 진행한다. 화·목·토요일에 하루 11명만 받는다. 고사리를 무단으로 채취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바래길팀은 예약제 도입을 약속하고 주민 허락을 받았다.


예약일인 지난 3일 출발 시각인 오전 10시에 맞춰 창선면 동대만간이역에 도착했다. 남해엔 철도가 없다. 이 간이역은 관광지원 시설이다. 문화관광해설사 김민영씨가 “동대만 일대엔 ‘잘피’라고 불리는 진지리가 잘 자란다. 나물로도 먹고, 퇴비로도 쓴다”고 전한다.

경향신문

남해 고사리밭길엔 새순이 돋아났다. 6월까지 채취한다.

5명이 예약했는데 3명이 ‘노쇼’했다. 출발 시각에 이르러서야 김씨가 전화로 확인했다. ‘비 때문에 못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동대만을 따라 고사리밭길로 향했다. 밭길 초입인 창선면 오용리 한 주택 마당을 지났다. 집주인이 탐방객을 위해 기꺼이 마당을 길로 내줬다.


비 때문에 산허리 고사리밭 너머로 안개가 짙게 깔렸다. 쾌청한 날씨 풍경 못지않은 장관을 만들었다. 저 멀리 능선과 바다에 둔 시선을 땅으로 가져온다. 가을 단풍과 함께 시들어 겨우내 말라비틀어져 땅에 처진 고사리들 사이로 새순이 올라왔다. 빗물 머금은 고사리순이 소생의 기운과 자연 순환을 새삼 일깨우는 듯했다. 여전히 풀 죽은 고사리들은 메마른 더미보다는 생명력이 꿈틀하는 짙은 흙처럼 은은한 빛을 발했다. 비와 습기 때문에 축축해진 몸과 마음의 피로를 덜어내는 풍경이었다.

경향신문

남해 바래길 중 손꼽히는 게 고사리밭길이다. 밭길 너머로 바다가 드러나곤 한다. 지금 풀 죽은 고사리 사이로 새순이 올라오고 있다. 무단 채취 때문에 6월까지는 예약제로 탐방을 진행한다.

경향신문

지난 3일 남해 고사리밭길 일대엔 비가 내렸다. 안개도 자욱했다. 잠시 안개가 옅어졌을 때 바다가 드러났다.

남해 명소 잇는 바래길 19코스

4코스인 고사리밭길은 ‘예약제’

건설업 쉬고 부인 식당 돕는 김씨

“여긴 먹고살 만한 게 하나 없어”


이 풍경을 두고 ‘이국적’이라고도 하는데, 해외 어디가 비슷한 풍경을 지녔는지 모르겠다. 노량대교 전시관의 지역 특산품 매장 이름이 ‘하동 알프스 마켓’이란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저 하동 산이고, 남해 풍경일 뿐이다.


이날 고사리밭길은 3명이 걸었다. 이영숙씨는 지난 2월 부산 남파랑길에서 출발했다. 1년에 두세 달은 전국의 길을 걷는다고 했다. “왜 걷냐”고 물었더니 “걷는 사람한테 왜 걷냐고 왜 묻느냐”며 웃었다. 그는 “풀 하나하나가 하루하루 다르다. 모든 길이 걸을 때마다 새롭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바래길이 고사리밭 사이를 굽이굽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고사리밭길은 주로 가인리 식포마을, 가인마을, 적량마을을 둘러간다. 마을 이름도 와닿는다. 식포(湜浦)는 걸인들이 와서 배불리 먹고 간다고 해서 식포(食浦)라고도 불렀다. 가인마을은 ‘도울 가(加)’에 ‘어질 인(仁)’ 자를 쓴다. 언포마을 성기바위엔 10년 안에 돈을 벌어 떠나야만 부가 유지되고, 10년을 넘기면 망한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파주 금천마을에도 비슷한 속설이 내려오는데, 탐욕을 경계하라는 뜻인 듯하다.


낮 12시30분쯤 예약제 구간 끝인 가인마을에 도착했다. 김수진씨가 비빔밥 도시락을 차로 싣고 와 정자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지족항에서 빗길을 뚫고 단 두 사람 도시락만 가져와 30분을 기다렸는데도 언짢은 기색 하나 없다. 고사리, 무냉채, 돌미역, 달래, 표고버섯에 계란을 얹은 비빔밥을 준비했다. 대부분 남해산이라고 한다. 자연산 갓김치도 곁들였다.


김씨는 건설업에 종사한다. 코로나19 때문에 일감이 줄었다. 지족항에서 석갈비집 뚱이네를 운영하는 부인 일을 돕고 있다. 왕복 시간과 재료비를 생각하면 ‘고사리밭길 도시락’은 손해다. “남해를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정성 담은 밥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말한다. 코로나19가 끝나면 사정이 나아지고, 이익도 조금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공기가 맑아서 좋지예. 그런데 먹고살 만한 게 없어요. 공장도 하나 없고요. 인구는 4만명 간신히 턱걸이하고….” 윤 팀장 말도 떠올랐다. “배 수리하는 작은 조선소가 있을 뿐이죠. 예전 군민들이 조선소나 화력발전소를 막기도 했어요.” 남해 군민 몇몇은 1970년대 지금은 거제 옥포에 든 조선소가 남해에 올 뻔했다고 기억한다.


그 덕분에 청정 지역이 되었다. 또 그 때문에 낙후 지역이라고도 불린다. 수십년 맹렬하게 진행된 토건과 경제 일변도의 동력이 이 아름다운 고장에 소외와 낙후의 기운을 드리운 듯싶었다. 노령화로 농어업 인구도 줄고 있다. 도시인의 여가와 투자 공간이 됐다. 풍광 좋은 땅은 서울 사람들, 경기도 사람들 것이라고 김씨가 전했다.


조선소 들어설 뻔한 70년대 지나

지금은 청정지역, 혹은 낙후지역

도시인의 여가·투자 공간이 됐다


고사리밭길은 가인마을 세심사에서 제4코스 종착지인 적량마을까지 이어진다. 이곳은 예약하지 않고 갈 수 있다. 나는 버스 예약 때문에 삼천포터미널로 가야 했다. 이씨는 적량마을까지 걷겠다고 한다. 인솔 지역은 동대만에서 가인마을까지인데도, 김민영씨가 동행하겠다며 함께 길을 나섰다. 가인마을 정자를 떠날 때 빗줄기가 거세졌다. “왜 빗길을 걷느냐”고 다시 묻지 않았다.


남해 |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2021.04.09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