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의 사람을 만나는 길

[여행]by 걷기여행길

지리산은 품이 넓은 산이다. 그 넓은 품을 더 넓게 품은 길이 지리산둘레길이다. 지리산 자락에 얹힌 크고 작은 마을을 하나씩 하나씩 이으며 길을 내 그 거대한 산을 품고 있다. 하여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일은, 지리산의 험한 산세를 도전 삼아 경험하는 일이 아니다. 지리산에 들어와 사는, 지리산을 닮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지리산둘레길 오미~방광 구간도 마찬가지다. 구례군 오미마을과 방광마을을 잇는 12km의 트레일은 모두 7개 마을을 차례로 지난다. 오미마을에서 시작한 길이 하사마을과 상사마을을 거쳐 황전마을과 당촌마을, 수하마을을 지나 방광마을에서 구간이 끝난다. 고개를 넘기도 하고 숲을 지나기도 하지만, 마을을 지나는 길이 가장 많다. 길은 험하지 않지만, 두리번두리번 거리다 한없이 시간을 지체하는 길이다.

지리산 자락의 사람을 만나는 길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자락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오미~방광 구간의 마지막 마을 방광마을 어귀에서.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이 넉넉하다.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리산둘레길 오미~방광 구간은 지리산 남쪽 기슭의 삶을 들여다보는 코스다. 지리산 남쪽 자락에 걸터앉아 섬진강을 내려 보는 볕 바른 농촌마을 7곳을, 길은 꼬박고박 들어갔다가 나온다. 풍수에 문외한이어도 동네가 앉은 터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그 첫 증거가 되는 장소가 오미마을의 고택 운조루(雲鳥樓)다.

지리산 자락의 사람을 만나는 길

오미마을 운조루 옆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산에사네'. 지리산둘레길의 명소가 된 게스트하우스다.

운조루는 남한 3대 길지(吉地)로 알려진 명당이다.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반지를 떨어뜨린 곳에 들어섰다는 99칸 고택이다(지금은 70여 칸만 남았다). 운조루는 조선 영조 때 낙안 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세운 고택으로, 현재 국가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운조루에 명물이 있다. 뒤주다. 뒤주 아래에 가로 5cm 세로 10cm 크기의 구멍이 있는데 구멍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쓰여있다. 누구나 구멍을 열고 쌀을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다.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이 뒤주는 주민을 위해 늘 열려 있었다고 한다. 부엌 굴뚝에서도 주민을 위한 배려를 읽을 수 있다. 다른 집보다 굴뚝이 낮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오르는 것을 경계해 일부러 굴뚝을 낮게 들였다고 한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지리산 남쪽 마을은 유난히 곡절이 많았다. 동학농민운동·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숱한 마을이 풍비박산이 났지만, 누구도 운조루만큼은 해코지하지 않았다. 마을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운조루는 흔히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현장으로 이해된다. 입장료 어른 1000원.

지리산 자락의 사람을 만나는 길

(좌) 운조루는 원래 누각의 이름이다. 지금은 고택 전체를 가리킨다.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다.
(우) 그 유명한 운조루의 뒤주. 조선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현장으로 불린다.

풍경과 일상

오미마을을 나온 길은 하사마을 앞을 지나 상사마을로 들어간다. 상사마을은 20년쯤 전 전국 최고의 장수마을로 이름이 높았다. 영험한 효력의 당물샘 덕분이라는데, 요즘엔 지리산 자락으로 귀농한 외지인이 이 마을을 선호한다고 한다. 길은 상사마을 뒤편 산으로 올라간다. 외진 산길이지만 길 대부분이 시멘트로 포장이 돼 있다. 동행한 구례군청 김인호 주무관이 “산수유ㆍ명이ㆍ매실 등 마을에서 거둔 작물을 차로 옮겨야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흔한 풍경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풍경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고단한 일상일 때가 많다. 길을 걸을 때는 섣부른 감상을 삼가야 한다.

 

산길에서 내려오면 황전마을이다. 황전마을은 몰라도, 화엄사 아랫마을이라고 하면 안다. 길이 화엄사를 들르지는 않지만, 황전마을에서 화엄계곡을 따라 20분쯤 걸어 오르면 일주문에 이른다. 지리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니, 부러 들를 만하다. 천 년 고찰에는 녹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황전마을에는 들를 만한 명소가 하나 더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운영하는 종복원기술원이다. 지리산 반달곰 복원사업이 여기에서 진행된다. 매일 탐방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전시관만 둘러봐도 재미있다. 월요일 휴관. 061-783-9120.

지리산 자락의 사람을 만나는 길

시간이 걸리더라도 화엄사는 꼭 들르시라 권한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황전마을에서 나와 다시 숲을 통과하면 당촌마을을 지나 수한마을로 이어진다. 수한마을로 내려가기 직전 대숲을 지날 때는 잠시 걸음을 쉬시라 권한다. 한동안 하늘을 가린 대나무를 올려 봐도 좋고, 댓잎 깔고 앉아 바람 지나는 소리를 들어도 좋다. 수한마을은 길이 지나는 7개 마을 중에서 가장 예쁜 마을이다. 여행자를 위해 아기자기한 조형물을 설치한 정성도 고맙지만, 낮은 돌담을 가득 덮은 덩굴만 바라봐도 걸음이 가벼워진다.

지리산 자락의 사람을 만나는 길

(좌) 지리산둘레길은 마을을 가로지른다. 고샅을 지나고 골목을 통과한다. 넝쿨이 담벼락과 지붕을 덮은 수한마을을 지나며.
(우) 지리산둘레길 이정표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이정표도 지리산답다.

방광마을은 마을 어귀를 지키고 선 커다란 느티나무가 기억에 남는다. 논 사이에 자리를 잡은 느티나무 그늘이 유난히 넓어 보인다. 나무 뒤로 마을이 있고, 마을 뒤로 지리산 자락이 병풍처럼 서 있다. 나무 아래 평상에서 하늘을 보고 누웠다. 잠깐 졸았던 것도 같다.

 

방광마을에서 길은 끝났다. 아니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방광 마을에서 오미∼방광 구간은 길은 접었지만, 도로를 넘어 방광∼산동 구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걸었던 길을 돌아봤다. 기억에 남는 건 길이 아니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고, 마을에서 만난 사람이다. 그래, 맞다. 지리산을 걷고 왔다. 오랜만이었다.

지리산 자락의 사람을 만나는 길

수한마을 어귀의 작은 대숲. 바람에 대나무가 휘었고, 바람소리가 파도처럼 일었다.

코스요약

- 걷는 거리 : 12km

- 걷는 시간 : 5시간 

- 걷는 순서 : 오미마을(운조루)~상사마을~황전마을(지리산탐방안내소)~수한마을~방광마을

 

교통편

오미∼방광 구간은 구례 읍내에서 멀지 않다. 구간 중간에 있는 황전마을은 화엄사 아랫마을이어서 구례 읍내에서 출발하는 버스도 자주 있는 편이다. 그래도 지리산둘레길을 걸을 때는 택시를 부르는 게 제일 속 편하다.

- 구례버스터미널 061-780-2730∼1.

- 지리산둘레길 콜택시 061-781-3200.

 

함께 즐길거리

-여행 먹거리 : 지리산 자락에는 먹거리가 풍부하다. 섬진강에서 잡아오는 재첩도 좋지만, 지리산 먹거리의 대표는 역시 싱싱한 산나물이다. 방광마을 입구 ‘노고단가든(061-781-0529)’에서 산채보리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온갖 나물이 한 상이 거하게 차려졌다. 여기에 지리산 막걸리 한 사발을 걸치니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산채보리밥 7000원, 막걸리 3000원. 

지리산 자락의 사람을 만나는 길

 

- 체험거리 : 지리산둘레길이 지나지는 않지만 황전마을에서 20분쯤 걸으면 화엄사 일주문이다. 지리산 자락을 대표하는 천 년 고찰이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갈 만하다. 마침 여름의 복판이어서 화엄계곡 물소리도 좋고, 경내에 녹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화엄사는 템플스테이로도 유명한 사찰이다.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나는 참 예쁘다!’는 이름의 1박2일 프로그램이 가장 인기가 좋다. 4만원. 061-782-7600. 

지리산 자락의 사람을 만나는 길

 

- 기타 : 지리산둘레길 주변에는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오미∼방광 구간에도 이름난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두 곳을 추천한다. 하나는 오미마을 운조루 바로 옆에 있는 ‘산에사네(061-781-7231)’다. 14년 전 귀촌한 김서곤(54)ㆍ노정애(52) 부부가 운영하는 집이다. 지리산둘레길 마니아 사이에는 이미 유명한 집이다. 1박 2만원. 황전마을 근처의 게스트하우스 ‘구례둘레길(010-8653-6337)’도 명소다. 구례 출신으로 지리산에서 생태운동을 주도한 우두성(64)씨가 운영한다. 1박 2만원.

걷기여행TIP

지리산 자락의 사람을 만나는 길

* 자세한 코스정보는 http://www.koreatrails.or.kr/course_view/?course=1270 이곳을 참조해 주세요.

 

- 화장실: 황전마을에 있는 지리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  

- 식수: 길 대부분이 마을을 통과하므로 어렵지 않게 식수를 구할 수 있다.

- 식사: 구례 읍내가 가까워 식당이 많다. 화엄사 입구 황전마을에도 식당이 모여 있다. 

- 길안내: 지리산둘레길은 이정표가 잘 돼 있다. 길바닥에 페인트로 칠한 방향표시나 길목에 서 있는 이정표를 참고하면 된다. 화살표 빨간색이 순방향이다.

- 코스문의: ㈔숲길 055-884-0850 / 지리산둘레길 구례센터 061-781-0850

글ㆍ사진=중앙일보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2015.10.30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걷고! 보고! 느끼고! 대한민국의 걷기 여행 길을 함께 합니다.
채널명
걷기여행길
소개글
걷고! 보고! 느끼고! 대한민국의 걷기 여행 길을 함께 합니다.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