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물빛 따라 한가로이 노니는 길, 신성계곡 녹색길 03코스

[여행]by 걷기여행길

어디든 떠나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봄을 기약하던 겨울은 한참이나 지났고, 막상 봄을 맞고도 주춤주춤하다 맥없이 계절을 떠나보냈다. 벌써 여름 한복판이라니. 피서철을 코앞에 두고, 더위를 피하기보다 인파를 피해 갈 만한 곳을 찾아 나섰다. '산소카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청정한 기운을 내뿜는 경복 청송으로. '청송' 하면 으레 주왕산이나 주산지를 떠올린다. 청송에는 이들 명소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당당히 제1경으로 꼽히는 곳이 따로 있는데 바로 신성계곡이다. 신성계곡에는 안덕면 신성리에서 고와리까지 맑은 천을 따라 '녹색길'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총 길이 12km, 세 코스로 나뉜 신성계곡 녹색길 중 3코스 백석탄길을 걸었다. 1, 2코스에 비해 인적이 드물고 신성계곡의 정수로 꼽히는 백선탄계곡이 있어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기 좋은 길이다.

백석탄계곡의 한적한 풍경

청송의 숨은 속살을 만나러 가는 길

일기예보는 연일 비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우중 산책의 묘미를 모르지 않지만 '비, 비, 비'로 도배된 일기예보를 주시하며 긴장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신성계곡 녹색길 3코스는 안덕면 지소리 반딧불농장에서 고와리 묵은재휴게소까지 4.7km 이어진 길이다. 걷는 내내 1급수 어종인 꺽지와 다슬기가 서식하는 길안천의 맑은 물길을 따라간다. 길 초입에는 길안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는데 비가 연이어 오는 날엔 이 다리가 잠겨 버린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한다면 초입에서 황망히 돌아서야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길안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

다행히도 반딧불농장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 말갛게 열렸다. 징검다리를 퐁당퐁당 건너 청송의 특산물인 사과가 익어가는 과수원길을 지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된 지질 명소에 이르기까지, 청송의 숨은 속살을 만나러 가볍게 길을 나섰다. 내륙의 오지라 불리는 청송 땅의 숨은 절경을 만나러 가는 길인만큼 대중교통 이용이 까다롭지만(이곳을 오가는 군내버스는 하루 단 3대), 버스 시간만 잘 맞춘다면 큰 무리는 없다.

눈 돌리는 곳마다 온통 초록 세상

반딧불농장 마당에 마련된 오두막 쉼터와 3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

반딧불농장 앞 오두막 그날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신성계곡 녹색길 지질 탐방로' 이정표를 따라 건물 뒤편 뚝방길로 내려선다. 길안천 물길도, 병풍처럼 휘두른 산자락도, 사과나무가 빼곡한 농장도 눈 돌리는 곳마다 온통 초록이다. 녹생길이란 이름이 참 심심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이름값 톡톡히 하는구나 싶다.

시골 풍경이 정겨운 뚝방길

뚝방길을 조금만 걸으면 이내 '지소리 돌보'라는 징검다리가 내려다보인다. 길안천을 건너 지소리에서 고운리로 넘어가는 길목이자 이 길의 낭만을 책임지는 인증샷 명소다.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든 서 있는 곳마다 그림이다. 물속에는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인 얼룩새코미꾸리가 살고 있단다. 때 묻지 않은 청정 자연의 날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성큼성큼 징검다리를 건넌다. 거의 도저히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한참 우물쭈물하다 수심이 얕은 곳을 골라 발을 담근 채 가까스로 건넜다. 용케도 비를 피해 왔건만. 날씨와 상관없이 정비가 필요해 보이는 구간이다.

징검다리가 낭만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징검다리를 건너 모퉁이를 살짝 돌자 녹색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반긴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잠깐 오르면 이내 푸릇푸릇한 사과밭이 펼쳐진다. 사과밭 사이로 200m쯤 이어진 농로를 따라 걷는다. 봄에 이 길을 찾는다면 하얀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이 장관이겠다. 가을이면 달달한 사과 향이 코를 찌를 테고, 여름 한복판인 지금은 앙증맞은 초록색 열매가 땡볕에 불그레하게 여물어 가고 있다.

사과가 익어가는 과수원길

울타리도 없이 낯선 객에게 훌쩍 내어준 이 길이 무척 고맙다. 그러니 이 길을 지나칠 때면 사과는 눈으로만 보기를, 얼마 전엔 녹색길 3코스 마지막 구간에도 운치 있는 과수원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길을 걸을 수 없게 됐다.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는 철만 되면 일부 매너 없는 행인들 때문에 농장 주민들이 몸살을 앓았기 때문이다. 부디 이 길마저 막히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1억 2천만 년 세월이 빚은 비경, 백석탄계곡

구독교에 이르니 사과밭과 농로, 길안천이 나란히 이어진다. 종점까지 3.8km 남은 지점에서 길안천 물소기가 발길을 재촉한다. 멀리 풍차가 돌아가는 산자락을 뒤로하고 숲길로 접어들었다.

사방팔방 산자락이 에워싼 길

산길로 들어서는 입구

여기서 잠수교까지는 1.5km쯤 산길이 이어진다. 때때로 덤불을 헤치고 돌부리를 피해가며 걸어야 하는 자연 그대로의 숲길이다. 길안천을 바로 곁에 끼고 걷는 길이지만 숲이 꽤 울창해 바깥 풍경은 좀처럼 볼 수 없다. 마치 이 길이 끝나는 곳에 숨겨둔 보물이라도 있을 것처럼. 오로지 나무와 풀과 길에 집중하며 걸었다. 이따금 물소리에 귀를 열고 발치에 핀 들꽃과 눈을 마주치면서. 슬슬 지루하단 생각이 들 때쯤 계곡 풍경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한다. 숲 바깥에는 시원한 절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울창한 원시 숲길

이따금 눈인사를 건넨 풀과 꽃들

이정표가 곳곳에 있어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이 풍경을 보려고 산길을 돌고 돌아 왔구나싶다. 숲길 막바지에 이를 때쯤 신성계곡 풍경의 백미로 꼽히는 백석탄계곡이 자태를 드러낸다. 바위에 걸터앉아 한가로이 탁족을 즐기는 사람들, 바위에 아예 드러누워 모자를 뒤집어쓴 채 낮잠을 즐기는 사람들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백석탄은 '하얀 돌이 반짝이는 여울'이라는 뜻이다. 옅은 회색빛이 감도는 바위가 기기묘묘한 모양새로 흩어져 있는데 맑은 날 햇빛을 받으면 하얗게 반짝이는 풍경이 장관이다.

여유롭게 탁족을 즐기기 좋은 백석탄계곡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른 계곡 풍경은 더없이 아름답다는데 구름 잔뜩 낀 대낮에 이곳을 찾은 게 못내 아쉽다. 백석탄계곡의 비경은 이곳 고와리 마을의 전설에도 녹아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두곡 고응천 선생이 새벽에 물안개 낀 백석탄 풍경을 보곤 자신이 죽어 천상에 왔다고 착각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바위도 곱고 마음도 고와지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이 마을을 '고와리'라고 불렀다고.

백석탄계곡의 한가로운 풍경

사실 백석탄계곡의 진풍경은 녹색길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있다. 길을 다 걷고 계곡 건너편 930번 지방도로 되돌아오면 "여기는 청송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백석탄 포트홀입니다"라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백석탄, 정확히 백석탄 포트홀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된 청성의 24개 지질 명소 중 한 곳이다. 이정표를 따라 내려가면 1억 2천만 년 세월이 빚은 절경이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다. 백석정이라는 정자도 있으니 먼발치에서 계곡 풍경을 바라보며 한 박자 쉬어가도 좋겠다.

흰 바위가 무리 지어 장관을 이룬다.

백석탄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층리(좌)와 포트홀(우)

푸른 기운 가득한 신록의 길

백석탄계곡 풍경을 실컷 즐기고, 남은 숲길을 완전히 빠져나와 잠수교를 건넜다. 아쉽게도 잠수교를 건너 고와1교까지는 2차선 아스팔트길이 약 1km 이어진다. 인도가 따로 없으니 지나가는 차량을 유의하며 걸어야 한다. 원래 왼쪽으로 이어지던 과수원길이 출입통제되는 통에 코스가 바뀌고 말았는데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먼발치에서 굽이굽이 펼쳐진 계곡 풍경을 탐하는 걸로 위안을 삼는다.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놓인 잠수교

잠수교에서 바라본 풍경

아스팔트길 중간 즈음 위치한 도자기체험장을 지나 고와1교에 도착했다. 다리 아래 뚝방길로 내려서니 드문드문 핀 개망초와 호두나무가 길손을 반긴다. 작은 정자가 놓인 고와쉼터를 지나 종점까지 0.7km 남았음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두 번째 징검다리가 나타난다. 샌들을 챙겨오지 않은 걸 내내 후회했다. 몇 걸음이면 금세 건너갈 만한 돌다리였지만 첫 번째 만났던 지소리 들보보다 수량이 풍부(?)했다. 종점이 코앞이고 이번에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으니 당당히 포기!

종점 구간의 마지막 징검다리

고와1교로 되돌아와 곧장 다리를 건너면 종점인 묵은재휴게소가 지척이다. 묵은재휴게소를 끼고 돌면 아까 건너지 못한 징검다리까지 길이 이어진다. 남은 길을 걷는 동안, 못 보고 지나쳤다면 아까웠을 풍경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신록이 우거진 산 아래 우뚝우뚝 취해 탁 퍼지고 앉아 있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다. 푸르디푸른 기운을 온몸으로 감싸 안고 이만 돌아선다. 걷는 내내 마셨던 청송의 공기, 맑은 물길, 초록빛 산자락들이 한동안 큰 에너지가 돼줄 것 같다.

신성계곡 녹색길의 숨은 절경

숨은 캠핑 명당

쉬어가기 좋은 목은재휴게소 앞마당

걷기 여행 TIP

  1. TIP:
    1. 대부분 평지이지만 산길 1.5km 구간(하천과수원길 종점~잠수교)은 길이 좁고 풀이 우거져 있는 데가 짧은 바윗길이 포함되어 있어 다소 거칠다. 긴 바지와 운동화를 착용하길 권하며 벌레퇴치제를 뿌리고 가는 게 좋다.
    2. 비가 오는 날은 하천이 불어 징검다리가 잠길 수 있으니 걷기를 추천하지 않는다. 맑은 날이라도 징검다리 위로 물이 찰랑거릴 수 있다. 바닥이 미끄럽지 않은 샌들이나 아쿠아슈즈를 꼭 챙겨가자
    3. 산길 구간 외에는 그늘이 없으므로 선크림과 모자는 필수다.
    4. 출발점과 도착점 외에는 중간중간 벤치나 쉼터가 없다. 코스가 짧아 큰 무리는 없지만 필요시 작은 돗자리를 챙겨가자.
    5. 시간이 된다면 신성계곡 녹색길 1코스 초입에 자리한 안내센터에 들러 해설을 들어보길 권한다. 녹색길에 대한 안내 외에도 청송 세계지질공원 신성학습관 역할을 겸한다. 백석탄 포트홀을 비롯해 주변 지질 명소의 신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4인 이상, 5일 전 예약 필수).
  2. 코스 경로: 청송반딧불농장 - 지소리 돌보(징검다리) - 하천과수원길 - 백석탄길 - 백석탄계곡 - 잠수교 - 고와리 도자기체험장 - 고와1교 - 징검다리 - 목은재휴게소
  3. 거리: 4.7km
  4. 소요 시간: 2시간
  5. 코스 타입: 비순환형
  6. 난이도: 보통
  7. 편의시설: 코스 내에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이나 매점, 음식점이 없다. 청송읍이나 안덕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식수와 간식을 챙겨가야 한다.
  8. 교통편
    1. 자가용: 네비게이션 청송반딧불농장 검색(주소: 경북 청송군 안덕면 백석탄로 504)
    2. 대중교통: 서울 동서울터미널 - 청송터미널(1일 5회 운행), 청송터미널에서 안덕터미널로 이동 후 고와리행 군내버스(10:00, 14:45, 18:10) 운행한다. (문의_신성계곡 녹색길 안내센터: 054-873-5116)

글,사진: 강민지 여행작가


"해당 길은 2020년 8월 이달의 추천길로 선정되었습니다."

2020.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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