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논두렁이 눈을 맑게 하고, 우렁찬 계곡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는 길

[여행]by 걷기여행길

첩첩산중에 계곡 소리가 우렁차다. 정겨운 시골 마을 길에는 고개를 우뚝 세운 벼가 바람에 나부낀다. 수염을 기른 옥수수가 가득한 밭, 하우스 안에서는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가 춤을 춘다. 빼곡히 채워져 있는 부드러운 곡선의 고추 끝엔 투명한 아침 이슬을 맺혀있다. 강인한 생명력이 깃든 온갖 작물들을 마주하며 끝없이 길이 이어진다. 때로는 논과 밭을 지나고, 때로는 산을 오른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저수지를 돌아도 본다. 수많은 생명을 마주하고, 새로운 풍경을 지나쳤건만 우렁찬 계곡 소리는 여전하다. 하늘에 닿을 듯 아찔한 높이에서 굽이치며 떨어지는 선녀폭포가 장관이다. 처음엔 생소하기만 했던 이름인데, 걸으면 걸을수록 이만큼이나 잘 표현한 이름이 또 있나 싶다. '감악산 물맞이길', 무더위가 기승인 한여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거창의 안산, 감악산이 품은 명품 길이다.

감악산 물맞이길은 거창군 남성면 매산마을에서 시작해, 신라 헌인왕(857-861)이 흐르는 물에 몸을 씻고,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연수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총 네 개의 코스로 1코스 '물맞으러 가는 길', 2코스 '고행의 둘레길', 3코스 '전망대 가는 길', 4코스 '심신도량하는 길'까지 총 17.6km로 이루어졌다. 해당 여행기는 그중 1코스 '물 맞으러 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다.

  1. 매산마을 가는 방법: 거창 버스터미널에서 남상 방면 버스 승차 후 매산마을 하차
  2. 버스 노선 및 시간 문의: 055-994-3720
  3. 이용 가능한 화장실: 매산저수지 입구, 연수사 주차장, 매산 마을회관

1코스 '물맞으러 가는 길'은 신비의 돌 - 매산마을 - 지게길 - 매산 저수지 - 과수원 길 - 평전다리 - 선녀계곡 - 선녀탕 - 선녀폭포 - 부도 - 은행나무 - 연수사 - 물맞는 약수탕까지 이어지는 약 6km의 비순환형 길이다. 편도 약 2시간 30여 분 정도가 소요되며, 난이도는 보통. 초반부에는 시골 마을 길을 따라 무난하게 이어지나, 중반에 감악산으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든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지만, 공식 코스와 다른 명칭을 사용해 혼동이 있을 수가 있으니 유의하도록 하자. (그럼에도, 이정표가 보인다면 제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정식 코스대로라면 매산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해 길을 나설 수도 있으니, 버스를 타고 연수사까지 단번에 이동한 다음 시작해도 무방하다. 오히려, 연수사에서 시작하면 어렵지 않게 하산하면서 길을 걸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정을 끝내고 난 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도 더 유리하다.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정식 코스대로, 조금 더 편한 길로 다니면서 오롯이 풍경을 감상하고 싶다면 역방향도 고려해 보자.

시골 할머니 댁이 생각나는, 정겨운 전원 마을

매산마을 입구(버스 정류장)에서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걷다가, 상(上) 매산마을에서 마을로 진입하면 본격적인 길이 시작된다.

장마가 기승이다. 이렇게나 일기예보가 틀렸던 때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날씨가 오락가락했다. 덕분에, 두 번을 방문하고 나서야 겨우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첫날 도착과 함께 쏟아지는 폭우에 시작도 하지 못하고 좌절했기에 이튿날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비는 오지 않았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그런데 막상 길을 걷고 보니 안개와 구름으로 인해 첩첩산중의 산자락을 두른 길이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밤새 쏟아진 세찬 빗줄기 때문인지 시골 마을엔 생명력이 넘쳐났다. 한창 자라기 시작하는 청록의 벼는 더더욱 푸른빛을 띠고,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는 아침 이슬을 가득 머금은 채 멋을 뽐낸다. 빗물로 목욕을 한 옥수수수염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초록동색, 세상천지에 싱그러운 초록이 서려 있었다. 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는 계곡 소리가 웅장하다.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에 아침잠이 훌쩍 달아난다.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 사이를 걷다 보니 나에게도 그 생명력이 동화되는 듯했다.

'물 맞으러 가는 길'에서는 물소리가 곧 이정표다. 이정표가 없다면 계곡을 따라 걷고, 계곡이 보이지 않는다면 계곡 소리를 찾아 나서면 된다.

아직 여물지 않았는데도 너무나 탐스러운 전국 제일의 거창 사과.

곳곳에 깃든 아침 이슬이 반짝반짝 별이 되어 눈에 들어온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지는 한여름의 소경.

사과밭을 지나 경사 길을 오르면 다시 아스팔트 도로와 맞닿고, 옆으로 매산 저수지와 연결된다. 저수지 수면에는 감악의 능선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폭우가 쏟아졌는데도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첩첩산중에는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의 매산 저수지는 인근에서 소문난 민물 낚시터이기도 하다. 이따금씩 매산 저수지에서 낚은 물고기 사진을 보면 웬만한 바다 고기 이상의 크기를 자랑했는데 와서 직접 마주하니 결코 거짓이 아니었겠단 생각이 절로 든다.

매산 저수지부터 다음 코스인 평전 다리까지는 약 1.3km가량 아스팔트 도로 구간이다. 도로 끝에 도보가 따로 없는 까닭에 다소 위험할 수 있으니 오고 가는 차들을 최대한 주의하면서 걷도록 하자. 계곡을 완전히 벗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물소리는 끊이질 않는다.

늠름한 자태의 황구에 웃음이 스친다.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에 밤톨이 가득하다. 아스팔트 구간이라고 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중간중간 온갖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연수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타게 될 마을버스.

약 20여 분 정도 걷다 보면 안내도와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계곡으로 이어진다. '물 맞으러 가는 길'의 백미인 선녀폭포까지는 800m, 종점인 물맞는 약수탕까지는 약 2.1km. 거리만 봐서는 언뜻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상하게도 이정표의 거리와는 달리 남은 구간은 멀고도 험난하다. 난이도 '보통', 지금까지는 맛보기였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중간 난이도로 접어들게 된다.

장마로 불어난 계곡길을 따라 좁다란 오솔길이 이어진다. 한여름은 강인한 생명력을 품은 풀 때문에 길이 숨고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밤새 쏟아진 폭우로 땅은 질펀하고, 지천에 널려있는 온갖 수목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야말로 습도 100%. 오롯이 걷기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보니 체력적인 부담도 크다. 덕분에 금방 온몸이 땀으로 젖어 든다. 대신, 사방 천지에 진한 자연의 내음으로 가득하다. 온통 초록의 자연 속에 있는 붉은 다리를 지나니 계곡 소리가 더욱 커진다. 짙푸른 나뭇잎이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계곡 소리를 품는다.

분명 외길을 따라 올라왔건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중간에 길을 놓쳤나 다시 내려가 보지만 역시나 외길이었다. 다시 올라와 공터 끝 수풀 사이를 뒤졌더니 그제야 내리막길이 보였다. 오랜 기간 길을 정비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한여름 강한 생명력을 지닌 초목의 영향이 큰 듯하다.

계곡을 따라 오르막 내리막 경사길이 이어진다.

유난히 거센 계곡 소리의 끝엔 선녀탕이 자리하고 있다. 전국의 이름난 여느 계곡이 그렇듯 감악산에도 선녀와 관련된 설화가 있는데 선녀탕이 바로 그런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칠석날 선녀들이 내려와 노닐다가 폭포수로 몸단장 후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며 승천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선녀가 있을 리도 만무할 뿐 아니라,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는 것조차 허구일 게 뻔하지만, 폭우가 쏟아진 뒤의 선녀탕 계곡 소리는 우렛소리 못지않게 거셌다.

또다시 길이 끊겼다. 이번엔 수풀이 아닌, 폭우로 불어난 물줄기 때문, 트래킹화를 신고 건너기에는 아무래도 물살이 깊어 어쩔 수 없이 신을 벗고 건너기로 했다. 이왕 결정한 거 망설임 없이 훌훌 벗어들고서는 과감하게 발을 담가본다. 얼음을 밟기라도 한 것처럼 시원한 계곡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발만 담갔을 뿐인데 찬물로 샤워를 한 기분이다. 높은 습도로 인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던 터라 이만한 힐링이 또 없었다. 그대로, 계곡 속으로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될 정도로 말이다.

수풀이 허벅지까지 올라와 휴식터마저 가려버렸다.

다소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면 싱싱한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사과밭에 다다른다.

사과밭 아스팔트 도로에서는 선녀폭포 상, 하단을 볼 수 있는 두 개의 전망대로 이어진다.

붉은 다리 한가운데에서 보이는 선녀폭포의 하단부.

그중, 첫 번째는 앞서 만났던 붉은 다리 길로, 선녀폭포의 하단부를 볼 수가 있다. 두 번째 전망대를 보기 전까지는 여기서 보이는 폭포가 선녀폭포의 전체 모습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폭포의 끝자락 중에서도 끝자락이었다. 선녀들이 천상계와 지상계로 넘나들었던 전설이 실감 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폭포, 가뭄 때에는 선녀폭포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약한 물줄기라고 하던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장마 덕분에 그야말로 살아있는 폭포를 영접할 수 있었다.

오르막 계단 전망대에서 바라본 선녀폭포의 상단부.

하단부의 물길도 거셌지만, 상단부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높이도 높이지만 폭도 넓어서 우레만큼이나 웅장한 소리를 냈다. 이렇듯 거친 물줄기를 쏟아지는 폭포의 모습도 장관이지만,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폭포의 모습은 또 다른 경관을 자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본래, 물줄기가 이렇게 강하지 않을 때는 여름철 피서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상단부를 볼 수 있던 전망대 옆 개방 통로부터 본격정인 감악산 산행코스로 들어서게 된다. 폭우로 길이 미끄럽기도 했지만 길 자체도 상당히 가파르다. 거의 60도 이상의 경사면을 약 20분 가까이 올라야 하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거기에, 높은 습도도 발목을 잡았다. 얼마 가지도 않아서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호흡도 점점 거칠어만 갔다. 이름에 들어간 '악'자가 樂(풍류 악)이 아니라, 岳(큰 산 악)인 이유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흩날리던 빗줄기가 완전히 그치고 빛이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기예보에서 오후 3시까지 호우주의보가 예상되었기에 조금도 기대를 하지 않았었기에 나무 사이로 비춰드는 아침 햇살은 한없이 반갑기만 했다. 동시에, 매산마을 어귀에서부터 봐왔던 초록이 또 다른 초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갈림길에 닿으면 가장 먼저 이정표부터 확인하도록 하자.

좌측도 감악, 우측도 감악이다. 앞선 이정표도 그랬지만 이번 이정표도 참으로 애매하다. 일단은 왔던 길 반대 방향으로 걸어본다.

애매한 이정표를 지나고 얼마 가지 않아서 나타난 이정표마저도 애매했다. 코스 표식도 없거니와 공식적으로 표기된 코스의 중간 명칭도 표시돼 있지가 않다. [2.8km 감악산]이라고 표기된 길에서 걸어와 [가재골 주차장 300m]으로 향하면, 약수터를 지나 연수사가 먼저 나오고, 팻말 뒤쪽 [감악산]이라고 표기된 나무 계단을 오르면 1코스의 종점인 '물맞는 약수탕'에 먼저 당도한 뒤, 연수사로 이어진다. 편한 코스는 가재골 주차장이 조금 더 편하지만, 나무 계단을 올라 물 맞는 약수탕을 지나 연수사에 이른 뒤, 가재골 주차장으로 내려와 버스 정류장으로 당도하는 것이 더 진행이 자연스럽다.

앞서 고생했던 급경사와 비슷한 경사길이 또 이어졌다. 게다가, 이번엔 가재골 방면과 2가지 선택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왔기에 길에 대한 확신도 없었기에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카메라를 잠시 넣어두고 발만 보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우거진 수목 사이로 비춰드는 햇살에 이번엔 갈증을 더했다. 시점인 매살 마을 어귀에서부터 이렇다 할 매점이 없어서 식수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온 산이 무거운 습도로 가득한 것과는 달리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 오고, 숨길은 거칠어져만 갔다.

발만 보고 걸었더니 이번엔 각양각색의 버섯들이 눈에 밟혀 든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버섯부터, 언뜻 봐도 독기가 있어 보이는 버섯까지 길 지천에 버섯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식용 버섯이든 독버섯이든 투명한 아침이슬을 머금은 모습이 예쁘기만 했다. 넓게 숲 전체를 바라보는 눈은 이제 숲 곳곳 자그마한 것들을 훑기 시작했다.

수풀로 우거진 길을 지나면, 곧은 기상의 소나무 숲과 연결된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이정표가 보이질 않자 이대로 감악산 정상으로 향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뭐 그래도 상관이야 없었겠지만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언제 또 폭우를 쏟아 낼지가 걱정이었다. 이를 악다물고 마지막 힘을 짜내어 보기로 했다. 폐 속 깊이 숨 쉬고 나서 다시 길을 나서려고 하려는 찰나에 저 끝에 언뜻 이정표가 비쳐들었다, 물맞는 약수탕까지 280m, 앞선 표지판에서 가재골 주차장으로 갔어야 했나 보다. 길은 틀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완전히 틀리진 않았다. 그저 연수사 - 물맞는 약수탕으로 이어지는 길이 반대로 바뀌었을 뿐, 종점이 정말로 코앞이다는 생각이 드니 그렇게 무거웠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사뿐사뿐 나는 듯이 흙길을 밟았다.

잃었던 여유를 되찾으니 다시금 구석구석 숨어있는 생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의 병을 고쳤던, 약수가 흐르는 곳

지병과 중풍으로 고생하던 시라 헌강왕이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목욕하고 난 뒤에 병이 치료됐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 이후, 헌강왕은 감악산 약수의 영험함에 반해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은수사(演水寺)라 불렀다. 물맞는 약수탕의 원전은 연수사 대웅전의 약수 바위에서 솟아나는데 2003년 정비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입구에는 아림욕장(남성 전용), 아름 욕장(여성 전용)이라고 남녀 목인이 미소를 지으며 반기고 있고, 'ㄹ'자 형태의 돌담을 지나면 커다란 고무 통 위로 나무 수로가 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지금은 물길이 흐르지 않고 있었지만, 본래는 시원하고 맑은 청정 계곡물이 끊이질 않고 고무 통으로 쏟아지며, 바가지를 이용해 물을 맞으면 된다. 워낙 날씨가 더워 시원하게 물맞는 상상을 하며 왔건만 전혀 생각지 못하게 물이 뚝 끊겨 있는 상황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며, 마지막 연수사를 향해 발길을 옮겨본다.

물 맞는 약수터에서 연수사까지는 200m가 채 되지 않는다. 연수사로 가는 길목엔 지금까지 봤던 수목과는 전혀 다른 올곧고 짙푸른 나무가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산사에 영험한 기운이 가득 서려 있는지 유독 싱그러웠다. 연수사의 끝이 보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산사에서 불경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길을 돌아서니 편액에 감악산 연수사(居昌 紺岳山 演水寺)라고 쓰인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은 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가옥과 달리 일직선상의 두 개의 기둥 위에 지붕을 얹어 놓은 형태를 뜻하며,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일컫는다. 속세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일주문을 지날 때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씻고, 단 하나의 마음 '일심(一心)'을 가진 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가르침도 담겨 있다. 어려운 공부를 떠나고서라도 사찰의 일주문을 지날 때면 마음이 편해지는 무언가가 있어 좋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된 연수사 은행나무.

일주문 옆으로는 수령이 무려 600년이나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높이 38m, 성인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 7m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 설화에 따르면 고려 왕족과 혼인을 한 여성이 고려가 멸망하여 아들과 함께 속세를 떠나 연수사로 들어올 때 심은 것으로 아들을 그리는 어머니의 애틋한 그리움과 모정이 묻어나 있다. 연수사 자체도 그렇지만 '물 맞으러 가는 길' 구간 곳곳에 재미난 민담 설화가 깃든 곳들이 많아 걷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그 옛날 신라 헌강왕이 마셨을지도 모를 연수사 약수.

매산마을에서 출발 후 약 3시간 30여 분 만에 처음으로 맛보는 연수사 약수, 청정수로 이름난 그대로 물맛이 좋았다. 연수사 아래 약수의 물맛보다 더욱 청량했다. 연거푸 3잔이나 들이키고 나서야 멈추었다. 표주박에 채워진 투명한 물이 그렇게 고울 수 없었다.

깊은 산속에 있는 산지 가람답게 참으로 고요하다. 고색창연한 사찰의 색이 비를 만나 서정적으로 비춰든다. 대웅전에서 흘러나오는 목탁 소리가 경쾌했다. 산새의 지저귐이 음률이 되어 귀를 즐겁게 한다. 길 내내 끊이질 않던 계곡 소리도 여전하다. 연수사 내에 머무는 온갖 생명이 각자의 소리를 뽐내고 있었다.

대웅전 뒤 나지막한 돌계단 끝에 홀로 서 있는 산신각의 모습이 신비스럽다. 세속과 떨어져 마냥 불법의 길만 걸을 줄 알았는데 자연과 동화되어 멋을 내는 법이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다. 넓지 않은 경내를 돌아보는 내내 감탄이 끊이질 않는다. 한여름 촉촉한 싱그러움이 가득 깃듯 초목 사이로 연수사의 색을 눈을 즐겁게 했다.

신선각 내부를 가볍게 돌아보고, 신선각 옆에 우뚝 서있는 거대한 바위로 눈길을 돌린다. 앞서 물 맞는 약수터의 발원이 연수사 내에 있는 약수 바위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이 바위인가 싶다. 실제로도 바위 아래 물길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단순히 폭우로 인해 일시적으로 생긴 물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감히 품을 수 없는 바위의 크기 자체도 그랬지만 언뜻언뜻 비춰드는 청록의 색이 신비스러움을 더했다.

대웅전 옆에는 거대한 종각이 우뚝 서있다.

대웅전 내부를 들여다보며 작은 소망을 염원하는 것을 끝으로 연수사를 나섰다.

연수사를 나와 아스팔트 길로 내려오면 감악산 정상과 버스 정류장이 있는 청연 마을 삼거리로 향하는 길목으로 나누어진다. 정상까지는 2.8km. 이대로 무리를 해서라도 정상을 오를까도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시점 부의 '신비의 돌'을 빼놓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 번만 찾기에는 아쉬운 곳이라 다음 알록달록 단풍이 깃든 때를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연수사 초입의 청연 삼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금 매산마을 어귀로 향했다.

감악산을 내려오니 거짓말처럼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언제 그렇게 폭우가 쏟아지기라도 했던 것처럼 땅이 마른 상태에 쉽게 적응이 되질 않았다. 신비한 안개를 품은 첩첩산중 산자락은 어느샌가 짙푸른 동네 뒷산의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감악산의 맑은 계곡이 흐르는 시냇가 양옆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골 가옥들의 모습이 참으로 정겨웠다. 분명 똑같은 곳인데 아침에 봤을 때와는 달리 포근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새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파란 하늘 아래, 짙푸른 초록의 벼로 가득한 논이 펼쳐져 있는 전원 소경이 눈을 맑게 한다.

신비의 돌은 여정을 시작했던 매산 마을회관에서 약 15분 정도 떨어진 대도암에 있다.

대도암으로 향하는 길목의 전원 풍경, 울타리 하나 없는 길가에 커다란 옥수수가 가득하다. 푸른 옥수수나무 사이로 비춰드는 허수아비가 멋스럽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더운 바람이 귓불을 스치고, 뜨거운 햇살이 전형적인 한여름의 기운을 뽐내기 시작했다. 길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길의 마지막에 다다른 지금까지 여전히 가진 것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풍성해진다.

대도암 경내는 생각보다 더욱 작고 소박했다. 곳곳에 있는 아름드리 화분이 사찰이라기보다는 식물원 같은 분위기를 더했다.

경내 가운데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 눈길이 절로 갔지만 의외로 신비의 돌은 한쪽에 있는 머리통만 한 작은 돌이었다. 대도암 '신비의 돌'은 소원을 들어주는 돌로도 유명한데,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빌며 돌을 들어 올렸을 때 돌이 들리지 않으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같은 돌이지만 소원의 무게가 달라진다. 우여곡절 끝에 힘들게 여정을 마무리한 지금 소원까지 이룰 수 있으면 그야말로 완벽한 여정일 듯하여, 정성스레 3배를 하고 간절하게 소망을 빌며 돌을 들어본다. '으차!!'. 너무 힘을 준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도 큰 소망을 빌었던 탓인지 의외로 가볍게 들려 올려지는 신비의 돌. 간절한 소망은 그렇게 허탕으로 끝이 났다. 어쩌면, 앞서 연수사 이미 소망의 기운을 다 써버렸는지도. 사실, 무엇보다 이렇게 별 탈 없이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소망은 이루어진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걷기 여행 TIP

  1. 코스 경로: 방문자센터 - 선녀탕 - 선녀폭포 - 물맞는약수탕
  2. 거리 : 6km
  3. 소요 시간: 2시간 30분
  4. 코스 타입: 비순환형
  5. 난이도: 보통
  6. 편의시설
    1. 화장실 : 간이화장실 2개소(매산저수지, 선녀탕 아래 산길 시작지점)
    2. 식수: 물맞는 약수탕
    3. 매점: 없음
  7. 교통편
    1. 매산마을 가는 방법: 거창버스터미널에서 남상방면 버스 승차 후 매산마을 하차
    2. 버스 노선 및 시간 문의: 055-994-3720

글,사진: 노성경 여행작가


"해당 길은 2020년 8월 이달의 추천길로 선정되었습니다."

2020.08.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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