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조들이 남겨놓은 보물이 자랑스러운 길, 강릉 바우길 11구산 '신사임당길'

[여행]by 걷기여행길

400여 년 전통의 도배례를 이어오고 있는 전국 유일의 촌장제 운영 마을인 위촌리. 이름이 참으로 정겹다. 부를 때도, 들을 때도 정감 어린 '바우'는 강원도에서 바위를 일컫는 사투리다. 강원도에서는 흔히,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른다고 했다. 바우길은 그러한 친근함이 묻어있는 길로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굽어진 산맥과 강원도 거친 동해바다를 잇는다. 바우길을 크게 강릉 바우길 17개 구간, 대관령 바우길 2개 구간, 울트라 바우길, 계곡 배우길, 아리 바우 길러 이루어져 있으며 총거리는 400km이다.

동해안 걷기 여행길인 '해파랑길', 제주의 '올레길'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트레킹 코스로 손꼽히는 바우길. 그중, 일부인 강릉바우길은 총거리 280km, 17개 코스로 이루어진 길이다. 바우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코스의 백미는 11구간 신사임당길. 무려 44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위촌리 마을에서 출발해, 사임당이 어린 율곡을 데리고 서울로 향할 때 이용했던 '죽헌 저수지길', 보물 165호로 지정된 오죽헌과 조선의 전통 사대부 양반가옥을 대표하는 선교장, 수많은 선인들이 시구를 뽐냈던 경포대, 조선시대 최고의 여성 문인인 허난설헌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필 한 허난설현의 동생 허균을 기념하는 유적공원 등 하나하나가 보물에 준하는 가치를 지닌 전국 명소를 아우르는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탐방로이다.

바우길의 즐거움을 더하는 이정표와 스탬프

갈 곳곳의 적재적소에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준다. 나무 팻말, 빨강, 파랑, 흰색의 리본, 화살표 스티커 등 모양도 제각각이다. 시골마을, 초목이 우거진 산속 숲길, 잔잔한 호수 옆으로 펼쳐진 길을 지나칠 때마다 시선을 잡는 이정표는 어린 시절 보물 찾기를 떠올리게 한다. 많고 많은 길을 걸었지만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이정표를 볼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었다. 무엇보다, 꼭 필요한 곳에 있다 보니 약 18km의 긴 거리를 걷는 동안 단 한 번도 길을 헤맬 일이 없었다.

전국 유일의 촌장제 운영마을 '위촌리'

강릉 시내에서 512, 512-1, 512-2번 버스를 탑승 후 위촌리 송양초교에서 하차하면 시점인 송양초교가 보인다.

풍성한 옥수수밭과 함께 소담스러운 벽화가 그려진 건물을 끼고돌면 본격적인 바우길이 시작된다. 빛바랜 외벽에 철판 슬레이트를 올려 높은 지붕의 건물은 요즘은 보기 힘든 정미소였다. 곡식을 빻는 농촌 전원 벽화가 잔잔한 설렘을 전한다. 정미소 앞에 사거리에 설치된 반사경에 비치는 풍경이 그림 같았다. 쪼르르 달려가서 추억할만한 흔적을 남기고서는 본격적으로 길을 나섰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갈림길에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평화로운 마을에 멍멍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애써 달래보지만 집을 지키는 충견의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양손을 들고 미안한 표정으로 한참을 들여보고 나서야 짓는 소리가 멈췄다. 경계심을 풀고 난 뒤에는 여느 멍멍이처럼 온순하기만 했다. 조용한 마을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아직 여물지 않은 초록의 밤톨에 서려있는 아침 이슬이 참으로 예뻤다.

좁다란 숲길을 지나면 이내 곧 산으로 둘러싸인 농로를 마주하게 된다. 한여름, 완연한 생명력을 뽐내는 벼들이 지천을 매우는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푸르른 초록빛이 바쁘고 복잡한 도심에서 쌓인 눈의 피로를 씻겨냈다. 하늘엔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껴있고, 대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어 몸이 한없이 무겁기만 했지만, 전원 마을이 전하는 진한 자연의 내음은 더없이 반갑기만 했다.

이번엔 귀여운 오리가 그려진 이정표가 길을 안내했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부족할 바우길 이정표의 매력. 길을 걷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올곧은 기상에 짙푸른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숲길은 고요하기만 했다. 사부작사부작 혼자서 걷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 흔한 산짐승의 울음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날씨 때문인지 모두 숨을 죽인 채 휴식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다. 덕분에 싱그러운 숲을 홀로 독차지할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지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특별한 공간에 홀로 서있는 모습을 특히나 좋아한다. 좋은 것은 나누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이 좋지만, 좋은 것을 홀로 독차지하는 것도 여행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오리모양의 그려진 팻말은 정확히는 바우길이 아닌 '올림픽 아리바우길'의 이정표로, 평창올림픽 때 문화 관광 축제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코스다. 총 9개의 코스로 이루어졌으며 그중 9코스가 바우길 11코스와 거의 동일하게 이어진다.

솔잎에 내려앉은 빗방울은 자연이 품은 보석 그 자체였다.

곧 한바탕 쏟아질 것처럼 시꺼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아직도 한참이나 가야 할 길을 남겨두고 있기에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애써 발걸음에 힘을 더했다. 일단은 비가 쏟아지기 전까지 최대한 거리를 줄여볼 수밖에.

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발자취가 남겨진 '죽헌 저수지'

산길을 내려오니 이제는 잔잔한 저수지가 나타났다.

호수만큼이나 넓은 저수지의 이름은 죽헌 저수지, 죽헌동 상류 운정천을 막아 조성하였다. 바우길 초중반에 위치한 죽헌 저수지에서 흐르는 물은 후반부를 대표하는 명소인 경포호로 유입된다. 한바탕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하늘과는 달리 저수지는 잔잔하기만 했다. 호수 표면에 비치는 짙푸른 녹음이 유독 싱그러웠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여름 바람에 잎사귀들이 춤을 췄다. 사르르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는 음률이 됐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어떻게 이렇게 넓은 저수지를 생성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감히 품을 수 없는 규모의 저수지는 인근 262ha의 넓은 농지 면적에 농업수를 제공한다 했다. 죽헌 저수지 주변으로 벼농사도 한창이지만, 저수지 자체는 민물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이름나 있다. 길을 걷는 와중에도 카약을 탄 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과 저수지 한편에서 유유자적 평화를 즐기며 낚시를 하는 사람을 볼 수가 있었다.

죽헌 저수지 인근 전원 풍경은 감동을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꺼먼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만큼은 아무래도 아쉬웠지만, 평화로운 저수지 풍경만큼은 걷는 발걸음에 힘을 더할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 한 발, 한 발 스쳐 지나가는 논밭의 풍경과 갑작스레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백로의 모습이 정겨웠다. 잔잔한 전원 풍경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샌가 5km 구간을 지나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일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진한 흙 내음과 솔내음으로 힐링하다.

죽헌 저수지를 따라 약 30여 분 정도를 걷다가 다시 산길로 들어서게 된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자연의 길에서 흙 내음과 솔나무 내음이 진하게 풍겨 왔다. 흙길을 지나 대로 길로 접어들었는데도 흙 내음은 여전히 진했다. 자연이 주는 건강한 치료제라고 애써 위로하며 하나하나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여정을 이어갔다.

숲길과 시골 마을길이 교차하면서 걷기를 약 1시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은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는 시골마을에 진입하고 나서야 끝났다. 솔나무를 지나, 대나무 숲을 지나고 나니 고즈넉한 가옥 한 채가 눈을 사로잡았다. 담벼락을 넘어 길가로 고개를 내민 붉은색의 배롱나무가 화려했다. 하나 둘 떼어놓고 보면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빛바랜 기와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모습이 묘했다. 오래된 고택은 실제로도 지어진 지가 무려 100년이나 됐었다. 회계 고택이라 불리는 이곳은 현 소유자의 조부가 1919년에 지었다고 했다. 나지막한 계단을 올라 문으로 들어서면 사랑채와 곳간 채가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고, 반대편 대 문간채를 두어 'ㅁ'형을 이루는 형태다. 그 옛날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강원도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57호로 등록되어 있다.

밭과 논에도 온갖 작물들이 풍성하고, 가옥 안에는 수확한 곡식들이 즐비하다. 처마 밑으로 줄을 연결한 뒤, 대롱대롱 매달아 놓은 옥수수가 오래된 추억을 불러온다. 언제 보아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전원의 모습이다. 당장이라도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짐을 풀고 마루에 올라 삶은 옥수수를 먹는 모습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번 여정이 끝나면 시골 마을도 한 번 방문해봐야겠다.

현대식으로 재해석된 한옥마을 '강릉 오죽 한옥마을'

마을을 나와 농로 사이로 펼쳐진 하천 제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내 곧 오죽헌 마을에 당도했다. 오죽헌 담벼락을 앞에 두고 길 반대편으로 현대의 모습으로 재해석된 한옥마을이 떡하니 들어서 있었다. '오죽 한옥마을'이라는 이름의 현대식 한옥 마을은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을 준비하면서 건립된 한옥체험 시설이다. 물론, 숙박업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꽤나 넓은 부지에 가득 늘어선 한옥의 모습이 참으로 멋스러웠다. 오랫동안 세월을 거슬러온 진짜 한옥에 비해 자연스러움은 없었지만, 정돈된 멋이 대신하고 있었다.

사임당과 율곡의 전설이 시작되는 '오죽헌'

5만 원권의 주인공 신사임당과 신사임당의 아들이자 5천 원권의 주인공인 율곡 이이

율곡 이이의 시호인 '문성'을 따서 이름을 지은 문성사

무려 보물(제165호)로 등록된 목재 건물인 오죽헌. 강릉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소로 들어섰다. 바우길 그 자체의 명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무게감을 지닌 오죽헌은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나라의 화폐에 새겨진 인물 중 두 명이 태어난 곳이니 말해 무엇하랴.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은 뒷마당에 검은 대나무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여전히 새까만 색을 품고 있는 대나무들이 가득 심어져 있다. 보물로 지정이 되긴 했지만, 여느 이름난 양반가의 가옥에 비해서는 소박했다. 소박했지만, 가옥 내에 풍겨오는 기운만큼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었다. 자리가 사람이 만드는 건지, 특별한 사람이 났기에 자리마저 기운을 품게 됐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단아하고 정련된 멋이 남달랐다.

담장 너머, 시원하게 펼쳐진 문지방 너머로 비춰드는 고귀한 붉은색의 배롱나무꽃은 바우길을 한여름에 걸어야 하는 까닭이다.

오죽헌부터는 명성이 자자한 명소를 연속으로 지나친다. 선교장, 경포대, 경포 호수 모두 강릉 여행 시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강릉 전체를 두른 바우길 중에서 11코스를 최고로 꼽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실, 전국을 통틀어서도 이렇게 많은 볼거리를 품은 코스는 드물다. 오롯이 길만 걸어도 5시간 이상이 소용되는데 곳곳에 볼거리가 가득하다 보니 실제 소요되는 시간은 그 이상이다. 그렇다고, 길만 걷자니 명소들이 가진 이름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만 하다. 아니, 이름이 주는 무게를 떠나고서라도 눈앞에 펼쳐지는 소경 때문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래나 저래나 결국엔 힘을 내야 할 때.

조선 사대부 양반가옥의 백미 '선교장'

월하문 너머로 보이는 활래정

연못 가득 핀 연꽃과 매롱나무꽃에 둘러싸인 활래정.

오죽헌을 나와 선교장으로 향하는 사이 결국 우려했던 빗줄기가 쏟아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오죽헌과 달리 선교장은 비 오는 풍경마저도 운치가 있었다는 모습은 한 편의 그림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모습에 이끌려 한국 방송공사에서는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함에 있어서 전통가옥 분야에 한국 전통가옥으로 선교장을 선정했다.

선교장 활래정은 한여름 소경을 대표하는 곳 중에 하나이다.

선교장은 무려 99칸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에 의해 처음 지어져 10대에 이르도록 나날이 발전되어 오늘날에 이르렀으며, 1964년 국가 재정 중요 민속자료 5호로 지정되었다. 개인소유의 가옥이 국가 문화재로 등록되는 것만 봐도 얼마나 고귀한 가치가 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짙은 회색빛의 기와와 연못을 가득 메운 연꽃잎에 부딪혀 깨지는 빗소리가 운치 있었다. 사부작사부작 젖은 땅을 밟을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감성을 자극했다. 선교장에서 만난 빗줄기는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선교장을 나서면서부터는 거짓말처럼 빗줄기가 그쳤던 것 마치 꿈을 꾸는 듯했던 선교장을 뒤로하고 다시 여정을 이어 가본다.

선교장을 등지고 좌측 도로를 따라 약 10여 분 걷다 보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초당순두부 맛집들이 모여있다.

오후 4시경이 되어서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메뉴는 강릉의 대표적인 지역 특산물인 초당 순두부.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찜해두었던 식당에 방문해 초당 순두부 백반을 주문했다. 소금이 아닌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한 게 특징인 초당 순두부는 부드러운 순두부의 식감에 자극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짠맛이 특히나 일품이었다. 한껏 땀을 흘렸기에 적당한 소금기가 더해진 음식은 입맛을 자극했다. 호박한 모습의 반찬들은 하나같이 담백하고 정갈했다. 선풍기 바람이 온몸에 젖은 땀을 날리고, 푸짐한 상차림이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고생길 뒤에 찾아온 오감만족 행복감이 온몸에 젖어 들었다.

배부른 포만감에 젖어있었던 그 짧은 사이에 길을 놓쳤다. 일부러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렇지도 않고 눈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 흔했던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 것을 인지했을 때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걸어온 뒤였다. 그렇게 시루봉으로 가는 코스를 건너 띄게 됐다. 다행이라면 이대로 진행을 하더라도 길이 만나게 된다는 것. 16.3km 구간. 완벽할 거라고 자신했던 여정에 아주 작은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관동 8경의 으뜸 '경포대'

본래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였으나 2019년 12월 30일에 보물 제2046호로 승격된 경포대.

강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경포대에 올랐다. 높은 정자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경포 호수의 풍경은 바우길 11코스의 백미였다. 멀고도 먼 여정을 마무리하기에 이토록 알맞은 곳이 또 있을까?? 잔뜩 찌푸린 날씨 때문에 경포 호수의 푸른빛을 볼 수 없는 것이 큰 오점이긴 했지만 가슴에 쌓이는 추억의 모습만큼은 아름답기만 했다. 경포대에 올라 꼭 봐야 할 풍경으로 해돋이와 낙조 그리고 달맞이, 고기잡이배의 야경, 노성에 들어앉은 강문동, 초당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등이 있는데 이를 통틀어 '경포 8경'이라고 불렀다.

여정의 마지막 경포 호수 산책로로 들어서는 길에서 만난 이정표

바다처럼 넓은 호수는 한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이따금씩 뛰어노는 고기들이 수면에 작은 파동을 만들 뿐이었다. 흐린 날씨로 본연의 색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절경을 뽐내는 경포 호수, 둥근 호수의 둘레를 따라 평화로운 산책로가 이어졌다. 산책로를 따라 행복을 실은 자전거가 오고 갔다. 두 손을 꼭 잡고 걷는 연인들의 뒷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산책로 한편에 자란 금낭화가 예뻤다. 갖가지 모양의 이정표는 이곳에서도 멋을 뽐내고 있었다.

경포호는 본래 약 12km 달하는 큰 호수였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흘러드는 토사의 퇴적으로 4km로 축소되었고, 수심도 약 1-2m 정도로 얕아졌다고 한다. 바우길 11코스에서는 경포대에서 연결되는 출입로에서 시작해 산책로의 약 1/4 정도 이어지다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으로 향하게 된다.

강릉시민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전국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여행객들의 쉼터인 경포 호수.

조선 시대 최고의 여성 시인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의 흔적의 따라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으로 들어서기 직전 소나무 숲 한쪽에 위치한 스탬프 박스가 11코스의 끝이다.

길고 길었던 여정의 끝에 위치한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 신사임당에 이어 또다시 여성 위인의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여정을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길을 걷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마저 생길 정도이다.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천재 여성 시인으로 양천 허(許) 씨, 이름은 초희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허난설헌의 난설헌(蘭雪軒)은 그녀의 당호다. 허난설헌은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길 원했다고 한다. 족히 방 한 칸 분량이 되었던 그녀의 시들은 유언에 따라 불길에 휩싸였지만 동생인 허균에 의해 허난 [난설헌집]으로 남겨지게 된다. 이후, 명나라에서 넘어온 사신들에게 일람하였고, 그에 감탄한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 의해 명나라로 넘어가기에 이른다. 놀랍게도 그녀의 시는 중국 본토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 되고 18세기에 가서는 동래에 무역차 나온 일본인에 의해 일본으로까지 전해져 1711년 일본 분다이야 지로에 의해 재간행되는 등 동북아 3국에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성리학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의 자격으로 문인의 천재성을 발견한 유년기. 2명의 아이를 잃고,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한 박복한 결혼생활. 부용꽃처럼 아름다운 27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던 굴곡진 인생과는 달리 기념공원은 고즈넉한 멋이 곳곳에 스며있었다. 여름비를 머금어 싱그러운 생명력을 더한 초목, 유난히 붉은색을 띠는 배롱나무꽃, 문학에 대한 단편의 지식도 없는 방랑자가 보기에도 한 구절 이야기를 펼치고 싶은 곳인데 8살 어린 나이 때부터 천재성을 꽃피운 난설헌은 오죽했으랴.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은 허난설헌 생가터,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전통차 체험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 1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을 마지막으로 여정은 끝이 난다. 길이 길뿐 아니라, 중간중간 경사진 산길까지 있어서 여정이 꽤 험난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이정표 하나만큼은 전국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꼼꼼하게 설치되어 있다는 점. 덕분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또한, 중간중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어 체력에 따라 언제든지 여정을 끝낼 수 있다는 것도 긍정적인 부분이다.

걷기 여행 TIP

  1. TIP: 대중교통 이용 가능 -> 강릉 시내 - 위촌리 송양초교(512번 / 512-1 / 512-2)
  2. 코스 경로: 위촌리 송양초교 -(3.3km)- 죽헌 저수지 -(6.2km)- 오죽헌 -(1.1km)- 선교장 -(2.1km)- 시루봉 -(1.4km)- 경포대 -(2.0km)-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
  3. 거리 : 18.3km
  4. 소요 시간: 6시간
  5. 코스 타입: 비순환형
  6. 난이도: 보통

"해당 길은 2020년 9월 이달의 추천길로 선정되었습니다."


글,사진: 노성경 여행작가

2020.09.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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