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에서 석 달 살기] 고창의 산과 들에서 만날 사람들

[여행]by 쿠키뉴스

고창의 은퇴자공동체마을 입주자 여행기 (1)


40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제주도로 떠났다. 올레 전 코스를 완주하고 숲길과 오름을 걸었다. 퇴직자라 하더라도 1년이나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니 밀려있는 소소한 일들이 꽤 많았다. 그 소소함 속에 바쁘게 여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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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내의 인공연못엔 마름, 수련, 노랑어리연, 부들 등 각종 수생식물과 곤충 등이 관찰되는데 운곡습지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그리고 9월을 맞아 다시 짐을 쌌다. 한 번 짐을 꾸린 경험이 있어 목록을 만들지 않고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 차에 실었다. 뒷자리를 가득 채우고 트렁크까지 빈틈없이 메우고 보니 차가 묵직했다. 혹시라도 잊은 물건이 있으면 다시 와서 가져가면 될 일이니 세심하고 꼼꼼히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고창에서의 석 달 생활 역시 특별한 계획과 함께 시작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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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호수 주변에서 흔하게 보이는 수생식물 중의 하나가 노랑어리연이다. 고창 여행은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다. 제주 1년 여행이 막바지로 향할 무렵 잦은 비와 함께 고사리가 피어올랐다. 비가 그치면 오름 근처에서 고사리 꺾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때 연금공단에서 이메일이 왔다. 은퇴자공동체마을 2020년 하반기 입주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모집하는 지역이 전국적으로 다양했다. 9월 10일부터 12월 10일까지 3개월간 진행하는 고창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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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호수는 1980년대 초 영광의 원자력발전소에 필요한 용수 공급을 위해 건설되었으며 둘레가 약 10km에 이른다. 고창은 몇 년 전부터 자주 찾던 곳이었다. 처음엔 서울 북촌을 걷다가 옹벽에 붙어 있던 짧은 시 한 수를 읽고 찾아왔다. 미당 서정주의 시였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그 때 와서 선운사를 보았다. 평생을 신지도에서 유배상태로 지내며 자기 글씨를 이룬 원교 이광사도 그의 글씨를 통해 만났다. 꽃 때를 맞추어 몇 번인가 와서 동백꽃과 꽃무릇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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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비 갠 뒤 운곡호수의 모습은 마치 거울 같았다. 미당 생가와 그 마을의 골목을 걸었고,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한 미당기념관에서 그의 시를 읽으며 그가 남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친일 행적이 아프게 다가왔다. 안현마을의 벽화를 보고,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손화중이 체포되었다는 재실에 갔다가 고창의 동학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고창은 동학농민혁명이 꽃무릇만큼이나 붉게 타올랐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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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호수가 건설되면서 그 안에서 살아온 많은 주민이 정든 터전을 떠나 실향민이 되었다. 그들은 산 위에 정자를 짓고 호숫가에 고향을 그리는 망향정을 세웠다. 이제는 찾는 이가 많지 않은지 경내는 풀이 무성하다. 고창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 중에 인촌 김성수 선생이 있다. 그의 생가에서 그가 하서 김인후의 후손임을 알았다. 담양의 정자를 다니며 하서의 흔적은 많이 보았지만, 그에 관해 깊이 알아보지는 않은 것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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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가까운 호숫가 솔숲에 들어보니 보춘화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고창읍내의 고창읍성에도 찾아가 보았고 인근에 있는 신재효의 집은 담 밖에서 얼핏 보고 말았다. 고창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읍성인 무장읍성에 갔을 때는 발굴과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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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부터 고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선운산의 선운사 경내에 꽃무릇이 화들짝 피어난다. 영광의 불갑사 역시 꽃무릇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며 남도의 많은 절집이 앞다투어 꽃무릇을 식재하고 있다. 최근 기온 변화와 함께 서울 인근에서도 꽃무릇 소식이 들려온다. 고인돌박물관에서 고인돌이 있는 야산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었지만 수천 년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보며 무장읍성의 수많은 선정비와 송덕비가 가볍다는 생각을 했다. 논이었고 밭이었던 때는 농사에 방해만 되는 이 거대한 돌들이 귀찮았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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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은 꽃대 끝에서 여러 송이의 꽃이 피어 한 송이의 꽃 같은 모양을 만든다. 사십 년 전 영광의 원자력발전소에 쓸 물을 가두는 댐 공사와 함께 이 고인돌공원 너머에 살던 사람들이 살던 집과 논, 밭을 남기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샘솟아 흘러내리던 물과 빗물이 고여 둘레 10 km의 커다란 호수가 생겼고 산골짜기 호숫가엔 사라졌던 풀과 나무가 자리를 잡았다. 온갖 새와 산짐승이 찾아와 이곳의 주인이 되었다. 아직 어느 집 시멘트벽돌 담장이 남아 사람이 살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다시 이곳을 차지한 풀, 나무, 덩굴, 새, 산짐승을 보호하기 위해 람사르습지로 지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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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붉은색 꽃무릇외에도 주황색(좌)과 노란색(우)의 꽃무릇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이 운곡호수 서쪽에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이 함께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이 있다. 은퇴자 부부가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집엔 생활에 필요한 집기가 거의 모두 갖추어져 있어 개인 물품 정도만 가지고 오면 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찾아오기 시작할 때까지 고창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려 한다. 당장은 9월 중순이 지나며 선운사 일대에 피어날 꽃무릇의 붉은 색에 물들어 가을을 맞이할 것이다.

오근식은 1958년에 태어났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2019년 7월부터 1년 동안 제주여행을 하며 아내와 함께 800km를 걷고 돌아왔다. 9월부터 고창군과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마련한 은퇴자공동체마을에 입주해 3달 일정으로 고창을 여행 중이다.
2020.09.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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