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왕국의 낡은 조각들, 그 위엔 꽃이 피었다

[여행]by 매일경제

`옛 아르메니아 왕국` 터키 아니

매일경제

아니는 지금 터키 영토지만 본래 중세 아르메니아 옛 왕국이었던 바그라티드 수도였다.

흑해를 떠나 드넓은 터키 아나톨리아 평원의 깊숙한 곳을 향해 달린다. 차창 밖 풍경은 거친 계곡이 됐다가, 이상한 돌덩이와 나무들이 자라난 구릉이 됐다가 이윽고 황량한 대지가 됐다. 정적만이 가득한 땅 위로 오래된 성벽이 신기루처럼 아스라이 나타났다. 성문을 한 발짝 두 발짝 넘어서자 눈앞에는 1000년 동안 잊혀온 옛 아르메니아의 왕국, 아니(Ani)가 펼쳐졌다.


아니는 터키 동부 끝자락의 국경도시 카르스(Kars)에서도 45㎞나 더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지금은 터키 영토지만 아니는 본래 중세 아르메니아의 옛 왕국이었던 바그라티드(Bagratid)의 수도였다. 아니는 실크로드가 지나는 요충지에서 10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거느린 거대 도시로 성장했고, 그 권위는 당시 콘스탄티노플과 카이로에 필적할 만큼 대단했다. 엄청난 길이의 성벽으로 에둘러진 도시는 수많은 교회와 궁전, 저택을 비롯해 대상들이 묵어가는 사라반 카라이(Saravan Karay) 그리고 수많은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위용을 대변하듯 아니를 부르는 또 다른 말은 '1001개의 교회를 지닌 도시(City of a thousand and one churches)' 또는 '40성문의 도시(City of forty gates)'였다.


아니는 11세기까지 상업 도시로서 황금기를 지나며 찬란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비잔틴, 셀주크 투르크, 쿠르드, 조지아, 페르시아, 몽골 등의 잇따른 침략과 약탈로 인해 아니는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1319년 발생한 대지진까지 겹치며 도시의 운명은 끝을 향해 달려갔다.


17세기에 이르러 아니는 완전히 버려졌다. 모두가 떠난 빈 도시는 그간 아니가 누렸던 영광의 크기와 같은 공허함으로 채워졌다. 수백 년간 유령도시로 방치됐던 이 도시는 20세기 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세상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수많은 전쟁과 대학살, 쿠데타로 점철됐던 아나톨리아 고원의 역사를 따라 이 외로운 땅의 주인은 오스만제국에서 제정 러시아로 영국군에서 터키로 또다시 이리저리 뒤바뀌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니는 아르메니아의 땅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르메니아 공화국에 대한 터키의 공격이 재개됐고 1921년 카르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아니는 완전한 터키의 영토가 됐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라는 비극이 벌어졌고, 절벽 아래 흐르던 아름다운 아쿠리안강(Akhurian River)은 이제 건널 수조차 없는 거대한 국경선으로 변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는 아르메니아 땅은 이제 아니가 더는 속할 수 없는 슬픈 타국이 된 것이다.


같은 해 터키는 자국 영토에서 아르메니아의 거대한 흔적인 아니를 완전히 지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천년을 버텨온 고대 도시에 존재하는 수많은 유적들의 문화적·종교적·건축적 가치는 너무나도 컸다. 이를 알고 있던 터키 동부 전선의 사령관은 끝내 명령을 거부하며 아니는 가까스로 살아남게 됐다.


아니는 수백 년간 소멸로 가득한 역사를 지나왔다. 해서 아니에 있는 것이라고는 잡초 무성한 들판과 철저하게 파괴된 채 이리저리 흩어진 옛 왕국의 낡은 조각들뿐이다. 세월에 무너져 내린 성당들, 절벽에 서 있는 수도원, 빛바랜 프레스코화, 하늘 높이 솟은 모스크의 첨탑, 성벽 위로 펄럭이는 터키의 붉은 국기, 빼앗긴 땅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르메니아의 전망 초소, 국경을 에워싼 차가운 철조망이 아니가 견뎌온 날들을 나지막이 속삭일 뿐이다.


어느 잊혀 가는 왕국을 찾은 여행객이 할 수 있는 것은 쓸쓸하고 처연한 풍경들, 그래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광경들을 덧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아니를 떠나기 전, 반파된 구원자의 교회(Church of the Redeemer) 유적 앞에 선다. 텅 빈 속을 훤히 드러낸 채 일생의 마지막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만 같은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함과 사라져가는 모든 것을 떠올린다. 땅 위에 도시를 지어 올리고, 영광을 누리고, 파괴하고 지켜내고 결국 잊는 것도 오직 인간의 일임을. 이 모든 것들과는 상관없이 폐허 속에서도 꽃들은 어김없이 피어나고, 강물은 경계를 잊은 채 유유히 흐르고, 바람은 자유롭게 나부낄 것임을 생각한다.


글·사진 = 고아라 여행작가

2020.01.1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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