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죽였나

[컬처]by 매일경제

에이미 와인하우스 (가수, 1983~2011)

마지막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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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8일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한 대형 공연장. 가수는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 무대에 올랐다. 관중은 지각 정도는 너그럽게 넘겼다. 멋진 공연을 기대하며 환호를 쏟아냈다. 곧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대에 오른 가수의 표정이 멍했다. 영혼이 빠져나간 인간처럼 비틀거렸다. 공연이 시작되자 가사도 제대로 뱉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마이크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관중은 분노했다. 환호는 야유로 바뀌었고 공연은 중단됐다.


관중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공연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만취 상태로 무대에 오른 가수의 모습이 빠르게 퍼졌다. 전 세계 언론이 이 사건을 해외 토픽으로 다루며 톱스타의 기행을 비난했다. 가수는 유럽투어 첫 번째 국가인 세르비아에서 향후 일정을 접어야 했다. 그때까진 아무도 몰랐다. 세르비아 공연이 이 가수의 마지막 무대가 되리라고는. 두 장의 정규 앨범을 1500만장 팔아치우며 전 세계를 홀렸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여정은 거기에서 끝났다.

망가진 인간과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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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함께 놀이를 하듯 자연스럽게 음악을 시작한 에이미(왼쪽). 사진은 다큐 `에이미`의 한 장면. /사진 제공=더쿱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에 대부분 공감한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도 종종 낯선 순간을 발견한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받고, 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베푸는 호의에 무장해제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신중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길 주저한다. 한 사람에겐 여러 얼굴이 있는데, 모든 얼굴을 사려 깊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세상은 연예인에 관해서는 너무나 많은 말을 무참하게 내뱉는다. 사람들은 판사라도 된 듯 스타의 성격, 태도, 도덕성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애써 외면한다. 세상이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다룬 방식도 마찬가지다. 진한 아이라인, 형형한 눈빛, 깡마른 몸매, 온몸에 새겨진 문신, 파격적인 패션. 미디어가 강조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이미지다. 타블로이드 신문은 에이미에게 스캔들 제조기, 약물 중독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주정뱅이 등 어두운 딱지도 덕지덕지 붙였다. 이 모든 기행에도 불구하고 추앙받을 수밖에 없는 노래 실력을 갖춘 천재로도 여겨진다. 세상은 에이미 와인하우스라는 인간을 단 두 가지 얼굴로 기억하는 것이다. 망가진 인간 혹은 천재. 두 얼굴 사이에 있었을 에이미의 평범한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음반? 그걸 내면 뭐가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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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에이미 와인하우스. /사진 제공=더쿱

에이미는 영국 북부 지역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정에 금이 간 건 에이미가 아홉 살 때다.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가족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을 겪은 에이미는 우울하고 삐딱한 소녀로 성장했다. 에이미는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할머니 신시아는 젊은 시절 재즈 가수였다. 덕분에 에이미의 재능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 신시아는 학교 연극 무대에 오른 손녀를 보며 확신한다. '이 아이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태어났다'.


할머니 권유로 에이미는 런던 예술 명문 학교 실비아 영 시어터 스쿨에 들어갔다. 재능 있는 학생이 모인 이곳에서도 에이미는 유명했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주변 사람은 마법에 걸렸다. 허스키하면서도 또렷하고 또 어딘가 처연한 감정을 전달하는 에이미의 목소리는 몇 초 만에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에이미가 유명해진 이유는 또 있다. 보수적인 명문 학교에서 코에 피어싱을 한 학생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자유분방한 옷차림에 말투도 거칠었던 에이미는 문제아로 찍혔고 퇴학당했다.


학교에서 쫓겨나고도 친구들과 소소하게 그룹을 결성해 계속 노래를 불렀다. 팬이라면 아는 사실이지만 에이미는 노래만 잘 부른 가수가 아니다. 기타를 연주하며 자작곡을 만들고 직접 가사까지 썼다. 에이미는 10대 때부터 틈틈이 공책에 자신의 삶을 반영한 시를 지어 적었다. 그 시를 가사로 활용했다. 다른 사람이 써준 가사를 노래하는 건 사기라고 생각했다.


에이미는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고 노래 부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가수로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천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친구가 음반을 내보라고 권유했다. 에이미는 이렇게 물었다. "음반? 그걸 내면 뭐가 좋은데?". 아무튼 친구는 에이미가 노래하는 모습을 담은 데모 테이프를 음반 기획사에 보냈다. 10대였던 에이미는 얼떨결에 녹음실 들어갔다. 그렇게 1집 'Frank'(2003)가 탄생했다. 재즈와 힙합 감성을 넘나드는 앨범이었다. 평단은 "제2의 니나 시몬이 탄생했다"며 극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에이미의 명성은 영국 안에 국한돼 있었다. 평단의 호평에도 앨범 차트 성적은 중위권에 머물렀다.

아픔의 자서전 'Back to bl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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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 어워드 5관왕 수상 소식을 들은 에이미. 정작 비자 문제로 시상식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사진 제공=더쿱

1집을 낸 직후 에이미는 런던의 펍에서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에이미의 삶이 암흑으로 물드는 순간이었다. 에이미가 만난 블레이크는 속된 말로 약쟁이였다. 연인은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게 영향을 끼친다. 블레이크를 따라서 에이미도 약물에 손을 댔다. 바람둥이였던 블레이크는 에이미에게 쉴 새 없이 상처를 줬다. 둘은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블레이크는 에이미를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여자에게 가버린다.


에이미에게 남은 건 약물 중독과 상처뿐이었다. 2집 'Back to black'(2006)은 에이미가 깜깜한 터널 한가운데 있던 이 시기에 만든 앨범이다. 수록곡 대부분이 블레이크에게 받은 상처로 가득하다. 앨범 제목이기도 한 'Back to black'으로 연인과 헤어진 후 우울의 세계로 돌아가는 자신을 노래했다. 'Love is losing game'으로는 사랑은 처음부터 승산 없는 게임이었다며 담담하게 상처를 수용한다. 얄궂게도 에이미는 아픔의 자서전인 이 앨범으로 기적 같은 성공을 거뒀다. 인기는 미국으로 뻗어 나갔다. 성공한 스타만 출연할 수 있는 미국 토크쇼에 줄줄이 얼굴을 내밀었다. 에이미는 기획사가 오래 공들여 빚어낸 스타가 아니었다. 자신을 포장하는 방법을 몰랐다. 과거의 록스타들처럼 에이미도 직설적인 화법으로 자기 생각을 말했다. 자그마한 체구로 날것의 기운을 물씬 풍길수록 에이미의 명성은 높아졌다.


블레이크와 헤어지고 2집까지 낸 에이미는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약물과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려 재활원을 찾기도 했다. 눈부시게 성공한 에이미 앞에 블레이크가 돌아왔다. 둘은 다시 만났고 이번엔 결혼까지 했다. 블레이크의 영향으로 에이미는 다시 약물에 손댔고 급격히 건강을 잃었다. 영혼과 육신 모두 너덜너덜해졌지만, 인기는 치솟았다. 2008년 미국 그래미 어워드에서 에이미는 5관왕에 올랐다. 당시 에이미는 약물 중독 문제로 미국 비자가 나오지 않아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보수적인 그래미 어워드가 시상식에도 못 온 외국 가수에게 이 많은 상을 안긴 건 미국 음악사에 남을 사건이었다.

지옥으로 변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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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표지에 실린 에이미와 블레이크.

에이미와 블레이크 부부는 미디어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연인의 모습은 생중계 수준으로 전 세계에 퍼졌다. 에이미는 데뷔하기 전부터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얻은 유명세에 대처할 줄 몰랐다. 파파라치 수십 명이 에이미 앞길을 막고 플래시를 터뜨렸다. 에이미의 얼굴은 공포로 뒤덮였다. 겁에 질린 그 얼굴은 다음 날 타블로이드 신문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에이미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가려 보호하려는 듯 진하게 화장했다. 그럴수록 카메라 플래시는 더 번쩍였다. 파파라치를 향한 에이미의 감정은 공포에서 분노로 바뀐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어대는 자들과 몸싸움도 벌였다. 어떤 파파라치는 일부러 에이미를 도발해 선을 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에이미가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수록 세상은 더욱 흥분해서 그 모습을 소비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은 에이미의 노래에 감동했지만, 동시에 망가져 가는 인간을 보며 혀를 찼다.


가십을 다루는 황색 언론만 에이미를 괴롭힌 건 아니다. 전 세계 주류 매체와 주요 인사들은 마치 유행처럼 에이미를 조롱했다. 그 와중에 블레이크는 폭력 사건으로 구속됐다. 에이미와 블레이크는 결혼 2년 만에 갈라섰다. 지옥 같은 사랑이 끝나자 에이미에겐 공허함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려 했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가까스로 약물을 끊었다. 하지만 풍선 효과로 알코올 의존도가 높아졌다. 에이미는 자력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전문적인 치료와 오랜 휴식이 필요했지만 주변엔 스타의 명성을 이용해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로 득실댔다. 필요한 순간에 곁에 없었던 아버지까지 돌아와 가세했다. 매니저를 자처하며 딸은 재활원이 아니라 공연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뛰어난 스포츠 선수도 부상당하면 회복할 때까지 운동장에 투입되지 않는다. 에이미에겐 구원의 기회가 없었다. 병원에 가야 할 사람이 병원 대신 무대에 올라 비틀거렸고 야유를 받았다. 세르비아에서 공연을 망친 뒤 한 달 후에 에이미는 영영 떠났다. 사인은 알코올 중독이었다.

"나는 그저 친구가 필요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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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북쪽에 위치한 캠든은 에이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디 가수들이 모여들었던 과거의 홍대거리 같은 공간이다. 에이미는 캠든의 펍을 전전하며 술을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기분 내키면 술집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 올라 기타를 치며 자신의 인생을 담은 노래를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수만 명 앞에서 노래하는 건 상상만 해도 구토가 나올 정도로 겁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좁은 곳에서 소박하게 노래만 부르기엔 에이미의 재능은 넘쳐흘렀다. 얼떨결에 데뷔했고, 자고 일어나니 전 세계가 자신을 주목했다. 나쁜 남자가 접근했고 그와 함께 무너졌다. 세상은 망가진 천재를 손가락질하며 킬킬거렸다. 에이미를 스타로 만든 곡 'Rehab'에서 그는 "나는 그저 친구가 필요할 뿐이야"라고 노래했다. 마지막 순간 에이미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는 개인 경호원뿐이었다.


에이미의 짧은 삶을 그러모은 다큐멘터리 '에이미'(2015)는 앳된 소녀의 얼굴로 문을 연다. 열네 살 에이미가 친구를 위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한순간 주변이 잠잠해진다. 평범한 노래도 에이미 입을 통해 나온 순간 주술이 된다. 친구와 수다 떨고, 노래 부르고, 샐쭉샐쭉 웃던 소녀는 이제 여기에 없다. 에이미가 저 먼 곳으로 떠나도록 등을 떠민 건 술과 마약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온 세상이 자신의 사생활을 캐내려 덤벼드는 상상을 해보자.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받는 건 어떤 기분일까. 누군가는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것도 스타의 의무라고 말한다. 스타도 실수하고, 상처받고, 두려워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다. 파파라치가 찍은 수많은 사진 속에는 겁먹고, 화를 내고, 소리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는 에이미가 있다. 이 사진을 무심히 소비했던 우리는 거대한 착취 세력의 일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에이미는 떠나기 직전 경호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재능을 돌려주고, 거리를 마음껏 걸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래."


조성준 기자

2020.02.2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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