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뭉크의 '절규'는 그렇게 시작됐다

[컬처]by 매일경제

에드바르 뭉크(화가·1863~1944)

"오늘, 엄마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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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은 서늘하다. 주인공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 앞에서 무서울 정도로 담담하다. 장례식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뫼르소는 꾸벅꾸벅 잠에 빠진다. 장례식에 참석한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엄마 나이를 묻는 장의사 질문에 제대로 대답 못 한다. 관 뚜껑을 열고 마지막으로 고인의 얼굴을 보겠느냐는 제안을 단번에 거절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권태만을 느낀다. 장례식 다음 날 뫼르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인과 데이트를 한다. 며칠 후 뫼르소는 자신을 공격하는 아랍인을 향해 권총을 쏘며 살인을 저지른다. 그는 법정에서 딱히 항변하지도 않는다. 살인 동기로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그랬다"고 말한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살인 사건 전후 맥락보다는 뫼르소의 태도가 화두로 다뤄진다. 그가 엄마의 장례식에서 보인 패륜적인 태도가 공판에 끼어든다. 판사는 부모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청년은 위험하다고 판단하다. 충분히 살인을 저지르고도 남을 인간으로 봤다.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에 전혀 관심 없었다. 그는 애도하지 않았고, 결국 애도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사형선고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어떤 식으로든 엄마의 죽음이 아들에게 영향을 끼친 셈이다. '절규'를 그린 화가 뭉크의 삶을 바꾼 사건도 엄마의 죽음이다. 다만 그는 뫼르소와 달랐다. 뭉크는 엄마의 죽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평생 헤어나오지 못했다.

'절규'에서 비명 지르는 건 인간이 아닌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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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대표작 '절규'(1893) /사진=오슬로 국립미술관

뭉크 대표작은 '절규'(1893)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10점을 꼽아보라"고 누구에게 이 질문을 던져도 답변 안에 '절규'가 속할 확률은 100%다. 해골 같은 얼굴을 한 인간이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괴로워하는 그림이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뒤틀렸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불안, 고통, 절망이다. 뭉크는 1893~1910년에 네 가지 버전의 '절규'를 그렸다. 그중 세 번째 작품은 2012년 경매에서 1300억원에 낙찰되며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술품 지위를 누렸다. 4개 작품 중 2개는 도난됐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출되기도 했다.


훗날 뭉크는 '절규'를 그린 이유를 두고 이렇게 설명했다. "해 질 녘,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다리 난간으로 다가갔다. 친구들은 무심히 걸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그 순간, 자연을 관통하는 무한하고 강력한 비명이 들려왔다." 뭉크의 설명에 따르면 그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이 지르는 비명에 화들짝 놀라 귀를 틀어막고 있을 뿐이다. 뭉크는 왜 친구들이 듣지 못한 자연의 비명을 혼자서만 듣고 괴로워했을까. 의학적으로 추측해보면, 뭉크는 공황장애를 앓았을 수 있다. 심각한 환청에 시달렸을 가능성도 있고, 망상에 쫓겨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런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하늘이 뒤틀리는 공포'는 비유가 아니라 현실의 공포다. 뭉크는 낭만적인 붉은 노을마저 자연재해로 느낄 만큼 불안에 떨었던 인간이었다.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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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죽음을 떠올리며 그린 '병든 아이'(1855~1866) /사진=오슬로 국립미술관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병사들은 금의환향하면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외쳤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는 언젠가 죽을 운명이기에 오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자만하지 말자는 구호였다. 뭉크도 로마 병사들처럼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다. 다만 그에게 '메멘토 모리'는 교훈이 아니라 저주였다.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지 5년 만에 폐결핵으로 엄마를 잃었다. 군의관이었던 아버지는 바빴다. 엄마 대신 그를 보살핀 건 누나였다. 아내를 잃은 뭉크의 아버지는 점점 신경질적인 인간으로 변했다. 집 안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엄마가 떠나고 9년 후 누나마저 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뭉크는 엄마와 누나가 죽은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았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병약했던 뭉크는 자신도 엄마와 누나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이란 공포에 시달렸다. 훗날 뭉크는 삶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내 곁에는 공포와 슬픔과 죽음의 천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놀 때도 나를 따라다녔다. 봄날의 햇살 속에서도, 여름날의 찬란한 햇빛 속에서도 그들은 나를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 잦은 병치레로 학교에 제대로 못 갔던 뭉크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며 우울함을 달랬다. 열여덟 살에 오슬로 미술공예 학교에 들어가 정식으로 회화를 배웠다. 뭉크는 미술 중심지였던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고흐 그림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망가진 내면을 캔버스에 절절하게 기록한 고흐 작품 앞에서 뭉크도 자신의 삶과 감정을 작품 주제로 삼기로 한다. 뭉크 초기작 '병든 아이'(1885~1886)는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병든 소녀가 침대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뭉크는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누나를 떠올리며 그렸다.

성공 후에도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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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의 카를 요한 거리(1892) /사진=베르겐 미술관

1892년 뭉크는 동료 화가의 도움으로 베를린에서 전시회를 열 기회를 얻었다. 뭉크는 작품 50여 점을 엄선해 전시회에 보냈다. 결과적으로 전시회는 난장판이 됐다. 당시 독일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를 물리치고 유럽 강대국으로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했던 독일인들에게 죽음, 절망, 공포를 그린 뭉크의 그림은 저주 같았다. 독일 예술가들과 관객들은 "예술 모독"이라고 외치며 뭉크의 그림을 공격했다.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독일의 진보적인 젊은 예술가들은 뭉크를 옹호했다. 그들은 공포나 절망도 예술이 다뤄야 할 주제라고 주장했다. 독일 예술계가 뭉크를 두고 쪼개질 정도로 후폭풍이 거셌다. 이 소동 덕분에 뭉크의 이름은 유럽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이듬해 뭉크는 '절규'를 그리며 절망과 공포의 화가로 명성을 높였다. 다시 독일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번엔 큰 호응을 얻었다. 뭉크는 독일에 꽤 오래도록 머물며 그림을 그렸고,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유럽에서만 100회 넘는 전시회를 열었다. 미국으로도 진출할 만큼 눈부시게 성공했다. 1908년 노르웨이 정부는 뭉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 했다.


뭉크는 생전 제대로 인정받고 큰돈도 벌었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밝아지지 않았다. 유년 시절 엄마와 누나를 떠나보낸 뭉크는 20대에 아버지도 잃었다. 30대 땐 남동생마저 잃었다. 가족이 하나둘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뭉크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당장 오늘 밤에라도 죽음이 현관문을 거세게 두드리리라는 망상에 시달렸다. 신경증과 불안을 달고 살았던 뭉크는 절망, 절규, 질병, 늙음에 관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라는 공포에 잠식되지 않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게 하는 힘은 결국 사랑이다. 생명보험 가입을 위해 약관을 꼼꼼히 따지는 어른을 상상해보자. 본인이 죽은 후 남겨질 아내, 남편, 자녀의 재정 상태까지 챙겨주고픈 마음은 그 자체로 사랑이다. 뭉크는 사랑을 통해 죽음을 극복할 기회도 날려버렸다. 그의 인생엔 세 명의 연인이 등장하는데, 이들과의 결말은 모두 파국이었다. 뭉크는 여성을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며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에게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외로움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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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1940~1943) /사진=오슬로 뭉크 미술관

뭉크는 마흔 살에 이미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칠 정도로 성공을 거뒀지만, 과실을 누리기는커녕 은둔을 택했다. 그는 오슬로 교외에 넓은 땅을 사들여 그 안에 작업실과 집을 지었다. 그곳에서 홀로 지내며 그림에 몰두했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기도 했고, 어쩔 수 없이 타인을 만나야 하면 일대일로만 만났다. 뭉크에게 작업실 바깥 세상은 고통, 공포, 혼란, 질병으로 가득한 생지옥이었다. 그는 점점 외골수로 변했다.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도 잊어갔다. 하지만 세상은 고독과 외로움을 선택한 뭉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30년대 독일을 장악한 나치 정권은 예술가들을 회유하거나 핍박했다. 히틀러의 입을 담당했던 괴벨스가 뭉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괴벨스는 유럽 예술가들에게 추앙받던 뭉크를 포섭하려고 했다. 그는 뭉크에게 괴테 메달까지 수여하며 공들였다. 하지만 뭉크는 나치에 협력하지 않겠다며 단호하게 맞섰다. 괴벨스는 곧장 공격했다. 뭉크 작품에 '퇴폐 미술'이라는 낙인을 찍고 깎아내렸다. 나치는 독일에 있는 뭉크의 그림을 한데 모아 헐값에 팔아버렸다. 나치의 힘은 나날이 커졌고, 1940년엔 뭉크가 있는 노르웨이까지 침공했다. 뭉크는 나치에게 그림을 뺏기지 않으려고 작품을 농가 깊숙한 창고에 숨겨둬야 했다. 1944년,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뭉크는 드디어 죽음과 마주했다. 폐렴에 시달렸던 뭉크는 80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말년에 나치라는 악령에게 괴롭힘 당한 뭉크가 죽기 직전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었다.


뭉크가 떠난 후 그의 작업실을 정리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거기엔 유화, 석판화, 실크스크린 등 2만여 점의 작품이 있었다. 뭉크는 작품이 팔리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한 점을 팔면 곧장 비슷한 그림을 그려 소장하곤 했다. 그는 왜 자신의 그림을 모으는 데 집착했을까. 뭉크가 세상과 소통을 단절하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지낸 시간은 30년이다. 사람을 피해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낸 뭉크는 아이러니하게도 밤낮으로 라디오를 켜놨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인간의 목소리에 둘러싸여 있을 때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선택했다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다. 뭉크는 세상과 섞이기 힘든 자신을 직시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을 것이다. 뭉크가 그림을 피붙이처럼 여기며 한 점도 놓아주려 하지 않은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었을 테다. 가족이 주는 따뜻함, 우정이 주는 유대감, 연인이 주는 충만함. 이 모든 것에서 배제됐던 뭉크에겐 그림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고 더 아파하는 인간들이 있다. 뭉크가 그랬다. 가족을 잃고 세상에 나 하나만 남았다는 슬픔에서 기어코 벗어나지 못한 뭉크, 그는 절망의 화가이면서 동시에 외로움의 화가다.


조성준 기자

2020.07.2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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