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속에 숨긴 정체성…현대인을 풍자하다

[컬처]by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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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회화 `Camouflage Generation(위장세대)#2`. [사진 제공 = 아라리오 갤러리]

울창한 정글 속에서 눈 2개만 내놓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대부분 어디를 볼 지 몰라 시선을 내리깔거나 감고 있다.


인도네시아 국민 작가 에코 누그로호(43)은 자국의 전통 염색법 바틱과 자수로 짠 화면을 통해 현대 정치 사회 부조리를 풍자한다. 독재자 수하르토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이뤄냈지만,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살아야 하는 국민들의 심정을 드러낸다. 가면에 정체성을 숨긴 사람들은 한 손으로 악수를 청하지만, 한 손 자체가 칼이나 집게여서 누군가를 쉽게 공격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내한하지 못해 지난 1일 서울 아라리오 갤러리 개인전 'Lost in Parody(패러디 속에서 길을 잃다)' 간담회에 영상으로 참가한 작가는 "인도 전통 의상의 다양한 가면을 활용했는데 신화적이고 우화적인 의미가 있다"며 "눈만 내놓고 입을 가린 사람들은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사회를 표현한다"고 말했다. 가면 쓴 얼굴들은 평화 이면에 숨어있는 폭력과 차별, 혼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면 뒤쪽 구석에 하늘과 초승달, 별 등을 수놓아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강조한다. 작가 역시 인도네시아 예술계 희망이다. 2007년 산업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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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회화 A Pot Full of Peace Spells(275x316cm).

밀려 사라져가는 전통 자수 사업을 살리기 위해 장인들과 협업으로 '자수 회화(empoidered painting)'를 제작해 오고 있다. 전통 자수 공동체와 작가의 서로에 대한 믿음이 씨실과 날실처럼 짜여 있는 작품들이다. 작가는 "자수 장인 2명은 2007년부터 지금까지 함께 작업해오고 있다.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의 자수 회화는 서구 식민지 시대 상징인 콜라나 위스키 병뚜껑을 이어 거대한 금속 태피스트리(직물)로 변형시키는 작업에 마을 사람들을 동참시켜 일자리를 창출하는 가나 작가 엘 아나추이(76), 남아프리카공화국 줄루족 여성들과 협업해 구슬 작품을 만드는 미국 작가 라이자 루(51)처럼 공동체에 기여하는 예술이다.


누그로호는 자수 회화를 활용한 작품을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인도네시아관에 전시해 자국 전통예술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다. 자카르타 공항 벽에도 그의 대형 벽화가 걸렸을 정도로 인도네시아 대표 작가다. 자수 계승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전통 인형극을 재해석한 와양 보코르 극단을 운영하고, 어린이를 위한 에코 아트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프랑스 리옹 비엔날레(2009), 부산 비엔날레(2008), 파리현대미술관(2012), 광주 비엔날레(2014) 등 국제 미술 행사에도 초청되면서 세계 미술계에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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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Unity In Hiding(200x200cm).

2013년 국내 첫 개인전 이후 7년 만에 열린 이번 개인전에서는 숲 대신 쓰레기 더미 속에 두 눈동자를 드러낸 신작을 선보였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모아 설치 작품을 만들 정도로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다. 지하 1층에는 자수 회화를 걸고, 2층에는 회화 작품을 펼쳤다. 그는 "원래 서울에서 벽화 작업을 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로 가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젊은 작가 답게 전통 기법에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팝아트적 요소를 접목한 회화들이 눈에 띈다. 만화 강국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역사와 유년시절 유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향이 짙다. 용과 싸우는 기사, 정글 속에 잠복해 있는 피에로와 원숭이에서 만화적 상상력이 발휘됐다. 전시는 11월 14일까지.


[전지현 기자]

2020.09.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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