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풍자'에 동원된 이 그림, 어떻게 미술사를 바꿨나

[컬처]by 매일경제

[죽은 예술가의 사회-69] 에두아르 마네 (화가, 1831~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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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작품 `올랭피아`(1863).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 `더러운 잠`은 이 작품을 패러디했다. /사진=오르세 미술관 소장

더러운 잠

2017년 1월 20일, 한 그림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 걸렸다. 그림 제목은 '더러운 잠'. 국정농단 사태로 위기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이었다. 화가는 침대에 나체로 누워 있는 여성 그림에 대통령 얼굴을 합성했다. 배경에는 침몰하는 세월호를 그렸다. 세월호가 좌초된 후 7시간 동안 대통령 행적은 묘연했다. '더러운 잠'은 대통령의 7시간을 겨냥한 그림이다.


이 그림 한 장에 나라가 들썩였다. 풍자 수위가 문제였다. 대통령을 수호했던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쓴소리가 나왔다. 야당 여성 의원은 성명서를 내며 '더러운 잠' 풍자 방식을 문제 삼았다. 권력자를 비판하기 위해 굳이 벌거벗은 여성 몸을 부각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그림을 옹호한 사람도 있었다. 이 사건은 풍자 전시회를 개최한 야당 의원이 징계받으며 일단락됐다. 대통령은 '더러운 잠' 전시 두 달 후 탄핵당했다.


'더러운 잠'은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 작품 '올랭피아'(1863)를 패러디했다. 150여 년 전에 그려진 '올랭피아'는 출품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더러운 잠'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파리 상류층은 이 그림을 그린 마네를 공격했다. 비평가도 마네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미술사에 기록된 많은 작품 중 '올랭피아'만큼 욕먹은 그림은 없다. 하지만 '올랭피아'는 모든 저주를 이겨냈다. 오늘날 이 그림은 미술사 흐름을 바꾼 혁명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비웃음거리였던 '올랭피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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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 대부였던 모네가 존경한 에두아르 마네.

피카소, 세잔, 모네 그리고 마네

현대미술 역사는 인상주의에서 시작됐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선배 예술가가 수백 년 동안 쌓은 규칙을 폐기했다. 더는 신을 그리지 않았다. 귀족 초상화를 그리는 일도 그만뒀다. 그 대신 지금 이 시대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과 일상적인 풍경을 그렸다. 서양화의 확고한 규칙이었던 원근법과 명암법도 지키지 않았다. 화가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인상주의 화가 대부는 클로드 모네다. 그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낚아채 캔버스에 담았다. 인상주의라는 표현도 모네 작품 '인상, 해돋이'(1873)에서 나왔다. 모네를 중심으로 젊은 화가들이 모였다. 그중에 폴 세잔이 있었다. 세잔도 모네처럼 새로운 회화를 꿈꿨다. 그는 사과를 그렸다. 세잔의 사과 정물화는 기존 그림을 뒤엎는 작품이었다. 세잔은 사과를 좌우, 위아래에서 치밀하게 관찰했다.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사과를 한 캔버스 안에 동시에 그렸다. 원근법에 입각해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던 관행을 깨부순 것이다.


다중 시점으로 그림을 그린 세잔의 실험은 피카소에게 전달됐다. 피카소는 세잔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수십, 수백 개 시점으로 피사체를 쪼갠 후 캔버스 위에 재조립했다. 그렇게 입체주의 사조가 탄생했다. 현대미술은 꼬리를 물며 발전했고 그 기원에 모네가 있다. 이런 모네조차 거대한 산처럼 느낀 화가가 마네다. 모네는 자신과 이름까지 비슷한 마네를 동경했다. 이 남자가 미술계에 일으킨 파장을 부러워하며 자신도 그처럼 혁명가가 되기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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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는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1859)로 처음으로 살롱전에 도전했지만 탈락했다. /사진=글립토테크 미술관 소장

살롱전에서 떨어지고, 모욕을 받았다

마네는 1832년 프랑스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관이었고, 어머니는 외교관 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도 법관이 되길 원했지만, 마네는 공부와 거리가 먼 소년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법관이 될 능력이 없다면 군인이라도 되라"고 소리쳤다. 마네는 해군사관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마네를 예술 세계로 안내한 사람은 삼촌이다. 삼촌은 조카를 데리고 루브르 박물관을 다녔다. 미술 교육을 받도록 화가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마네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아들을 브라질로 향하는 선박에 태웠다. 마네는 16세에 망망대해에 나가 6개월간 항해사 경력을 쌓았다. 육지로 돌아온 마네는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맞섰다. "저는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두 손을 들었다.


마네는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토마 쿠튀르 화실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쿠튀르는 웅장한 역사화를 그린 화가였다. 당시 파리에서 화가로 성공하려면 왕립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살롱전 입상은 필수였다. 모든 화가의 꿈이 살롱전 통과였다. 이 등용문을 못 넘어 목숨을 끊은 화가가 있었을 만큼 살롱전 권위는 막강했다. 마네의 스승 쿠튀르는 살롱전 스타였다.


마네는 쿠튀르 화실에 6년간 있었다. 스승에게 회화의 기초를 배웠다. 하지만 마네는 쿠튀르처럼 역사화를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고리타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네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 마네는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1858)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독한 술을 마신 주정뱅이 남자를 묘사한 작품이다. 거적때기를 두른 이 남자의 발치에는 빈 압생트 병이 나뒹굴고 있다. 어두컴컴한 이 그림은 황량하고 음산하다. 마네는 술집 뒷골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렸다.


1859년 마네는 이 그림으로 살롱전에 도전했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평범한 탈락이 아니었다. 마네는 모욕까지 받았다. "이따위 그림을 살롱전에 출품하다니." 비평가들은 마네를 비난했다. 종교화, 역사화처럼 신성한 그림이 경합하는 시합에 술주정뱅이 남자가 낄 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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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를 유명하게 해준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 이 그림으로 마네는 파리 예술계에서 엄청난 악명을 얻었다. /사진=오르세 미술관 소장

황제마저 고개를 돌린 화가

살롱전에서 탈락하고 비난까지 받은 마네는 낙담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꺾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 파리를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 왜 문제인지 납득하지 못했다. 1863년 마네는 다시 살롱전에 도전했다. 이번에도 탈락했다. 마네처럼 살롱전에서 떨어진 젊은 화가들은 폭발했다. 그들은 보수적인 살롱전이 새로운 형식의 그림을 배제하고, 고리타분한 고전풍 그림만 선택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나폴레옹 3세 황제는 이 분노를 잠재우려고 이례적으로 낙선전 개최를 지시했다. 살롱전에서 떨어진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열어줬다. 낙선전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가 걸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그림이 일으킨 파장 때문에 다시는 낙선전이 열리지 않았다. 낙선전을 찾은 황제조차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보고 "참으로 뻔뻔스럽군"이라며 고개를 돌렸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숲속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 둘과 한 여성이 한가롭게 놀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 작품이다. 문제는 여성이 나체라는 점이다. 마네 이전에도 서양화에서 누드는 흔했다. 다만 그림에 등장하는 나체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다. 비너스처럼 이상화된 신의 몸만이 누드로 그려졌다. 마네는 이 규칙을 깼다. 그의 그림에선 신이 아닌 평범한 여성이 알몸으로 천연덕스럽게 우리를 응시한다. 관람객은 이 그림 앞에서 당황했고 격분했다. "어떻게 이따위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그 당시 사람 눈에 이 그림은 포르노였다. 그림을 훼손하려는 관객까지 있었다. 마네는 자신에게 쏟아진 모욕을 이해하지 못했다. '평범한 인간의 몸을 그렸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비난을 받다니.'


마네는 2년 뒤 또 사고를 쳤다. '올랭피아'라는 그림을 공개해 미술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옷을 입지 않은 여성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그림이다. 이 여성도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서양화 규칙인 원근법조차 지키지 않았다. 이 그림엔 원본이 있었다. 마네는 이탈리아 화가 베첼리오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를 패러디해 '올랭피아'를 그렸다. 파리에서 '올랭피아'라는 이름은 성매매 여성을 지칭하는 은어였다. 마네는 비너스 그림을 가져와서 여신을 뒷골목 여인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 그림에 쏟아진 비난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 이상이었다. 이번에도 외설 논란이 일었다. '이 천박한 그림도 예술이란 말인가.' 상류층 남성 분노가 거셌다. 그들은 이 그림 앞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낮에는 점잖게 예술과 철학을 논하다가 밤에는 돈을 들고 올랭피아를 찾아가는 자신들의 민낯을 들킨 기분이었다. 부르주아들은 마네가 이 그림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더 모질게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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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 베르제르의 술집`(1881). /사진=코톨드 미술관 소장

얼떨결에 혁명가가 됐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로 마네는 파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화가가 됐다. 천박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악명을 떨쳤다. 마네 이전까지 회화의 목적은 뚜렷했다. 그림은 감동이든 교훈이든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마네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그림과 현실은 다르다고 여겼다. 마네는 그림에는 그림만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실을 모사하는 기법인 원근법을 버렸고, 거친 붓 터치도 일부러 다듬지 않았다. 마네는 오래된 규칙을 깼고, 그래서 비난받았다.


마네의 파격을 동경한 젊은 화가 무리도 있었다. 그들은 마네를 보며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환호했다. 대부분 마네처럼 살롱전에서 탈락한 예술가였다. 그들은 마네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마네처럼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그리기로 했다. 그들은 살롱전 도전 자체를 포기했다.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겠다"고 외치며 1874년 자체적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주류 세계에 편입하지 못한 패배자가 모인 전시회였다. 여기에 참여한 화가가 모네, 세잔,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브라크몽이다. 이들은 인상주의 화가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신적 스승인 마네에게 자신들이 마련한 전시회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마네는 거절했다.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인간적인 교류를 했지만, 자신이 그들과 같은 부류로 분류되는 건 꺼렸다. 마네는 아버지가 법관으로서 주류의 삶을 살았듯 자신도 화가로서 제대로 성공하고 싶어 했다. 마네는 꿋꿋하게 살롱전에 도전했다.


마네는 자신을 비판하는 기득권도, 자신을 혁명가로 추앙하는 화가도 이해하지 못했다.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그린 이유는 기득권을 도발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마네는 남성 신사가 입은 정장의 검은색과 나체 여성의 흰 피부가 어떤 조화를 내는지 실험하고 싶었다. 색채에 관한 순수한 실험이었다. '올랭피아'를 그린 이유는 속물적인 부르주아를 고발하려 하기보다는, 향락으로 가득한 19세기 말 파리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쪽에선 반역자, 한쪽에선 혁명가로 불렸다.


마네는 50세에 심한 류머티즘을 앓았다. 합병증까지 덮쳐 왼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후유증으로 51세에 눈을 감았다. 그가 떠난 후 인상주의 화가들이 뭉쳤다. 그들은 돈을 모아 마네의 그림을 사들였다. 이 그림을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려 했다. 인정받지 못하고 떠난 위대한 화가에 대한 추모였다. 콧대 높은 루브르 눈에는 인상주의 화가도, 그들이 가져온 마네 그림도 천박했다. 마네 그림은 문전박대당했다. 세상은 변한다. 20세기 들어 인상주의 화가 위상은 달라졌다. 그들은 회화에 자유를 선사한 영웅으로 존경받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 마네도 재평가받았다. '올랭피아'는 마네가 떠난 뒤 27년이 흐른 1907년 루브르에 걸렸다.


마네는 분명히 반항아였다. 하지만 그의 추종자처럼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의식적으로 세상과 싸운 예술가는 아니다. 마네는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들을 묵묵히 그렸을 뿐이다. '왜 지금 이 현실을 그리면 안 되는가.' '원근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세상이 자신을 비난할 때 마네는 낙담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 인간의 개인적인 신념이 혁명의 씨앗이 됐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 씨앗을 넘겨받아 싹을 틔웠다. 그리고 피카소라는 천재의 붓 끝에서 만개했다. 현대미술은 이렇게 진화했다.


[조성준 기자]

2021.02.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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