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지톡
러시아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하고, 무대 뒤와 객석을 오가며 공연에 관련된 글을 씁니다.
체홉의 희곡 <갈매기>에는 유난히 ‘기억’과 관련된 대사나 행동이 많이 등장한다. 3막에서 니나는 곧 떠날 예정인 트리고린에게 “가끔 저를 기억해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메달을 선물한다. 트리고린은 “기억할 겁니다. 기억하고 말고요. 일주일 전 맑게 갠 그날 당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날 당신은 밝은 색 옷을 입고 있었고, 벤치에는 하얀 갈매기가 놓여 있었지요.”하고 상세한 디테일을 자랑하며 자신이 그녀를 기억할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니나와 갈매기 모두를 잊어버린다. 바로 다음 장면에는 아르카지나와 트레플레프가
장우재 작, 연출의 창작극 <햇빛샤워>에는 한 번 보면 잘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두 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주인공 광자와 그녀의 하숙집 아들인 동교다. 광자는 백화점 의류 파트에서 일하는 말단 종업원으로,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자다. 그녀는 꼬이고 꼬인 자신의 인생이 ‘광자’라는 재수 없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서, 일단 이 이름을 고치는 데서부터 인생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한편 광자가 세 들어 사는 하숙집 아들(정확하게는 양자) 동교는 나눔의 실천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순수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2003년 개봉 당시 저조한 흥행성적으로 몇 주 만에 극장가에서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영화였다. 평론가들은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데뷔작” “20년은 일찍 와 버린 영화” “시대를 앞서간 작품” 등 극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 <살인의 추억> <실미도> <스캔들> 등 강력한 흥행작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냉혹한 시장의 논리 앞에서 <지구를 지켜라>를 지키기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이 작품은 개봉 후 한참 뒤에야 “가장 저평가된 한국영화 중 하나”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등의
2016 두산인문극장으로 무대에 오른 <게임>은 ‘폭력’에 관한 연극이다. 이 작품에는 노골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폭력성과 함께 우리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일상의 폭력,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 폭력의 주체 혹은 대상이 되어 있는 구조적인 폭력이 겹겹으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폭력들은 ‘게임’의 형태로 비춰진다. 극장에 들어가 객석에 앉는 순간, 관객들은 이 흥미롭고 끔찍한 게임의 참가자가 되어 때로는 폭력을 행하는 주체로, 때로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대상으로 기능하는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영국의 작가 마이크
1980년대 영국 북부 셰필드의 한 공립 고등학교. 장난기 많지만 똑똑하고 성적이 뛰어난 8명의 학생들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입시를 준비하며 학업에 몰두하고 있다. 시험이 아닌 인생을 위한 지식을 목표로 하는 문학교사 헥터와 함께 자유롭게 교양을 쌓아가던 그들 앞에 어느날 오로지 입시와 논술, 면접 실력 향상을 위해 고용된 임시 교사 어윈이 등장한다. 날카로운 논리와 전복적인 역사관으로 무장한 어윈의 수업에서 아이들은 지금까지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지식관을 접하고, 헥터와 어윈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기 시작한다. 여기까지의 이
치밀하고 혹독한 훈련 끝에 서울에 남파된 북한 공작원 김기영. 그는 당의 지시대로 대입 시험을 봐서 명문대에 입학하고 대학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했으며, 졸업 후에는 영화수입업자로 일하면서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무런 당의 지시 없이 ‘잊혀진 스파이’로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작스런 당의 지령이 떨어진다. “모든 것을 버리고 24시간 이내에 귀환하라.” 이제 김기영에게 남은 것은 단 하루, 그는 24시간 동안 서울에서의 모든 삶을 청산하고 선택을 내려야 한다. 이처럼 대강의 줄거
최근 연극계에서 그의 이름을 접하지 못한 지 꽤 되었지만, 김지훈 작가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괴물 작가”라는 무시무시한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2004년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고, 이듬해 처음으로 쓴 희곡 <양날의 검>이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에 선정되며 연극계에 첫 발을 디딘 김지훈 작가는 2008년, 연희단거리패 22주년 기념작인 <원전유서>를 통해 단번에 우리 시대 가장 주목받는 극작가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4시간 반의 러닝타임 동안 쓰레기산이란 거대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광대한 사상과 관념을 끝없이 쏟아낸 <원
대학로에 나가면 언제나 수많은 포스터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서 관객들을 기다린다. 대학로를 자주 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아차리겠지만, 한 달 아니 몇 주만 지나도 이 포스터들은 완전히 새로운 공연들로 싹 바뀌어 있다. 관객들은 늘 새로운 이야기에 갈증을 느끼고, 창작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관객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야기의 소비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가운데, 공연들의 공연 주기 또한 점점 짧아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 편의 연극이 20년 동안 꾸준히 공연되면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그 자
백석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시는 역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일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나타샤’라는 이름에서도 연상할 수 있듯, 백석은 유난히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 문학과 인연이 깊은 시인이었다. 영생교보 교사 시절, 함흥의 러시아인 상점을 드나들며 러시아어를 배운 그는 이후 수많은 러시아 문학을 조선에 알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푸슈킨, 숄로호프, 파블렌코, 이사코프스키 등 수많은 러시아 작가의 시, 소설을 번역, 출간하는가 하면 해방 이후 김일성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 강의를 맡기도 했다.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
이것이야말로 인도다! 꿈과 낭만의 땅, 엄청난 부와 엄청난 빈곤의 땅, 으리으리함과 누더기의 땅, 궁궐과 오두막의 땅, 기근과 페스트의 땅… 호랑이와 코끼리, 코브라와 정글의 땅, 백 개의 나라와 백 개의 언어의 나라, 천 가지의 종교와 이백만 신들의 나라, 인류의 요람, 인류 언어의 탄생지, 역사의 어머니, 전설의 할머니, 전통의 증조할머니, 나머지 나라들의 썩어 문드러져가는 태곳적이 그들에게는 겨우 어제인 나라…”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여행기 <적도를 따라가며>에서 인도에 대해 이렇게 썼다. 무슨 설명이 이렇게 장황한가 싶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