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템포와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실, '빛의 제국'

[컬처]by 매리킴
느린 템포와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치밀하고 혹독한 훈련 끝에 서울에 남파된 북한 공작원 김기영. 그는 당의 지시대로 대입 시험을 봐서 명문대에 입학하고 대학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했으며, 졸업 후에는 영화수입업자로 일하면서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무런 당의 지시 없이 ‘잊혀진 스파이’로 살아가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작스런 당의 지령이 떨어진다. “모든 것을 버리고 24시간 이내에 귀환하라.” 이제 김기영에게 남은 것은 단 하루, 그는 24시간 동안 서울에서의 모든 삶을 청산하고 선택을 내려야 한다. 

 

이처럼 대강의 줄거리와 소재로만 보면 <빛의 제국>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스파이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영문도 모른 채 서울에서의 모든 삶을 청산해야 하는 남파공작원과 그의 뒤를 쫓는 알 수 없는 그림자. 단 하루 동안 서울 시내 곳곳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행보는 그 자체로 스릴 넘치는 모험이 될 수 있으며, 김기영의 아내와 딸 역시 그의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극적 요소다. 

 

그런데 소설 <빛의 제국>의 작가 김영하는 이러한 ‘드라마틱한 스파이물’의 특징을 완전히, 의도적으로 비껴간다. 소설은 극한 상황 앞에 선 김기영의 행동이 아니라 그의 생각들, 특히 과거에 대한 그의 기억을 늘어놓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며, 그의 아내 마리와 딸의 하루 역시 각자의 시점으로 제시되지만, 김기영의 하루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평행하게 흘러갈 뿐이다. 처음에는 조금 당혹스럽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작가의 의도가 어렴풋하게나마 와 닿는 듯하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남과 북의 팽팽한 대립,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간첩의 형상을 그려내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간첩’이란 소재를 통해 한 시대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느린 템포와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돌연 남한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게 된 간첩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온 사회에 대해 갑작스런 질문을 던지게 된 한 남자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이념으로 팽배했던 80년대를 남북한 양쪽에서 살아내고 어느덧 이념 부재의 시대를 자본에 함몰된 소시민으로 살아가던 한 남자가 갑작스럽게 ‘일상의 중단’을 선고받고, 그간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사유하는 과정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자 주요 사건인 것이다. 같은 시각,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평소와 다른 하루를 보내는 아내 마리와 딸 역시 각기 다른 삶의 경력과 시점을 가진 이들의 또 다른 사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품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국립극단과 프랑스의 오를레앙 국립연극센터가 공동 제작한 연극 <빛의 제국>은 이러한 원작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무대 위에 구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원작 소설을 대본으로 각색한 발레리 므레장과 연출 아르튀르 노지시엘은 김영하 작가가 ‘간첩’이란 소재를 통해 사회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는 낯설고 건조한 시선을 영상과 마이크, 연기 톤과 템포 등을 사용해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지루할 만큼 느릿느릿 진행되는 극의 템포는 인물들의 기억을 통해 무대 위에 소환되는, 지나간 시대에 대한 사유의 시간을 위한 것처럼 느껴지며, 영상과 무대 위에서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배우들의 연기 역시 극의 흐름에 끊임없이 간극을 만들어냄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그 사이 어딘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느린 템포와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원작 소설에서 딸의 이야기를 들어내고, 오롯이 기영과 마리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무대는 팽팽한 이념 대립의 시대를 북한과 남한, 양쪽 사회에서 살아온 두 사람의 기억을 통해 지나간 시대에 대한 더욱 선명한 대비를 이루어내고 있다. 같은 시대, 서로 다른 사회를 살아온 두 사람의 기억은 매우 다른 양상으로 그려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환멸과 슬픔이라는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정서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편 공연 중간 중간, 반공만화의 대명사였던 ‘똘이장군’ 화면을 배경으로 배우들 각자가 지닌 ‘분단의 기억’을 무대 위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작품의 서사극적 특징을 더욱 강조하면서 관객 각자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자아낸다. 

 

공연정보 | 3월 27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사진제공 | 국립극단 

2016.10.2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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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과 연극학을 공부하고, 무대 뒤와 객석을 오가며 공연에 관련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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