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작가 인터뷰

[컬처]by 맥스무비
'종의 기원' 정유정 작가 인터뷰

한 명의 악인이 서점가를 배회하고 있다. 한유진이라는 사이코패스다. 지난 5월 출간 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정유정 작가의 신작 <종의 기원>은 한유진이라는 전직 수영선수이자 로스쿨 합격생, 그리고 사이코패스 가운데서도 최상위 포식자에 속하는 한 인간의 ‘악인 선언’이다. ‘정유정표 스릴러’ 열풍을 한 번 더 몰고 온 작가를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만났다. 

1.천착하다

<종의 기원>은 한유진이라는 완벽한 사이코패스의 1인칭 소설이다. 작가는 인간이 지닌 악의 근원을 들여다보기 위해 심성의 스펙트럼 가운데 최극단의 악성을 지닌 사이코패스를 택했다 말한다. ‘인간 본성’은 그가 작가로서 천착하는 본질적인 주제다.

 

소설가는 평생 한두 가지의 테마를 변주한다고 해요. 헤밍웨이는 끊임없이 죽음에 관한 테마를 변주했고 찰스 디킨스는 아버지나 가족, 스티븐 킹은 인간 심연에 도사린 공포를 계속해서 변주하거든요. 제 테마는 인간 본성이에요. 선과 악 사이에 긴 스펙트럼이 놓여 있다고 가정해볼게요. 한쪽 끝 백색 지대에는 너무나 착해서 생존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있어요. 때묻지 않고 순수한 사람들은 누군가의 먹이가 되기 딱 좋고 세상 살기가 너무 힘들죠. 반대쪽 끝, 완전히 까만 곳에는 최고의 악이 있어요. 그야말로 사이코패스, 악인들이죠. 양극단을 제외하고 90%가 넘는 보통의 사람들은 회색 지대에 살아요. 저는 검은 어둠 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인간의 본능 속에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 들여다보면 끔찍하니까 피하게 되는 무의식의 심연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이를테면 내 뒷담화를 극심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 직장에 있다고 쳐요. 밤에 혼자 생각하다 보면 어떤 순간엔 죽이고 싶은 상상도 하잖아요. 그러다 소스라치게 놀라죠. 보통 사람들은 생각을 거둬들이고요. 그런데 악성이 점화되서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거기에 궁금증이 많았어요. 왜 하필 사이코패스냐 하면, 최극단의 악에 위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우리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성, 폭력, 육체, 욕망, 증오, 시기 같은 모든 요소들에 머물러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전체 인구에서 2~5%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들이 일으키는 파장은 어마어마하거든요. 강남역 사건, 시화호 토막 살인 사건을 보세요. 파장이 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씀으로써 악의 근원을 살펴보려 했어요. <종의 기원>은 완벽한 악인인 한 사이코패스가 세상에 내놓는 변론이에요.

2.공부하다

잘 알려져 있듯 정유정 작가의 전직은 간호사다. 그가 간호사로 일하던 때인 1994년 ‘박한상 사건’이 발생했다. 백억 자산가의 아들, 부모를 죽이고 방화를 시도하고도 죄책감을 내비치지 않던 살인범이다. 당시 사건에서 받은 충격은 작가에게 정신분석학부터 범죄심리학까지 공부하게 만든 동력이 됐다.

 

박한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코패스라고 불리죠. ‘어떻게 저런 짓을 하고도 멀쩡하지?’ 하는 의문이 제게도 있었어요. 그게 말하자면 (작가로서 악을 탐구하는) 씨앗이 된 거죠. 정신분석학과 정신과 공부를 했어요. 병이 있어서일까 싶었거든요. 프로이트, 융도 공부했는데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진 못했어요. 그래서 진화론과 생물학쪽을 둘러봤어요. 그 다음엔 자연스럽게 진화심리학과 사회심리학으로 범위를 넓혔고요. 그러다 범죄심리학까지 공부하게 된 거예요. 사이코패스가 어떤 사람인가 알기 위해 우리나라의 사이코패스 계보, 100년이 넘는 역사의 외국 사이코패스 기록을 찾아 공부했어요. 보통 사이코패스를 일러 ‘공감의 부재’라고 하지만 아니에요. 공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머리로 이해하는 차가운 공감과, 가슴으로 느끼는 뜨거운 공감이죠. 그들의 차가운 공감 능력은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예민하지만, 뜨거운 공감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남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이해를 못하는 거죠.

3.읽다

작가가 사랑하는 작가는 스티븐 킹과 레이먼드 챈들러다. 스릴러의 대가 킹에게서 서스펜스를, 하드보일드한 문체의 대표 작가 챈들러에게서 문장을 배웠다. 소설가뿐만 아니다. 인간의 악을 탐구하는 그에게 '악의 평범성'을 탐구한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도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는 스티븐 킹이에요. 인간 심연을 뒤집어 보이는 방법, 거기서 오는 긴장, 서스펜스 조성 같은 걸 스티븐 킹한테서 배웠죠. 문장은 레이먼드 챈들러에게서 배웠어요. 챈들러는 필요한 것만 써요. 실용적인 문장이면서 아름다워요. 저도 실용성을 중시해요. 기왕이면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을 쓰고 싶어요. 다른 말로 표현이 안 되고, 한 마디로 한 문단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요. <28>을 쓸 때는 폭력적인 상황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라, 한나 아렌트의 책을 열심히 읽었어요. 평범한 악에 대해서요. 예전에 어떤 책에서 ‘다음 인류는 사이코패스일 것’이란 말을 읽은 적이 있고 가슴이 싸했어요. 요즘 인터넷 댓글만 봐도 이 사회가 타인의 고통에 너무나 무감한 세상이란 걸 알 수 있죠. 세월호 참사가 얼마나 지났다고 유족들한테 욕하는 것 좀 보세요. 귀찮다는 거죠. ‘악이나 무서운 일만 안 보고 싶다’가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은 다 보기 싫다’예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눈 감고 못 보는 것. 그게 바로 악을 만들어요. 선한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는 건 악을 만드는 길이에요. 다음 인류가 정말로 사이코패스가 된다면 매의 집단 속 비둘기는 멸종하겠죠. 매는 자기들끼리 잡아먹고요. 인류가 오래 가지 못해 멸종하겠다라는 생각도 했어요.

'종의 기원' 정유정 작가 인터뷰

4.쓰다

11전 12기. 현재 국내 문단에서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내 심장을 쏴라>로 2009년 세계문학상을 받아 등단하기까지 문학상 공모에서 11번 떨어졌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30대 중반, 직장을 그만두고 6년 동안 소설 쓰기에 매진했다. 떨어지면 다시 보냈다. 그 사이 지금은 절판된, 3권의 장편 소설도 출간했다.

 

소설 하나를 쓰면 서너 군데 공모전에 내잖아요. 다 떨어지고 난 뒤, 어떤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겠다고 제안을 했고 그렇게 장편 3권이 출간됐어요. 성장 소설 <11살 정은이>, 제 유일한 로맨스 소설 <이별보다 슬픈 약속>,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마법의 시간>인데 등단하면서 절판시켰죠. 출판사가 원하는 대로 고쳐준 책이라 약간은 불구적 상태로 세상에 나왔어요. 그땐 책을 내야 견딜 수 있었어요. 저로선 살아남기 위해 썼던 소설들이니, 마음이 아프기도 해요. 얼마 전 <종의 기원> 사인회에서 울컥한 적이 있어요. 한 독자가 사인을 받으려고 책을 주섬주섬 내놓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절판된 책인 거예요. 누군가에게 빌려줬다가 못 받아서 헌책방에서 55,000원을 주고 샀대요. 표지엔 별이 7개 붙어 있었는데, 7번 읽었단 뜻이래요.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독자를 생각하면 행복해요. 내 소설을 기다리는 사람들, 박수 치면서 맞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요. 그러나 방으로 돌아와서 글을 쓰면 괴로워요. 저는 글이 능숙하게 써지는 편은 아니에요. 새로 쓸 때마다 ‘실력이 늘었을까’ 기대하지만 완전한 착각이에요. 전혀 늘지 않아요. 늘 처음 소설을 쓸 때처럼 막막해요. 보통 2년 반 정도 집필하는데 처음 3개월은 초고로 거푸집을 짓는 시간이에요. 손으로 노트에 써요. 석 달 안에 끝내야 해요. 아이디어에도 유효 기간이 있어서, 그 기간이 지나면 가슴 뛰는 게 줄어들어요. 수정 작업부터는 손으로 쓴 걸 장면 장면으로 찢어서 노트북으로 ‘진짜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을 해요.

5.살다

그가 주인공 삼는 사람은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폭력성에 맞서는 인간’이다. 20대 초반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세 동생을 돌보는 데 청춘을 고스란히 바친 작가 자신의 지난 시간에도 ‘운명의 폭력성’이란 말을 붙인다.

 

제가 주인공으로 삼는 사람은 통제할 수 없이 우리 삶 밖에서 다가와 삶을 초토화시키는, 운명의 폭력성에 맞서는 사람이에요. 저만 해도 대학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던 해에 엄마가 편찮으셨어요. 그때 저는 중환자실 간호사였는데, 엄마는 3년 반 동안 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어요. 동생 셋을 저한테 맡기고 가셨어요. 그렇게 제 20대는 동생들을 기르고 돌보는 데 저당 잡혔어요. 돈을 벌고 엄마를 간호하고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면서 20대를 다 보냈어요. 저한테 그런 운명이 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 했죠. 간호대학을 졸업해서 간호사가 되면 내가 돈 벌어서 야간학교라도 엄마가 반대한 국문과를 가야지, 이런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8년의 세월 동안 내 인생을 살지 못했어요. 고꾸라져 죽을 것 같은 고통이었어요. 그런 게 바로 운명의 폭력성이죠. 인간이 그걸 극복하고 뭔가를 해 낼 수 있느냐,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느냐 하는 걸 소설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 차갑고 어두운 땅을 언제 탈출해서 따뜻한 땅에 도달할까’ 하는 심정으로 쓴 게 <내 심장을 쏴라>였고요.

'종의 기원' 정유정 작가 인터뷰

정유정과 영화

영화는 정유정을 사랑한다. 작가는 자신의 장편 소설 네 권을 일러 “<내 심장을 쏴라>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한 이야기, <7년의 밤>은 운명이 던진 변화구에 맞선 한 남자의 이야기, <28>은 죽음의 구덩이에 갇힌 사람들의 생존 투쟁기, <종의 기원>은 악인의 탄생기”라고 말한다. 네 편 가운데 <내 심장을 쏴라>(2015)와 <7년의 밤>(2017년 상반기 개봉 예정)은 이미 영화로 만들어졌고 <28>은 판권 계약을 마쳤다. <종의 기원> 역시 출간하자마자 영화계의 러브콜을 받아 판권 계약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영화의 작가는 감독이니, 원작자라고 해도 간섭을 전혀 안 한다는 것이 정유정 작가의 원칙이다. “영화 문법을 잘 모르는 데다, 소설 쓰는 일만으로도 너무나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 가지는 꼭 지켜달라고 제작진에게 당부한다. 제목을 바꾸지 말 것, 그리고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식의 분위기 전환을 하지 말라는 요청이다. 작가가 직접 짓는 제목은 곧 주제를 함축하고, 전반적인 분위기는 주제 의식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최근 <7년의 밤> 크랭크업 기념 파티에 참석했다가 “장동건 인생 최고의 연기가 나왔다”는 제작자의 들뜬 전언에, 평소 영화를 잘 보지 않는 작가이지만 기대가 커졌다. 최현수 그 자체라는 류승룡과, 인생 연기를 보여준 장동건의 <7년의 밤>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의 추창민 감독이 연출했다.

 

글 박보미 | 사진 김현지

2016.07.11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영화로 꿈꾸고, 영화로 소통하는 진짜 영화 관객을 만족시킬 단 하나의 영화 월간지
채널명
맥스무비
소개글
영화로 꿈꾸고, 영화로 소통하는 진짜 영화 관객을 만족시킬 단 하나의 영화 월간지

    Copyright © ZUM internet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