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와 함께 걷기

[컬처]by 맥스무비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의 움직임에 숨겨진 비밀을 찾기 위해 <곡성>과 <부산행>의 감염자 움직임을 연출한 박재인 안무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감염자는 ‘좀비’와 조금은 다르지만, 한국에서 가장 비슷한 움직임을 창조한 안무가 아닌가. 2시간 동안 박재인 안무가의 손에 이끌려 허우적거리면서, 세상의 모든 ‘좀비’ 배우들을 향한 존경심이 샘솟았다.

좀비와 함께 걷기

<맥스무비 매거진> 7월호 특집 주제가 ‘좀비’로 정해졌고, 나는 좀비가 돼야 했다. “자네가 합시다.” 편집장은 말을 이었다. “이 기획은 기자가 직접 움직임을 배우고, 시연하는 과정을 글과 영상 콘텐츠로 만드는 겁니다.” 나는 몸치다. 온 몸이 거의 통나무에 가깝다. 다른 사람들은 허리를 숙였을 때 손끝이 발끝에 닿는다는데, 나는 상상도 안 된다. <곡성>도 봤고, <부산행>도 봤다. 영화 속 감염자들의 움직임은 내게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고난도 동작일 것이다. 평생 ‘각’ 하나 붙잡고 살아온 내가, 좀비와 함께 무너지게 생겼다. 눈치를 보던 나는 딱 한 마디 했다. “괴물 가면을 쓰고 해도 되겠습니까?” 이 말, 목숨 걸고 했다. 다행히 “괜찮을 것 같다”는 답을 들었다. 나의 자존감을 지킬, 한 줄기 희망이었다. 박재인 안무가의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공기가 건조하고, 차갑다. 내 마음이 그래서 그렇게 느꼈나 보다. “안녕하세요? 기자님인가?” 박재인 안무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노란색 머리와 멋지게 그을린 피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짓는 박재인 안무가에게서 압도적인 ‘포스’가 느껴졌다. 왠지 내가 오늘 온 몸이 부서져 죽더라도, 움직임을 마스터하게 될 것만 같다.

 

박재인 안무가는 연습에 들어가기 전, 영상을 보여주겠다며 컴퓨터를 켰다. 파킨슨 병 환자들이 걷고 움직이는 모습이 담겨 있다. <부산행>에서 움직임을 연출할 때, 참고한 영상이라고 했다. “잘 봐두세요.” 박재인 안무가가 당부했다. 현실에 존재하는 움직임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1단계 스트레칭

움직임을 배우기 전, 온몸의 근육을 스트레칭으로 풀어야 한다. 좀비들의 움직임은 뻣뻣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근육의 힘을 풀고 늘어뜨린 상태에서 최소한의 부분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칭이 굉장히 중요하다. 특히 팔과 목을 꺾은 채로 격렬하게 움직이면 부상을 당할 수 있어서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이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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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풀기가 시작됐다. 스튜디오의 사방을 둘러싼 거울은 나의 통나무같은 몸이 삐걱거리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기획 취재에 도움을 준 스태프들도 사방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뻣뻣한 몸이 더욱 경직됐다. 박재인 안무가는 친절하게도 “다칠 수 있다”면서 내게 매트를 깔아줬고 본인은 마룻바닥에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겨우 어깨를 풀고 목을 푸는 단순한 동작을 하는데도, 부끄러움과 민망함, 창피함이 용솟음쳤다. 그때 박재인 안무가가 말했다. “감염자가 되러 오셨죠? 딱 세 가지만 명심하세요. 의식대로 움직이지 말 것, 사람의 소리를 내지 말 것,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지 말 것. 감염자는 의식이 없어요. 사람이 행동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이 세 가지를 포기하지 않으면 감염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몸만 기괴하게 움직이면 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연기는 언제나 정신이 먼저다.

2단계 일어나기

몸을 일으킨다는 의식을 하지 않으면, 몸의 어느 부위부터 힘을 줘서 일어나야 하는지 막막해진다.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크다. 선 자세 역시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상체를 늘어뜨리면서도 다리로 몸을 지탱하는 것이 어렵다. 박재인 안무가의 시범이 모범 답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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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됐다. 감염자의 움직임은 총 세 단계. 첫 번째는 일어나는 자세, 두 번째는 걷는 자세, 세 번째는 자극에 의해 달려드는 움직임이다. 엎드렸다 일어나는 게 뭐가 어렵겠냐고 생각했지만, 정말 어렵다. ‘몸을 일으킨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일어나야 한다. 주변을 의식하고 있는 내 동작이 자연스러울 리 없었다. 엎어졌다 일어나기를 수 차례, 의식을 버리면 몸이 축 늘어져 무겁다. 내 몸의 어느 부위부터 힘을 줘서 일어나야 하는지 막막하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 일어나는 아이처럼, 막막했다. 결국 지쳐서 바닥에 쓰러졌다. 일어나는 자세가 이렇게 어려우면 걷고 뛰는 건 어떡하나, 나는 움츠러들었다. ‘재미있는’ 영상을 찍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온 내가 부끄러웠다. 분수도 모르고,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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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걷고 뛰기

선 상태로 다리를 움직이는데 몸의 무게를 실어서 툭툭 다리를 떨어뜨리며 걷거나, 약간 발을 끌면서 걷는다. 영화 속 상황과 감염자의 연령대, 성별에 따라 걷는 동작도 다르다. 나는 20대 남자 버전으로 걸었다. 뛰는 동작은 더 고난도라서, 흉내도 못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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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동작과 뛰는 동작을 분명히 배웠다. 어느샌가 박재인 안무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매달리고 있었다. 박재인 안무가가 당부한 세 가지 원칙은 지킨 것 같다. 일단 의식이 사라졌다. 줄곧 박재인 안무가의 동작을 따라한 것 같은데, 머리 속에 아무런 배움의 기억이 없다. 너무 못 하는 내가 부끄러워서 의식이 사라진 것 같다. 사람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박재인 안무가가 내 뻣뻣한 몸의 각을 잡아주고, 스트레칭을 해 줄 때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건, 사람의 소리 같지 않은 ‘으으으으으으~~’하는 괴상한 신음소리였다. 마지막으로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내 보잘 것 없는 움직임을 열정적으로 촬영하는 포토그래퍼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동영상 에디터와 그 외의 스태프들의 눈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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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존경하기

호기롭게 “가면을 쓰겠다”고 했지만, 가면은 쓰지도 못했다. 가면은 잘 배워서 근사하게 움직일 때 쓸 생각이었다. 연습 과정만 하는 데도 내게 주어진 취재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모든 사진과 영상에는 맨 얼굴로 출연하게 됐다. 모두 내 탓이다. 30년 간 말보다 몸으로 더 많이 얘기해왔을 박재인 안무가는 사람의 몸을 보는 데는 ‘반 무당’이다. 내가 첫 동작을 했을 때, 그녀는 이미 내 몸의 상태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를 ‘대충’ 가르치지 않았다. 기초부터 고급 동작까지, 정통으로 가르쳤다. 그는 프로다. 비록 감염자의 움직임을 잘 배워오진 못했지만, 나는 이 교습을 통해 사랑하는 일을 대하는 전문가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배웠다. 박재인 스승님께 감사 드린다.

 

글 양보연 | 사진 오건

201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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