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부채길을 아시나요?

[여행]by 머니투데이
강릉 부채길을 아시나요?

부채길 입구에서 바라본 심곡항 풍경./사진=이호준 여행작가

그동안 여행기나 칼럼을 통해 국내의 여러 길을 소개했지만, 이 길처럼 나를 사로잡은 길은 드물었다. 게다가 이 길은 평소에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공적으로 만든 길'이었다. 그런데도 왕복 5.7㎞를 걷는 내내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강원도 강릉의 심곡에서 정동진까지 해변을 통해 이어진 '부채길' 이야기다.


부채길을 찾아간 날, 아침 날씨는 선선하고도 상쾌했다. 내가 선택한 건 심곡에서 정동진으로 가는 코스였다. 어차피 대개 왕복하기 때문에 어느 쪽에서 출발해도 상관없다. 워낙 일찍 찾아간 터라 내가 첫 입장객이었다. 부채길은 오전 9시부터 입장이 가능하다. 다른 길과 달리 입장료도 받는다. 성인 3000원. 길을 걷는데 무슨 돈까지 받는담?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하지만, 일단 걷기 시작하면 그 소리가 쏙 들어갈 수밖에 없다.

강릉 부채길을 아시나요?

부채길에는 이런 길이 계속 이어진다./사진=이호준 여행작가

입구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먼저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누구든 여기서부터 감탄사가 터진다. 아! 이 아름다운 풍경이라니. 바다는 청자색으로 빛나고 수평선 위에는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닷물은 얼마나 맑은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지중해니 카리브해니 아름답다는 바다를 여러 곳 찾아다녀봤지만 조금도 뒤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걷기 시작한 뒤에도 바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파도소리에 발 맞춰 걷는 길이었다. 길은 대부분 철제구조물(구멍 뚫린 철판)로 이뤄져 있다. 원래 군인들이 해안경계를 위해 오가던 벼랑길 위에 인공구조물을 설치한 것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든 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입장료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길 왼쪽으로는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철조망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그 위로는 절벽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었다. 천연기념물 제437호로 2300만 년 전 지각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라고 한다.


절벽의 바위틈에는 때 이른 구절초가 수줍게 피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심곡이라는 마을이 헌화가의 배경이 된 곳 아니던가. 신라인들이 불렀다는 옛 노래가 저절로 생각나게 하는 풍경이었다. '자줏빛 바위 가에/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신라 향가 헌화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성덕왕 때 강릉 태수로 임명된 순정공이란 이가 부인인 수로부인과 함께 강릉으로 부임하는 길, 절벽에 철쭉꽃이 피어있었는데 수로부인이 그 꽃을 갖고 싶어 했다. 그때 암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꽃을 꺾어서 수로부인에게 바치면서 불렀다는 노래가 헌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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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바다를 가득 메운 윤슬./사진=이호준 여행작가

그때의 정경을 상상하며 다시 길을 걸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간질이면서 걸음은 더욱 가벼워졌다. 부채길은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는 길이다. 길이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감안한 것인지 중간중간 벤치를 놓아서 쉬어갈 수 있게 해놓았다. 벤치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맛은 특별했다. 구름 속에 있던 해가 얼굴을 내밀면서 은빛 윤슬이 바다를 가득 장식했다. 세상의 보석을 모두 뿌려놓은 듯 황홀했다.


한참 걷다가 큰 바위 하나와 만났다. 길가에 있는 안내문을 보니 부채바위란다. 심곡의 서낭당에는 여서낭 세 분이 모셔져있다는데 그에 대한 전설이 얽힌 바위였다. 옛날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바닷가에 나가보라는 말을 듣고 나가봤더니 여서낭 세 분이 그려진 그림이 떠내려 오고 있었단다. 그래서 서낭당을 짓고 모시게 됐는데, 아직까지 그림의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도 있었다. 지금부터 200년 전에 이 씨라는 노인의 꿈에 여인이 나타나 함경도 길주에서 왔다면서 "내가 심곡과 정동진 사이의 부채바위 근방을 떠내려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씨 노인이 이튿날 새벽 나가보니 바위 끝에 나무 궤짝이 있어서 열어보니 여자의 화상이 그려져 있어서 이를 안치해 두었다. 그 뒤 이씨 노인은 만사가 형통했다. 얼마 후 서낭당을 짓고 그림을 모셔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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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을 품고 있는 투구바위./사진=이호준 여행작가

길을 걷다 만나는 전설은 걸음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는지. 풍경에 상상이 더해지면서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된다. 조금 더 걷다가 또 하나의 전설을 만났다. '투구바위와 육발호랑이 전설'인데,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바위가 투구를 쓴 장수의 모습이어서 생긴 전설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과 발가락이 여섯 개인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였다. 안내문을 읽고 다시 바위를 보니 정말 투구를 쓴 장수 앞에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과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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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쪽 종점./사진=이호준 여행작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다 보니 절벽의 끄트머리쯤에 흰색 범선이 보였다. 드디어 정동진에 도착한 것이었다. 3㎞ 가까운 길을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걸었다. 길의 끝머리쯤에 부채길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부채바위가 있어서 부채길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정동진의 '부채 끝' 지형과 탐방로가 위치한 지형의 모양이 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과 같아서 '정동심곡바다부채길'로 이름 지었다는 것이었다.


그쯤에서 길은 바다를 등지고 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숨이 가쁠 무렵 정동진 쪽의 시작점이 나왔다. 잠깐 나가서 차를 한잔 마신 뒤, 다시 차를 두고 온 심곡까지 되짚어 걸었다. 정동진까지 갈 때는 곳곳에서 해찰하느라 한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돌아가는 길은 40~50분이면 충분했다. 절경이 끝없이 펼쳐진 해안길에서 시간조차 잊고 걸었던 한나절이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8.09.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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