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에 성폭행 가해자 주소까지 알려줬는데"…7년만에 열린 재판

[트렌드]by 머니투데이

[the L] [그일, 그 후] 검찰 '출국금지' 안해 가해자 美 출국…법정서 '난도질' 당하는 피해자

"검찰에 성폭행 가해자 주소까지 알려

"7년 동안 그 일을 담고 있어야 했어요. 그 사람은 뉘우치기는 커녕 말도 안되는 말을 지어내고, 그로 인해 전 더 충격을 받았어요. 자기가 한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처벌을 원합니다."


성폭행 피해를 신고한 지 7년만에 열린 재판에서 증인석에 선 피해자 김민진씨(33·가명)는 말했다.


민진씨는 지난 2011년 지인에게 아르바이트를 소개받으며 미국 교포인 유모씨(64)를 알게 됐다. 업무차 만난 자리에서 유씨는 민진씨를 성폭행하려했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민진씨는 쓰러져 전치 2주의 뇌진탕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깨어나 겨우 도망친 민진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검찰 '출국금지' 안해…가해자, 미국으로 출국

수사 끝에 검찰은 2013년 3월 유씨를 강간치상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민진씨는 교포인 유씨가 미국으로 갈 것을 우려했지만, 검찰은 유씨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하지 않았다. 민진씨는 "미국으로 도망을 갈 것 같아서 담당 형사에게 출국 금지 신청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가해자의 변호사가 성실히 재판을 받겠다고 약속했다며 느긋하게 일관했다"고 말했다.


아니나다를까 유씨는 첫 재판이 열린 날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미국으로 출국한 뒤였다. 이후 두 번의 재판이 열렸지만, 유씨는 법정에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재판은 멈췄다. 유씨는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진씨는 "담당 검사에게 미국과 한국은 범죄인 인도조약이 돼있으니 범죄인 인도 신청을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후 검사가 신청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역시 별다른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민진씨는 직접 유씨를 찾아 나섰다. 지인을 통해 유씨의 미국 거주지를 찾아 담당 검사에게 전했다. 민진씨는 "미국 거주지를 개인적으로 알아내서 검사실에 알려주기도 했는데, 이후에도 다른 연락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5명 이상의 검사가 거쳐갔지만 담당 검사 이름이 바뀐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른 올해 초, 민진씨는 지인을 통해 유씨가 미국 FBI(연방수사국)에 의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민진씨는 "그 사람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담당 검사실에 물어보니 모른다고 했다"며 "영문을 몰라 기다리던 중 가해자의 부인과 회사 직원이라는 사람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용서해달라' '합의하자'며 연락을 해서 정말 잡혔다는 걸 알게됐다. 미국 FBI가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중·노년 남성만 봐도 모욕감…사회생활 힘들어"

다시 담당 검사에게 연락을 했다. 검사는 그제서야 재판 날짜가 잡혔다고 알려줬다. 민진씨는 직접 증언을 하지 않으면 모든 증거가 쓸모없게 된다는 검사의 말에 직접 법정에 출석하기로 했다. 재판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민진씨는 법정에 증인으로 서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돌아온 민진씨는 지난 7년간 잊으려고 노력했던 일을 법정에서 다시 떠올리고 설명해야 했다. 민진씨는 "묻어놓고 잘 살려고 했는데 다시 기억이 생생해져 잠도 잘 오지 않았다"며 "거기다 가해자는 말도 안되는 진술을 하고 변호사는 그 말을 듣고 심문을 하는데 기가 막혔다"고 했다.


7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이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민진씨는 법정에서 말했다. 민진씨는 "사건 이후 중년 남성이 길을 지나가기만 해도 얼굴이 찌푸려지고 눈을 안 마주치려 고개를 숙이게 되고, 당시에는 앞에 중년 남성이 있으면 멀찍이 돌아서 다녔고 6개월 간 집에만 박혀있었다"며 "이후 회사에 입사해 중·노년 남성들과 함께 일을 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그들이 말을 거는 것도 싫고, 자꾸 피하게되고, 모욕감이 들어 사회생활을 하기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시간이 지나며 팔에 든 시퍼런 멍은 사라졌지만, 민진씨의 머리 속에 남은 수치감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유씨는 법정에서 자신보다 서른한살 어린 민진씨와 이미 수차례 성관계를 맺은 연인사이였고, 평소 민진씨가 성관계에 더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사건 당일에도 성관계 합의가 있었다고, 민진씨 혼자 넘어져 다친 것이라고, 확실하진 않지만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고, 취업을 시켜주지 않자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음모를 꾸민 것 같다고 주장했다. 민진씨와 어떤 체위로 성관계를 했는지까지 주장한 유씨는 '연인 관계였다면, 연인관계에서 할만한 대화를 나눈 내용이 생각나는 것이 있느냐'는 판사의 질문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다 "민진씨가 태권도 유단자라고 했다"고 말했다.

"법정서 난도질 당하는 피해자"

태권도를 배운 적도 없는 민진씨는 도대체 유씨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민진씨는 "어떻게 연인관계였고 성관계를 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고 황당했다"며 "일 때문에 밥을 몇 번 먹었다고 연인관계라는 것인지, 순간순간 지어내 말하는 것 같은데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하고, 이를 근거로 피고인 변호사가 질문하는 내용들 하나하나가 모욕적이었다"고 했다.


유씨가 민진씨와 '연인관계'를 주장하는 사이 유씨의 부인은 민진씨에게 연락해 '용서'와 '합의'를 요구했다. 민진씨는 "유씨의 아내가 '미안하다' '용서해달라' '잊어 달라' '만자자' 합의하자' 등의 메신저를 보냈는데 응답하지 않았다"며 "이는 유씨의 아내가 할 얘기도 아니고 사과를 할 사람도 유씨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유씨가 뉘우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진씨 사건을 맡은 이은의 변호사는 "성범죄 사건 법정에서 '피고인의 방어권'이라는 미명 하에 피해자를 난도질하는 상황은 이제 낯설지도 않다"며 "피해자는 졸지에 자신에게 강간치상 성범죄를 저지른 남자에게 연인관계였다고 주장되고, 선정적으로 묘사되고, 이유도 없이 피고인을 처벌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사악한 사람으로 치부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에게 7년은 직장을 얻고 기혼녀가 되는 긴 시간이었지만, 그 긴 시간마저도 피해자를 고통의 트라우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해주지 못했다"며 "7년의 고통을 양형에 반드시 반영해주길, 반성없는 태도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서울중앙지법 제30형사부(부장판사 황병헌)는 지난달 20일 유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또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등에 5년 간 취업제한을 명했다. 유씨는 선고 직후인 지난달 22일 판결에 불복, 항소했다. 7년이 지난 이 사건은 법정에서도, 민진씨에게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박보희 기자 tanbbang15@mt.co.kr

2018.12.1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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