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으로부터』

[컬처]by 문학동네

이 책의 표지에도 결국 와일드의 사진을 쓰고 말았다. ‘결국’이라고 한 이유는, 웬만하면 와일드의 사진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다지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몇몇 유명한 사진들이 오스카 와일드라는 작가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대안도 마땅치 않아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디자이너가 내민 시안 하나가 오랫동안 눈길을 사로잡았다. 표지에는 와일드의 흑백사진이 윤곽만 남은 채 희끄무레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조용히 흐느끼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정적이고 음영이 풍부한 이미지였다. 와일드의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디자이너의 의도가 담백하게 반영된 표지였다. 사진 속의 와일드는 35세, 때는 1889년이었다. 

『심연으로부터』

오스카 와일드가 그의 인생을 뒤흔들어놓게 될 한 남자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891년의 일이다. 남자의 이름은 앨프리드 더글러스. 와일드보다 무려 열여섯 살이나 어렸던 그는 와일드가 공부했던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의 재학생이었다. 둘은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지나치게 일방적이었고 과격했으며 비정상적이었다. 더글러스의 아버지와 벌인 그 유명한 ‘퀸스베리 재판’에서 패소한 와일드는 남성들과 외설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레딩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후 그의 삶은 잘 알려진 대로다.

 

이 책은 와일드가 더글러스에게 쓴 편지다. 와일드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어느 비평가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하고 긴 러브레터 가운데 하나”다. 감옥에서 와일드는 하루에 딱 한 페이지씩 더글러스에게 편지를 써내려간다. 온갖 자책과 원망과 후회로 가득하지만, 사실 편지의 행간에 어려 있는 것은 연인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이다. “이건 절절한 연애편지예요. 사랑 이야기죠.” 어느 날 통화중에 역자가 했던 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책은 그동안 ‘옥중기’라는 잘못된 제목으로 알려져 왔다. 이유가 뭘까?

 

이 편지에 와일드가 붙인 제목은 ‘감옥에서: 사슬에 묶여 쓴 편지(Epistola: In Carcere et Vinculis)’다.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라는 제목은 로버트 로스가 훗날 책으로 펴내며 시편에서 가져와 붙인 것이다. (로버트 로스는 와일드의 첫번째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와일드의 임종을 지켰으며 죽어서도 와일드와 함께 묻혔다. 와일드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출감 후에 와일드는 편지 뭉치를 로스에게 건네며 한 부는 타자해서 간직하고 원본은 더글러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로스는 타자한 복사본을 더글러스에게 주고 원본은 자신이 가졌다. (더글러스는 훗날 자신은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받긴 받았는데 첫 장만 읽고 태워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편지는 와일드 사후 1905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로스는 편지를 책으로 펴낼 때 편지의 수신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더글러스와 관계되는 모든 구절을 삭제했다. 그 분량이 전체의 3분의 2에 달했다. 이렇게 불완전한 모습으로 출간되는 바람에 독자들은 이 책을 와일드의 참회록 정도로만 생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책은 1959년에 처음 번역 출간된 것으로 확인되는데(강성일 옮김, 『옥중기』, 백죽문학사; 조성출 옮김, 『옥중기』, 범양출판사) 두 권 모두 불완전한 번역본이다. 왜냐하면 『심연으로부터』의 무삭제판은 1962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온 이 책의 번역본은 대부분 삭제판을 대본으로 하여 이 책에 대한 잘못된 이해만 키워온 셈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옥중기’를 검색하면 ‘심연에서’와 같은 말이라고 나온다. 워낙 ‘옥중기’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 있어 아예 표제어로 같이 올려둔 것이리라.) 이렇게 불완전한 번역본들은 와일드의 동성애만 부각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사실 『심연으로부터』는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와일드가 더글러스에게 쓴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자와 협의하여 해설에 준하는 옮긴이의 말을 넣기로 했다. 처음에 번역 원고만을 읽었을 때는 이 편지의 매력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역자의 충실한 주석 덕분에 그럭저럭 읽어나갈 수는 있었지만, 독자들이 자칫 지루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와일드의 생애와 와일드가 이 편지를 쓴 계기, 이 책의 의의에 대한 역자의 해설을 책 앞쪽에 둔 것이다. 그리고 앙드레 지드의 책 『오스카 와일드』를 번역하여 책 뒤에 부록으로 실었다.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인 역자의 아이디어였다. 지드의 회상기 「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는 수감 전후 와일드의 모습과 그의 생애 전반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각별한 도움을 준다.

『심연으로부터』

오스카 와일드는 앨프리드 더글러스를 만나는 순간부터 이미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더글러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영국의 문학사도 조금은 바뀌었을지 모른다. 와일드는 감옥에서 나온 뒤 고독과 외로움과 가난에 시달리다가 더글러스와 다시 만났다. 얼마 못 간 재회였지만 두 사람의 지독했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얼마 후 와일드는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와일드는 마지막 순간 더글러스를 그리워했을까? 새삼 그것이 궁금하다. 그의 만년은 더할 나위 없이 불행했지만, 그랬기에 그의 삶은 드라마가 되었고 그는 유미주의를 상징하는 문학사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남았다.

글. 문학동네 편집부 오경철

2015.07.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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