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만난 이후 나의 삶은 달라졌다

[컬처]by 웹진 <문화 다>

리스본. 포르투갈의 수도인 이 도시는 내게 낯선 지명에 불과했다. 15세기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본거지이며 1755년 대지진을 겪은 비극의 도시. 그리고 크리스티앙 호날두와 루이스 피구, 누노 고메즈와 같은 유명한 축구선수들의 이름이 떠오르지만 리스본은 명확한 실재로 다가오지 않았다. 야간열차에 올라 리스본으로 떠난 그레고리우스와 어느 청년과의 만남으로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난 페레이라를 알기 전까지는. 

당신을 만난 이후 나의 삶은 달라졌다

우연, 사건, 만남 1- '리스본행 야간열차'

당신을 만난 이후 나의 삶은 달라졌다

스위스의 베른, 한 남자가 있다. 일흔 살이 넘은 초로의 남자 그레고리우스는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수업을 빼먹지 않은, 고지식하고 따분한 선생이다. 아내와 오래 전에 사별한 그는 오로지 고전문헌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에만 몰두한다. 어느 때와 같이 학교에 출근하던 그는 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다가 난간에 올라가 뛰어내리려던 한 여자를 구해준다. 구출한 여자를 학교까지 데리고 오지만, 여자는 말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레고리우스는 여자가 남기고 간 가방에서 포르투갈어로 적힌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발견한다. 책의 서문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책을 읽다가 매혹된 그레고리우스는 책의 저자를 만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열차표를 끊는다. 수십 년 동안 한 도시에서만 머물던 그를 리스본으로 향하게 이끈 것은 책 속의 몽환적인 문장들과 사라진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 프라두’라는 이름을 지닌 책의 저자를 찾아 헤매지만 70이 넘은 노인마저 설레게 한 문장을 쓴 그 작가는 살라자르 군부의 독재가 끝난 1975년에 사망했다. 실의에 빠진 그레고리우스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 프라두의 삶을 추적한다. 의사이자 혁명조직원이었던 프라두는 예기치 않게 악명 높은 고문경찰의 목숨을 살려주게 되고, 친구의 연인이었던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조직 내에서 갈등을 겪는다. 프라두는 친구의 연인과 스페인으로 도망가지만, 삶의 방식이 너무도 달랐던 두 사람은 그곳에서 헤어지고 만다.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 친구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던 프라두는 자신의 단상들을 기록한다. 그것이 바로 그레고리우스의 손에 들어온 책이었던 것이다. 

우연, 사건, 만남 2 -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당신을 만난 이후 나의 삶은 달라졌다

또 한 남자가 있다. 리스본에 거주하는 50대 후반의 페레이라. 그는 신문에 프랑스 문학작품을 번역해서 싣는 기자다. 페레이라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사별한 아내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혼잣말을 하다가 신문사에 출근해서 할당된 기사를 기계적으로 적는다. 점심시간이나 퇴근길에는 설탕을 듬뿍 넣은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페레이라의 일상처럼 포르투갈은 평온하지만, 포르투갈과 국경을 맞댄 스페인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 군과 시민군 사이에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바로 옆 나라에서 내전의 희생자가 늘어가고 있었지만 페레이라가 근무하는 신문의 1면에는 ‘뉴욕에서 출항한 호화여객선, 리스본에 입항’ 이라는 뜬금없는 소식과 가십성 기사만 게재된다.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는 스페인의 프랑코 반란군을 옹호하면서 스페인 내전의 참상이 자국에 알려지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한다. 리스본의 기자들은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옹호적인 기사를 쏟아낸다. (지금-여기의 대한민국의 풍경과 너무도 흡사하다)

 

작가들의 부고기사를 미리 써두는 작업을 시작한 페레이라는 자신의 타이핑을 맡길 청년을 고용한다. 페레이라에게 고용된 로시라는 25살의 청년은 싹싹하고 밝다. 아내가 유산한 자식이 만약 살았더라면 로시와 비슷한 나이일 거라는 생각에 페레이라는 로시에게 친절을 베푼다. 로시는 프랑스 작가들의 부고기사에 살라자르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을 조금씩 섞어서 작성한다. 로시는 파시스트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조직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감지한 페레이라는 로시를 해고하려고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기사 내용을 변경하는 것을 방치한다. 그러나 기사에 내재된 정권비판을 눈여겨 본 비밀경찰에 의해 로시는 살해되고 만다. 그 죽음은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페레이라를 각성시킨다. 

진실을 통과한 이후의 삶

스페인 내전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두 국가(스페인과 포르투갈)는 1970년대까지 오랜 군부 독재를 겪었다. 파스칼 메르시어와 안토니오 타부키의 소설은 포르투갈의 비극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두 소설은 독재 시대의 어둠이 아닌 ‘인간의 변화’를 응시하고 있다. 인생의 변화를 단념할 나이에 이른 그레고리우스는 오래된 책에 이끌려 마주한 적도 없는 아마데우 프라두의 삶에 관여하게 된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살았지만, 그들은 ‘언어’를 매개로 뜨겁게 만난다. 아마데우 프라두가 겪은 혁명과 사랑, 이별의 흔적을 되짚은 이후에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아내가 죽은 이후에 자폐적인 삶을 영위하던 페레이라는 로시와 만나면서 기자로서의 소명에 눈을 뜬다. 로시가 죽은 후 심장병 치료를 핑계로 국경을 넘는 페레이라의 가방 안에는 그레고리우스를 리스본으로 향하게 만든 것과 비슷한 ‘진실의 활자’가 담겼으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당신을 만난 이후 나의 삶은 달라졌다

아마데우 프라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프라두의 글을 읽은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행 열차에 올랐고, 그것으로 그의 삶은 변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계속 변한다. 허구적인 존재였다가 생생한 실재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때때로 냉담과 냉소로 무장한 채 변화를 경계하는 몸짓을 취하기도 하지만,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 삶이란 무의미한 반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리스본에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민한 영혼들이 있었고, 그들의 열망은 마침내 ‘카네이션 혁명’을 낳았다. 1968년 살라자르 총리가 질병으로 쓰러지자 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가 정권을 인수했지만 독재는 계속되었다. 1974년 4월 25일. 계속되는 식민지 전쟁과 독재에 반발한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리스본 시민들은 군인들의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으면서 화답했다. 카에타누 총리는 망명했으며 포르투갈에는 스피놀라 장군의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오늘날까지 포르투갈은 4월 25일을 ‘자유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렇게 되찾은 자유의 이면에는 숱한 ‘아마데우 프라두’와 ‘페레이라’들의 용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레고리우스가 마주한 죽은 자의 기록과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 그리고 진실을 폭로하는 기사를 들고 프랑스로 향하는 페레이라는 다시 살아가는 자의 모습을 아프게 보여준다. 누군가를 만난 이후에 달라지는 두 사람의 변화는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은유이기도 하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열망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두 소설을 읽는다면, 당신도 삶의 어느 변곡점에서 낯선 도시로 향하는 야간열차에 올라타고 싶어지리라. 


글 이정현(문학평론가)

2015.09.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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