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리는 '헤이세이' 3개의 키워드…버블붕괴·재해·디지털

[트렌드]by 뉴스핌

1989년부터 이어온 일본의 헤이세이(平成)시대가 4월 30일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아키히토(明仁) 덴노(天皇·일왕)의 생전 퇴위와 함께 곧 과거가 될 헤이세이는 일본에서 어떤 시대로 기억될까.


일본 언론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헤이세이의 기억은 '버블경제의 붕괴'와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경제·환경에서 위기가 잇따르면서 일본인들은 좌절과 극복을 반복해야 했다.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각종 납치·살해 사건 등 흉악범죄도 유독 이 시기에 잇달았다.


디지털화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또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보급으로 일본인들의 삶도 이전과는 달리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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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4일 일본 도쿄의 국립극장에서 열린 '재위 3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아키히토(明仁) 일왕 부부. [사진=로이터 뉴스핌]

버블붕괴, 잔치는 끝났다…'잃어버린 시간' 헤이세이

헤이세이 원년이었던 1989년 12월 29일 닛케이지수는 3만8915엔으로 한 해 거래를 마무리했다. 닛케이 지수가 버블경제 상징이라고 불리는 이 종가를 넘는 일은 이후에 없었다. 지난 4월 26일 헤이세이 마지막 거래일 닛케이지수는 2만2258엔이었다. 회복상태라지만, 30년 전 최고가에 비해 60% 수준이다.


버블이 붕괴하면서 거리로 내몰리는 직장인들이 속출했다. 헤이세이 원년인 1989년 2.3%였던 완전실업률은 2002~2003년에 5%대로 상승했다. '취업빙하기'라는 단어는 유행어가 됐고, 한 회사에 평생근무하는 '일본형 고용'도 과거의 것이 됐다. 소득수준도 악화됐다. 2016년 기준 세대 1명 당 평균소득은 219만엔이었다. 이는 가장 높았던 1996년보다 6만엔 가량 줄어든 수치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불량채권처리 문제로 버블 후유증에 시달렸다. 금융위기 이전에 20여곳에 달했던 일본의 대형은행들은 현재 7개의 그룹으로 재편됐다.


버블붕괴 이후에도 금융위기는 이어졌다. 2008년 리먼쇼크로 세계적인 불황이 닥쳐오자, '파견계약 해지'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1989년 800만명이었던 비정규직 노동자는 리먼쇼크 당시 약 1800만명으로 늘었다. 현재는 2100만명 수준이다.


​한편 기업의 도산건수는 헤이세이 기간 내 최고치였던 2001년 1만9164건에서 2018년 8235건까지 줄어들어 버블시기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일본은행(BOJ)의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으로 금리가 떨어진데다 환율이 엔저로 흐르는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본의 기업들은 후계자가 없어 고민하기 시작했다. 경제산업성 추산에 따르면 2025년까지 일본기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27만개사가 후계자가 없어 폐업위기에 놓여있다. 인구가 감소하면서 기업을 물려주고 싶어도 이어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는 헤이세이 접어들어 빠르게 진행됐다. 2018년에 태어난 신생아는 92만1000명으로, 1989년의 4분의 3 이하 수준이다. 2015년부터는 75세 이상 인구 수가 14세 이하를 상회해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인구도 2008년(1억2808만명) 정점을 찍은 이후 계속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 일본인 인구는 1억2421만8000명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남녀의 미혼율도 상승했다. 여성의 경우 25~29세 여성의 미혼율은 1990년 40.4%에서 2015년 61.3%로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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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지나간 도쿄전력 제1원전 현장 [사진=로이터 뉴스핌]

자연재해와 흉악범죄의 충격

교도통신이 지난 3월 27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헤이세이 시대 기억에 남는 뉴스(복수응답)를 묻는 질문에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사고'라는 응답이 70%로 가장 많았다. 1995년 발생한 '한신(阪神)대지진'을 선택한 응답자도 40%였다.


헤이세이시대는 거대한 자연재해가 잇달았다. 우리나라에 '고베(神戸)대지진'으로도 알려진 한신대지진은 진도 7을 기록한 대지진이었다. 사망자 6434명에 4만30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10만채가 넘는 주택이 전파됐다. 재산피해만 10조엔대였다. 이 지진으로 당시 아시아의 허브항이던 고베는 몰락했다.


문제는 16년 뒤 역대 최악의 지진이 다시 몰아쳤다는 점이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은 지진 자체의 피해도 컸지만 뒤이은 쓰나미와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도 상당했다. 동일본대지진으로 1만5897명이 사망했으며 22만명 이상이 난민이 됐다. 또 12만채가 넘는 건물이 붕괴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동일본대지진에 의한 피해액은 약 2350억달러에 달한다.


동일본대지진 사고의 수습은 8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도쿄전력 측은 지난 15일에서야 처음으로 후쿠시마 제1원전 3호기에서 핵연료 반출 작업을 시작했다.


동일본대지진 당시 원전사고는 일본에서 탈원전 주장에 힘이 실리는 계기가 됐다. 헤이세이 초반만 하더라도 일본 내 에너지 발전량의 27%는 원자력에너지였다. 한때는 37%까지 올라갔지만, 2016년엔 1.7%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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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3월 20일 일어난 사린가스 테러사건 현장 [사진=지지통신 뉴스핌]

헤이세이의 부정적인 기억은 재해뿐만이 아니었다.


교도통신의 여론조사에선 2위를 기록한 뉴스는 '옴진리교 사건'이었다. 공동 9위에는 '미야자키 쓰토무(宮崎勤)의 유괴살인사건', '사카키바라(酒鬼薔薇)사건' 등 헤이세이 시대에 일어난 엽기적인 살인사건들이 이름을 올렸다.


실제로 헤이세이 원년인 1989년은 아키히토 덴노의 즉위와 함께 새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기도 했지만, 동시에 역사상 최악의 미성년자 대상 범죄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국민들에 충격을 줬던 해이기도 하다.


그 중 하나는 도쿄(東京)와 사이타마(埼玉)일대에서 어린 소녀들을 살인한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이었다. 가해자인 미야자키 쓰토무는 4~7세의 어린 소녀 4명을 잇따라 납치해 살해했다. 살해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성폭행, 사체훼손 등 엽기적인 행위를 했던 것도 충격이었다.


동시에 이 시기엔 4명의 남학생이 여고생 한 명을 납치해 40여일간 온갖 가혹행위와 고문, 성폭행 끝에 살해하고 콘크리트에 묻은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이 공개돼 충격을 주기도 했다.


헤이세이의 흉악범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95년 종교집단인 '옴진리교'가 통근시간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는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일어났다. 이 같은 테러로 인해 13명이 사망했고 6300명이 부상을 입었다.


1996년엔 세뇌와 감금을 통해 일가족이 서로를 죽이게 만들었던 '기타큐슈 감금 살인사건', 1997년엔 중학생인 가해자가 어린아이들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살해한 '사카키바라 사건'이 일어났다.


다만 유독 끔찍한 흉악범죄가 일어났을 뿐, 일본의 범죄 자체는 되레 줄어들었다. 일본 경찰청에 따르면 사건 인지건수는 2018년 기준 81만7338건으로, 280만건이 넘었던 2002년의 3분의 1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범죄의 유형도 헤이세이 시대를 맞아 바뀌었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입금 사기 등 특수사기나 사이버 범죄, 스토커 범죄 등이 헤이세이 시대에 새로 생긴 범죄"라고 전했다.


최근엔 아동학대 사건도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해 3월엔 부모의 학대로 숨진 5세 여아가 "부탁드립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적은 노트가 발견돼 충격을 줬다. 올핸 초등학교 4학년 여아가 "아버지에게 폭력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학교 측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끝내 구조되지 못하고 숨지는 비극이 일어났다.

급격한 디지털화…출판시장은 울상

헤이세이시대 일본국민의 생활도 큰 폭으로 바뀌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디지털화가 화두가 됐다. 1995년에 '윈도우95' 붐으로 인해 개인용컴퓨터(PC)가 크게 확산되면서 1989년 11%였던 PC 보급률은 2007년 70% 이상으로 늘어났다.


1999년엔 일본의 대형통신사 NTT도코모가 휴대전화로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서비스를 시작했고, 2008년 애플의 아이폰이 발매되면서 스마트폰 보급이 늘었다. 1989년 49만대에 불과했던 휴대전화 계약 수는 2018년 9월말 기준 1억7000만대로 인구 수를 상회하고 있다. 스마트폰 보급률은 2017년 75.1%로 처음으로 PC를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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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서 이번주 벚꽃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밤벚꽃놀이를 즐기는 시민들. [사진=로이터 뉴스핌]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SNS도 확산됐다. 2008년경을 기점으로 일본에서도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0년 서비스를 시작한 인스타그램은 마케팅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찍어올리기 좋은 사진이란 뜻의 '인스타바에(インスタ映え)'용 상품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출판시장은 쇠락하고 있다. 전성기였던 1996년 일본의 출판시장은 2조6563억엔 규모였지만, 2018년엔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일본의 서점조사회사 아루미디어에 따르면 서점 수는 2000년 2만1654곳에서 2018년 1만2026곳으로 줄어들었다.


의류시장도 변화를 맞이했다. 명품이 유행했던 버블시기(1991년)엔 연간 의류 지출이 30만엔을 넘겼지만, 2017년엔 13만8000엔에 불과했다. '유니클로' 등 저가의 패스트패션 브랜드가 등장한 영향이었다. 또 인터넷을 통한 중고품 거래도 일본인에게 흔한 일이 됐다.


​[서울=뉴스핌] 김은빈 기자 = ​kebjun@newspim.com

2019.05.0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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