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 안 돌보고 자기 삶 즐기는 시어머니... 왜 욕하죠?

[컬처]by 오마이뉴스

젠더 관점에서 바라본 KBS 2TV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전쟁 같은 하루 속에 애증의 관계가 돼버린 네 모녀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모든 엄마와 딸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드라마"


포털 사이트가 소개하고 있는 KBS 2TV 주말 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의 기획의도다. 저 문구를 본 순간 참 따스했다.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모든 엄마와 딸에게 '위로'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드라마라니. 이 드라마를 보면 왠지 가부장제의 답답함을 벗어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삶을 응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3월 23일 첫 전파를 탄 이후로 30%를 오가는 시청률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 아닌가. 많은 여성들이 이 드라마를 보며 정말로 위로를 받고 있나 보다 했다. 그래서 뒤늦게 몰아보기를 했다. 재미는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힘이 나기는커녕 마음이 점점 답답해져 왔다.

여전히 떠받들어지는 '모성 신화'

드라마의 큰 모티브는 '모성'이다. 드라마에는 3명의 '어머니'(큰 딸 미선은 어머니보다는 딸 세대로 간주되므로 제외)가 나온다. 자식들에게 헌신하는 엄마 박선자(김해숙), 어린 딸을 버리고 재벌과 결혼해 기업의 대표가 된 전인숙(최명길), 40년간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 애쓰는 하미옥(박정수). 이 세 여성은 드라마 속 모성을 상징한다.


선자는 희생적인 모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딸 셋을 키워낸 그녀는 설렁탕집을 운영하면서도 새벽부터 밤까지 딸들 일이라면 뭐든 관여한다. 그녀에게 딸들은 세상의 전부다. 딸들과 다툰 후 시름시름 앓다가도, 딸들의 위로 전화 한마디면 금세 기분이 풀어진다.


그러면서도 딸들을 결혼시켜 딸들이 '어머니됨'을 성취하도록 하는 게 삶의 목표다. 희생과 헌신, 어머니됨을 성취로 보는 시각, 자신의 욕구에 대한 무시. 그녀가 보여주는 모성은 '모성신화'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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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딸> 의 친정엄마 박선자(김혜숙).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헌신적인 엄마다. ⓒ KBS

그런데 이 엄마를 보고 있노라니 자꾸 숨이 막혀 왔다. 딸들이 전화라도 하지 않는 날에는 불안해 어쩔 줄을 모르고, 딸들은 이런 엄마를 위해 툭하면 "엄마 잘못했어요. 죄송해요"라고 자신을 탓한다. 특히, 미리(김소연)는 친모를 만나고 상처를 받은 후에도,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에도 선자를 찾아가 '잘못했다'고 빈다. 이는 지나치게 희생적인 모성이 자녀에게 부적절한 죄책감을 심어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런 상황들을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하며 선자의 모성을 추켜세운다.


모성신화를 신봉하는 이런 시각에선 모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전 대표, 인숙은 악녀일 수밖에 없다. 인숙은 '딸을 버렸다'는 이유로 욕설 세례를 받고, 그녀가 이룬 성취를 폄하 당한다. 28년 만에 딸을 만나 서툴게 표현되는 그녀의 모성마저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한 전략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그녀가 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이유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자식을 버린 엄마는 그 자체로 나쁜 엄마이니 그녀가 처한 맥락 따위는 고려할 필요도 없다는 식이다.


미선(유선)의 시어머니 미옥 역시 '이기적인 어머니'로 그려진다. 그녀는 손녀를 봐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며느리, 아들, 남편 모두에게 지탄받는다. 반면, 미옥이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들은 모두 이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미옥은 손녀를 돌보기로 하며 아들 내외에게 양육비를 청구한다. 그녀의 양육비 청구는 '희생적인 친정 엄마' 선자의 모성과 비교되며 여러 회에 걸쳐 계속해서 비난받는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아이를 봐 주면서 양육비를 받겠다는 것이 그리 잘못된 일인가? 엄마면 희생해야 된다는 당연한 생각이 더 문제 아닌가? 또한, 여성이 자기 자신의 삶을 즐기겠다는 게 그토록 이기적이며 비난받아야 하는 일인가?

스스로를 돌볼 줄 모르나, 군림하려는 남자들

반면, 드라마 속 남자들은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은퇴한 미선의 시아버지 대철(주현)은 아내 미옥이 밥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 게 가장 큰 불만이다. 12, 13회 무려 두 회에 걸쳐 대철은 친구들과 바깥 생활을 즐기느라 박대를 구워주지 않는 미옥을 원망한다. 스스로 식사를 챙겨먹을 생각조차 할 줄 모르는 대철은 집을 나가려고 해도 팬티와 양말, 면도기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짐도 싸지 못한다(39회). 아내와 다툰 후 '각각 사는' 일상을 선택하자 그는 매끼를 라면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5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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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딸> 의 시아버지인 정대철(주현). 매사에 합리적이고 현명한 듯 하지만, 자기 자신을 돌보지도 못하면서 아내에게 군림하려 든다. ⓒ KBS

문제는 이런 대철의 캐릭터가 꽤 '멋있는 시아버지'로 포장된다는 점이다. 대철은 미옥과 선자가 심각한 갈등에 빠져 있을 때, 중재자로 나서 선자의 희생을 치하하고 마음을 풀어준다. 또 양육비를 받으려는 시어머니에게 서운해 하는 며느리를 찾아가 점심을 사주며 대신 사과하기도 한다. 이런 시아버지를 미선은 "우리 시아버지 정말 멋지시다"고 추켜세운다. 또한 그는 결코 스스로 나서서 손주를 돌봐 줄 생각은 하지 않으며, 기본적인 집안일조차 할 줄 모르면서 아내에게 늘 윽박지르기만 한다. 이런 대철에 대한 묘사는 남성은 가정에서 아무것도 할 줄 몰라도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부장제의 시각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 돌봄제공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대철의 아들 진수(이원재)도 마찬가지다. 1회 첫 장면부터 아이의 등원준비와 출근준비로 바쁜 아내에게 "나 오늘 뭐 입어?" "소시지볶음은 없어?"라고 물으며 등장한 진수는 그야말로 덜 자란 어른이다. 스스로 옷도 못 챙겨 입으면서 아내 몰래 여관방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각종 게임과 레저를 즐긴다. 아버지로서 책임감도 없고, 육아는 아내, 엄마, 장모님, 아니면 육아도우미가 해결해야 하는 여자들만의 일로 생각한다. 진수의 이런 면들은 극의 웃음 포인트이다. 아마도 몇몇 시청자들은 이런 모습에 뜨끔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화화'는 자칫, 남자들의 이런 특성은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우려가 있다.

은근슬쩍 정당화되는 여성에 대한 편견 그리고 폭력

한편, 드라마에는 여성 리더들이 등장한다. 미리는 임원 승진을 눈앞에 둔 대기업 부장이며, 그 기업의 대표는 미리의 생모 인숙이다. 극 중 그룹의 회장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래사 왕회장(주현미) 역시 여성이다. 아마도 이런 설정들은 최근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부각되고 있는 면들을 수용한 것 같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들은 직급에 관계없이 남성에게 대상화된다. 미리의 부하직원들은 툭하면 '저렇게 성격이 강하고 무서워서 연애도 할 리가 없다'며 미리를 상사로 존중하기보다는 매력없는 여성으로 평가한다. 이런 동료들에게 태주가 미리를 변호하기 위해 내뱉은 말은 이렇다. "고분하고 사분하고 귀엽고 부끄러워하는 면도 있어요(30회)." 여성은 순종적이고 겸손하며 귀여워야 한다는 가부장 사회의 편견을 그대로 담고 있는 말이다.


인숙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능력 있는 대표로 나오지만, 드라마는 그녀가 결혼을 통해 재벌가에 입성했고 시댁 배경 때문에 그 자리에 올라왔음을 수시로 강조한다. HS그룹의 회장 한종수(동방우)는 심지어 "넌 우리 집 개야"라는 막말까지 하며 그녀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인숙은 일찍 죽은 남편에 이어 아들과 다름없는 태주(홍종현)까지 자신을 버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러니까 태주 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야 돼"라는 그녀의 대사는 여성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남편과 아들에게 의존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가부장적 편견을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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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에서 미리(김소연)를 사랑하는 재벌 2세 태주(홍종현) ⓒ KBS

심지어 성폭력에 가까운 행위마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24회 태주는 아직 마음을 열지 못한 미리에게 엘리베이터에서 기습 키스를 한다. 당황해 밀쳐내는 미리에게 태주는 "저 선배 좋아한단 말이에요"라고 외친다. 이는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스킨십도 '사랑해서 했다'는 성폭력 가해자의 변명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런 태주를 멋있게 묘사하며 둘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계기로 이 에피소드를 활용한다. 성추행을 정당화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장면이었다. 33회에서는 한종수 회장이 회의석상에서 미리를 두고 "예쁜 얼굴을 저 끝에 앉히면 쓰나"라고 말한다. 이에 미리는 "칭찬으로 알아 듣겠습니다"라고 답변한다. 성희롱성 발언에 이를 참아 넘기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 양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전쟁 같은 하루 속에 애증의 관계가 돼버린 네 모녀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모든 엄마와 딸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드라마"


몰아보기를 끝낸 후 드라마가 표방한 기획의도를 다시 한 번 들여다봤다. 아마도 제작진은 여성들이 살아온 힘든 삶을 보여주며,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워킹맘 미선의 힘겨움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점 등은 공감 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스토리 속에 감춰진 시선은 여전히 모성신화를 신봉하며,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여성을 대상화한다. 과연 이 드라마를 보며 얼마나 많은 엄마와 딸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이 드라마는 시청자의 3분의 1이 선택하는, 그것도 공영방송 KBS에서 매 주말마다 반 년 동안이나 방송되는 작품이다. 분명 드라마의 관점은 사람들의 젠더 의식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획의도를 달성하고 싶다면, 먼저 드라마에 담긴 젠더 의식부터 점검해 보길 바란다. 여성이 바라는 진정한 위로는 가부장적 시선에 갇힌 채 '너네 힘들었지? 그동안 고생 많았어. 힘내'라는 동정이 아니다. 모성신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모성이 존중받는 것. 돌봄과 성취에서 성별이 방해가 되지 않는 것. 그리고 젠더 감수성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일상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는 것. 여성들이 바라는 위로는 이런 것이다. 앞으로 남은 절반의 이야기에서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송주연 기자(serene_joo@naver.com)

2019.06.3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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