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총애, 동료의 시샘을 한몸에... 이 화가가 남달랐던 이유

[컬처]by 오마이뉴스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마네에 의해 '화가들의 화가'로 불린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후대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 궁정, 바로크라는 명칭들로 수식되지만 그가 어느 한 범주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림과 인간에 대한 화가 자신의 뚜렷한 철학과 당시 스페인 왕 필립4세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궁정 화가의 길에 들어선 벨라스케스는 이후로도 37년 동안 쭈욱 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로 초상화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역사화나 성화, 장르페인팅 등 모든 분야에 있어 뛰어남을 드러냈다. 필립4세와 연배가 비슷했던 벨라스케스는 왕의 화가이자 친구로 그 옆을 지켰는데 화가로서 뿐 아니라 의전관, 재상, 기사 등의 작위를 받으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하지만 이는 그림 뿐 아니라 궁정의 업무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면서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전념할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해서 화가로서의 업무가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그의 초상화에 반해 그를 궁전에 들인 왕은 자신은 물론이요 왕비, 왕자, 공주, 동생들 등 모든 가족의 초상화를 그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재상들과 귀족들까지 그에게 밀려드는 초상화는 끝이 없었다. 오죽하면 왕이 세우고자 하는 미술관에 들일 그림과 예술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로마에 머물던 벨라스케스를 빨리 불러들이도록 독촉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자신의 두번째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사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의 초상화를 보면 흔한 왕족의 초상화에서 보이는 미화나 이상화, 아첨이 배제된 상당히 절제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에 가까워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한다.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 이전부터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는 사뭇 다른 화풍을 유지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러한 사실적이고 나름 소박한 초상화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존엄이 담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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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lip IV in Brown and Silver(1635) Source: Wiki Commons ⓒ National Gallery, London

거기에 더해 벨라스케스의 영혼이 담긴 초상화는 단순히 기술적인 면에서의 뛰어남을 넘어, 정형화된 공식을 따르는 엄격함을 넘어, 진실함과 깊이가 있었다. 궁정 화가가 되기 전 서민들을 주로 그렸던 장르페인팅에서는 얼굴 표정이 풍부하고 다채로웠던 반면 왕족의 초상화는 다소 무표정에 가까운 절제된 표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는 기품과 위엄과 성격과 내면, 무엇보다도 존엄이 담겨 있다.


젊은 나이에 궁정 화가가 되고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주변의 시샘이 없을 리가 없었다. 동료 화가들의 깎아내리기 또한 끊임이 없었다. 한 번은 왕이 벨라스케스에게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네는 사람의 머리를 그리는 데에만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군"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벨라스케스는 "그것 참 잘된 일이군요. 지금까지 제대로 그린 머리를 본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고 대답했다.


벨라스케스는 자신을 깎아내리는 시기에 대해 나름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담아, 또한 진실과 진심을 담아 멋지게 받아친 것이다. 실제로 벨라스케스는 기존에 그려진 초상화와는 다른 자신만의 특징이 있었다. 외모에 있어서의 사실적인 묘사와 더불어 그 사람의 존재를 모두 담아낸 그의 초상화는 실제로 그 당사자가 눈 앞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의 초상화가 이러한 힘을 갖게 된 데에는 그 대상에 대한 벨라스케스의 진지한 관찰, 인간과 인생에 대한 성찰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인간적인 초상화는 특히, 궁정에 머물던 광대나 난쟁이를 그린 그림들에서 더욱 확연히 느껴진다. 왕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언제나 주변에 자리했던 그들은 남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한 외모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보면 보통의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그들의 모습에서는 전혀 우스꽝스러움이라든지 측은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가면 뒤에 숨기고 있는 여유로운 관조와 날선 통찰이 그 낯을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웃는 철학자'로 불린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를 그린 그림의 모델을 궁정의 광대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능력이 뛰어나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그것을 으스대거나 거만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는 관조와 지혜의 아이콘으로 여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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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Pablo de Valladolid(1865) Source: Wiki Common ⓒ Prado Museum, Madrid

자신의 능력을 제공하고 궁정의 녹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벨라스케스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연민이나 동질감을 느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또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연습용으로 오랫동안 불평없이 모델이 되어줄, 궁정의 흔하고 만만한 그들을 활용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을 그린 초상화가 유난히 더 친근하면서도 엄숙하며, 깊이와 여운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존엄은 지위를 막론하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확실히 보여준 것이라 여겨진다.

열망에 소극적이지 않았던 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라스케스 본인은 지위에 대한 열망 또는 집착이 대단했다. 실제로 벨라스케스는 그림에서 뿐 아니라 왕의 친구이자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관리로서의 능력이 뛰어나 기사 작위까지 받은 만큼 그의 위상을 한낱 광대나 난쟁이에 비할 바가 아닐 지도 모른다. 야망에 의한 것인지, 명예를 위한 것인지 벨라스케스는 기사 작위를 받는 데 따르는 까다로운 절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지위를 얻는 일에 소극적이지 않았다.


혈통은 물론이요, 단 한번도 그림을 돈으로 거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하는 복잡하고 엄격한 절차였지만 왕의 지지와 벨라스케스 본인의 의지로 마침내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기사 작위는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리 엄청난 이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림을 돈을 주고 팔 수 없는 데다 심지어 당시 스페인 왕궁도 그 권세를 잃어가고 있던 시점이라 자신의 정당한 대가도 제대로 받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라스케스의 화가로서의 권위와 지위는 왕의 지지를 기반으로 막강함을 발휘했다.


그 막강함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림에 대한 자유를 의미했다. 물론 왕의 기꺼운 승인과 위임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본인이 그리고자 하는 대로 마음껏 그리는 자유, 본인이 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사는 자유는 궁정 화가로서 벨라스케스가 누린 놀라운 특권이었다.


일례로 그림과 조각을 사기 위해 로마와 베니스를 방문했을 당시 벨라스케스는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니즈의 그림에 특히나 감명을 받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완성한 라파엘의 그림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그는 솔직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취향을 밝혔다.

"라파엘의 그림에는 전혀 끌리지 않는다. 좋은 그림, 아름다운 그림에 관한 한, 베니스가 선두이고 티치아노가 그 대표자이다."

이러한 취향에 충실하게 벨라스케스는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의 힘으로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과 고대 조각들을 본뜬 틀을 수집해 스페인으로 가져갔다. 그 덕분에 지금 프라도 미술관에는 벨라스케스가 이 시기에 구입한 수많은 이탈리아, 특히 베니스의 저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벨라스케스가 누린 화가의 위상과 특권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Las Meninas'(1565-7)을 들 수 있다.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대상들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마가레트 공주가 그림의 중앙을 당당하게 차지하고는 있지만 이를 공주의 초상화라고 하기에는 다소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억지스러운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공주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물론이고 공주의 옆에서 언제나 놀이 상대가 되어주는 난쟁이들, 졸고 있는 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그림을 그린 당사자인 자신의 모습이 떡 하니 그림의 주요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렇게 확연히 보여지는 부분을 넘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욱 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벨라스케스 자신의 모습 뒤로 보이는 벽에 걸린 작은 액자는 얼핏 그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왕과 왕비로 보이는 두 인물을 그린 초상화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당시 왕과 왕비를 나란히 그린 초상화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문 밖에 서 있는 수행원은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은 데다 갈 길을 재촉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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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 Meninas(1656) Source: Wiki Commons ⓒ Prado Museum, Madrid

그렇다면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공주의 초상이거나 또는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림인 바로 이 그림, 즉 'Las Meninas'일 수 있고, 왕과 왕비는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잠시 방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흔한 일은 아니지만 왕과 왕비의 초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액자 형식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거울을 등장시켜 그림과 현실에 대한 암시를 담은 그림을 즐겨 그렸던 벨라스케스는 이 그림에서는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의 대상과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을 하나의 그림에 모두 담아낸 것이다. 일종의 그림에 대한 그림, 화가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화가의 존재를 거울 속에 엿보이는 모습으로 보여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초상'을 약간 비틀어 화가의 존재를 정면에 내세우고 그림의 대상을 거울 속에 엿보이게 그린 유쾌한 반전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셈이다.


실제로 벨라스케스가 얀 반 에이크의 그림을 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림과 화가에 대한 벨라스케스의 깊은 생각과 고민이 만들어낸 역작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궁정 화가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이러한 그림을 보고도 기꺼이 받아들인 필립4세의 아량과 지지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기사 작위를 받기 전이었기에 벨라스케스의 왼쪽 가슴에 위치한 기사 훈장은 이후에 덧그린 것으로 그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는 장치이다. 주변의 어떠한 영향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성실히 추구하고 실행에 옮긴 그의 그림은 화려하거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실되고 온전한 그림, 묵직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그림, 그의 말마따나 '제대로 그린' 그림이 되었다.

참고서적

  1. Diego Velázquez, 1599-1660 The Face of Spain(Norbert Wolf, 2016, Taschen)
  2. The World of Velázquez(Dale Brown and the Editors of TIME-LIFE Books, 1980, Time-Life Books Inc.)
  3. Velázquez(Enrique Lafuente Ferrari, 1988, Rizzoli International Publications, INC.)
  4. Velásquez(José López-Rey, 1984, Master Works Press)

이준희 기자(ljuneh@naver.com)

2019.07.1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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