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주에 갇힌 사도세자, 묵묵히 지켜본 회화나무

[컬처]by 오마이뉴스

[서평] 나무로 만난 궁궐, '궁궐의 우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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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명정문 행각 일부. 지난해 여름에 찍은 것이다. 2019년 8월 현재는 명정문 일원이 공사중이라 출입할 수 없다.사도세자의 비극을 지켜봤을 두 그루의 회화나무 중 한그루이다. ⓒ 김현자

지난주 금요일 고향 친구와 창경궁에 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지고 있는 막역한 친구이다 보니 만나는 순간부터 시시콜콜, 많은 이야기를 서로 쏟아내곤 한다. 이런 친구와는 카페같은 실내보다 고궁이나 재래시장 등을 함께 다니는 것을 즐긴다. 하필 창경궁을 선택한 것은 그동안 여러 차례 갔지만 미처 몰라서 만나지 못하고 온 나무 몇 그루도 만나고 싶어서였다.


지난해 여름 딸과 갔을 때 찍은 명정문 행각 일부 모습이다. 창경궁은 서울대학교병원 맞은편에 있다. 혜화역 4번 출구에서 10분 남짓 걸어가면 된다. 인근에 볼일이 있었다. 1시간쯤 먼저 나서서 인근에 있는 창경궁에 잠깐이라도 가보자 싶어 들른 것이다. 1시간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창경궁을 마냥 여유 있게 즐기기엔 부족했다.


아무리 그렇기로 문까지 열려 있는데 왜 가볼 생각을 못 했을까? 사진을 볼 때마다 아쉽곤 했다. 뭣보다 사진 찍을 때 멋있다고 생각했던 나무를 못보고 왔음이 후회됐다. 더욱 아쉬워진 것은 <궁궐의 우리 나무>(눌와 펴냄)에서 두 그루 회화나무 이야기를 읽으면서다.

창경궁에는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나무 두 그루가 있다. 영조 38년(1762년) 윤 5월 13일 영조는 지금의 창경궁 문정전 앞에서 자신의 친아들인 사도세자를 8일 동안이나 뒤주 속에 가둬 죽게 했다. 사도세자가 여름날 뒤주에 갇혀 고통의 비명을 지를 때 고스란히 그 소리를 들었을 나무가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 바로 문정전에서 동쪽으로 150m쯤 떨어진 선인문 앞 금천 옆의 회화나무와 명정전 남행각의 광정문 밖의 아름드리 회화나무다. 특히 선인문 앞 회화나무는 줄기가 휘고 비틀리고 속까지 완전히 비어 있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 이렇게 까맣게 속이 썩어버렸다고도 한다. 이 두 회화나무는 <동궐도>에서도 찾을 수 있어서 그 비극의 현장을 목격했음을 알 수 있다.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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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는 느티나무와 같이 괴목으로 불렸고 동궐도에서도 보이는 나무이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죽은 곳이 이 근처이고 비극적인 사건이 많이 발생한 선인문과 역사를 같이한 나무이다.-창경궁 회화나무 안내문 전문.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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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 자라는 나무 지척의 또 다른 회화나무. 같은 회화나무인데 자라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지척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온 두 나무의 공통점은 둘 다 속이 새까맣게 썩고 비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사진 속 나무다. ⓒ 김현자

좀 더 설명하면,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는 문정전과 그리 멀지 않은 금천 회화나무 인근 공터로 옮겨졌고, 결국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런 나무 가까이에는 궁궐 정문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고 소박한 문 하나가 있다. 선인문이다.


나무와 선인문은 가깝다. 몇 걸음 거리이다. 때문인지 선인문 또한 나무와 함께 사도세자의 비극을 목격했을 거라며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이 나간 문', '연산군이 도망친 문', '죽은 소현세자비가 가마니를 덮고 나간 문' 등과 같은 역사 사실들까지 아울러 이야기함으로써 선인문의 비극적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현재의 '선인문은 1857년(철종 8)에 소실된 것을 고종 연간에 재건(창경궁 누리집)' 했다고 하니 당시의 선인문은 아닌 것이다. 선인문의 옛이름은 서린문(瑞燐門)이다. 세자가 거처하던 동궁(東宮) 정문으로 조정의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었다고. 원래의 선인문 규모는 훨씬 컸으나 재건 때 축소됐다고 한다. 인근에 궐내각사가 있었다는 안내문이 있다.


책에서 회화나무는 창덕궁 편에서 다룬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금호문에 이르는 행각 인근에 천연기념물 제247호로 지정된 여덟 그루의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어서다. 이 회화나무들 또한 창경궁의 회화나무들처럼 순조 연간에 제작된 <동궐도>(국보 제249호)에도 그려진 나무들로 모두 수령 300년 이상 추정한다(2014년 7월, 한 그루가 비바람에 쓰러졌다).

옛날, 안방마님이 거처하는 대청마루 한편에는 어김없이 다듬잇돌과 방망이가 있었다. 여자들은 홍두깨로 명주를 감아 다듬질하면서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달랬다. 빨래를 두들겨 빨 때 쓰는 방망이나 디딜방아의 방앗공이, 절굿공이, 얼레빗, 백성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나졸들의 육모방망이 등은 모두 박달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도깨비를 쫓아내는 상상 속의 방망이,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무명의 시민이 응징할 때 쓴 방망이도 역시 박달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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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우리 나무> 책표지. ⓒ 눌와

책은 궁궐별로 분류, 본문에 앞서 궁궐 전체 나무 지도를 수록했다. 그런 후 그 궁궐의 나무들을 각각 다룬다. 주제를 정해 직접 다룬 나무는 114종. 관련지어 설명하는 나무까지 합하면 300종이 넘는다. 그런데 초보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당 나무의 전체 모습을 담은 사진은 물론 꽃과 잎, 줄기 등을 찍은 부분 사진을 모두 수록했다.


건축자재로는 물론 예술작품이나 생활용품으로, 먹거리나 약재로 쓰이는 등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존재였던 나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두루두루 유용하게 쓰이는 고마운 존재이다. 이와 같은 나무들의 생태적 특성은 물론 나무에 얽힌 이야기, 쓰임새, <일성록>이나 <동의보감> 같은 문헌 속 나무, 등, 나무 관련 지식을 풍성하게 들려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사실 이 정도로도 책의 매력은 충분하다. 워낙 많은 것들을 들려주니 말이다. 그런데 이에 해당 나무가 서 있는 곳을 표기한 나무지도를 주제마다 다시 실어 접근성을 높였다. 게다가 생김새가 비슷해 혼동하기 쉬운 나무들을 구별하는 방법까지 알려 준다. 그것도 구별하는데 핵심이 되는 부분 사진들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우리 궁궐에는 나무가 많다. 산책하다보면 많은 세월이 느껴지는 나무들이나, 예쁘게 꽃피우고 있는 식물들을 제법 만나게 된다. 이름표라도 있으면 도움 되겠지만 이름표 없는 나무들이 더 많은 현실이다. 게다가 그만그만, 비슷한 나무들이 좀 많은가. 어떤 나무에 대해 궁금해도 쉽게 알 수 없거나, 혼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무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의 이런 사정을 충분히 헤아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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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보고 싶었던 고추나무의 열매. 지난해 여름 찾지 못해 아쉬웠었다. 외에도 히어리, 미선나무, 백송 등 흔하지 않은 나무들이 많은 창경궁이다. 대온실에서는 전국의 천연기념물 지정 직계후손 나무들도 볼 수 있다. 대부분 분재라 한편 아쉽긴 하지만.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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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는 산사나무도 여러 그루 있다. 현재 익어가는 정도가 저마다 다르다. 아마도 자연 조건에 따라 다를 것. 그 차이를 지레짐작, 느껴보며 산책하는 것도 좋겠다. ⓒ 김현자

사진이 많아 더욱 만족스런 책이다. 출판사에 의하면 800장 가량의 사진들이 수록됐다고 한다.

"회화나무를 확실하게 알게 되어 좋다. 작년 여름에 어딜 갔는데 흰색 꽃이 잔뜩 핀 나무가 있는 거야. 잎도 아까시나무하고 비슷하잖아. OO이 하고 '아까시나무다, 아니다' 좀 그랬거든. 내가 기어코 아까시나무라고 했더니 언니는 봄마다 꽃 따먹고 이파리 가지고 놀던 아까시나무를 잊었냐? 고향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타박하는거야. 집 뒤에 큰 아까시나무가 있었거든. 오늘 창경궁에 오길 잘했다. 나무도 확실하게 알게 되고, 역사도 쉽게 이해되고. 정말 좋네. 애들하고 오면 좋겠다."

궁궐에 관한 책은 많다. 그런데 전각이나 인물, 유래 위주의 책들이 대부분. 같은 공간에서 살아온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아마도) 없다. 식물 혹은 나무 관련 책도 많다. 하지만 역사까지 관련 지어 이야기하는 책 또한 드물다. 우리 궁궐에서 조상들과 함께 해 온 우리 나무들이 주인공인 이 책이 고마운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 창경궁은 2019년 1월 1일부터 야간 관람이 가능해졌다. 특정의 관람권으로 일정 기간 횟수 제한없이 상시 출입할 수도 있다. 자세한 것은 창경궁 누리집에 있다.


김현자 기자(ananhj@hanmail.net)

2019.09.0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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