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대한 김일성의 유별난 관심, 대체 왜

[컬처]by 오마이뉴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인민대학습당 ①


2018년 이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이어지면서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 분위기가 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도서관이 새삼 궁금해졌다. 북한은 어떤 도서관 환경과 책문화를 가지고 있을까?


해방 전 북한 지역은 남한보다 도서관이 많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38선 북쪽에는 평양부립도서관를 비롯한 7개 도서관이 있었고, 나머지 도서관은 모두 38선 이남에 있었다.


해방 전 한반도 북부보다 남부 지역에 도서관이 많았던 것은 왜일까? 그 이유는 일본인이 다수 거주하는 도시가 상대적으로 남쪽에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를 '부'로 승격시켰고, 부 단위에 '부립도서관'을 지었다.

해방 전후 북한 지역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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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평양 시가. 1913년 일제는 평양을 ‘부’로 지정했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반부 개발을 추진했다. 일제는 광물자원이 풍부한 북한 지역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개발했다. 1930년대 일제는 평양을 인구 50만이 사는 도시로 개발한다는 ‘마스터플랜’을 세우기도 했다. ⓒ Wikimedia Commons

일제 강점기 38선 이북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평양부립도서관'은 1928년 문을 열었다. 1937년경 평양부립도서관은 식민지 조선에서 경성부립도서관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장서를 자랑하는 공공도서관이었다. 하루 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문자 수도 대구부립도서관의 3배, 부산부립도서관의 4배에 달했다.


평양의 도서관 이용자는 왜 이렇게 많았을까? 교육열이 높고 학교가 많이 설립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타 지역보다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평양부립도서관은 해방 이후 '평양시립도서관'으로 전환되었다.


근대 도서관 제도가 이식된 '일제 강점기 도서관'을 북한은 어떻게 평가할까? 북한에서 출간된 <조선대백과사전>은 식민지 시대 일제가 세운 도서관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일제는 조선 강점 이후 식민지적 문화말살정책을 실시하면서 수많은 민족고전들을 약탈하고 총독부를 비롯한 식민지 통치 기관들에 어용도서관들을 설치하여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문헌자료들을 보장하도록 하였으며 일본인 거류민들과 학생들을 위하여 서울과 평양, 부산을 비롯한 큰 도시들에 보잘것없는 공공도서관들을 세웠다.

북한은 일제가 세운 도서관을 2가지 키워드로 정리하고 있다. '어용도서관' 그리고 '보잘것없는 도서관'.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 도서관이 급속하게 늘어나는데, 1946년 한 해 동안 35개의 도서관과 717개의 도서실이 생겼다고 한다.


북한 지도부는 도서관 신설과 함께 공공도서관과 학교 도서실이 소장했던 일본 책을 대대적으로 수거해서 폐기했다. 이를 위해 1949년 1월 14일 내각 서적출판지도국은 일본 서적 및 출판물 단속에 관한 규정을 포고하기도 했다. 해방 후 북한은 남한보다 더 치밀한 친일파 척결 과정을 거쳤는데, 도서관 장서에 대한 식민 잔재 청산 작업도 함께 추진했다.

'도서관'에 대한 김일성의 유별난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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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대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2월 8일 출범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추대됐고, 일년 후인 1947년 2월 21일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 최초로 출범한 중앙행정기구라 할 수 있다. 도서관 수 확대가 담긴 <20개 조 정강>을 발표한 것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시절이다. ⓒ Wikimedia Commons

해방 전 남한에 비해 도서관 수가 적었던 북한에서 도서관이 급속히 늘어난 건 왜일까?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도서관이 급속히 늘어난 것은 당시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이 도서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1946년 3월 23일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명의로 새 정부에서 추진할 20개 조 정강을 발표했다. 20개 정강 중 제17조는 "민족문화, 과학 및 기술을 전적으로 발전시키며 극장, 도서관, 라디오 방송국 및 영화관의 수효를 확대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도서관 사업'을 국가의 기본 과업으로 활성화하겠다는 의지는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된다.


북한의 경우 최고 권력자가 1946년 3월 도서관을 '정책적'으로 처음 '언급'했는데, 남한에서 최고 권력자가 도서관을 최초로 언급한 건 언제일까? 믿기지 않을 수 있는데, 1986년 1월 16일 전두환의 새해 국정연설 때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남한의 최고 권력자가 '도서관'을 정책적으로 언급하기까지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20개 조 정강 발표 후 북한의 김일성은 도서관에 대한 정책을 빠르게 시행해서 1947년에는 "35개 도서관과 717개의 도서실을 운영"하는 성과를 낳았다. 무상교육 실시와 학교 및 도서관 확대로 1945년 80%에 달했던 북한의 문맹률은 1990년대 0% 수준으로 낮아졌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대를 거치며 교육 체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으나, 북한은 "8시간 일하고 8시간 공부하고 8시간 휴식하라"는 구호로 표현되는 평생학습 제도를 시행해 왔다.

김일성은 왜 '도서관'에 관심을 가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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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문중학 시절의 김일성. ‘김성주’가 본명인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지금의 평양시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만주 길림 육문중학에는 1926년 입학한 걸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가다가 1945년 8월 원산을 통해 귀국했다. ‘동아시아의 서부’로 불린 만주는 박정희와 김일성이라는 남북한 지도자를 낳은 공간이다. ⓒ 위키백과

여기서 궁금한 것은 도서관에 대한 김일성의 '유별난 관심'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하는 점이다.


김일성은 육문중학 시절 도서 주임에 2번 뽑혀 도서관을 실질적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책을 가까이했던 아버지 김형직의 영향과 육문중학 시절의 도서관 체험, 항일 무장투쟁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책으로 학습한 경험이 어우러지며 김일성은 책과 도서관의 중요성을 체득한 것 같다.

 

김일성이 사회주의 체제 선전과 주체사상 학습 공간으로 도서관을 적극 활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일리 있는 분석이다. '도서관'에 대한 김일성의 각별한 관심은 개인 경험과 통치 목적이 어우러진 결과가 아닐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같은 시기 북한과 체제 경쟁을 했던 이승만과 박정희는 왜 김일성처럼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선전 공간으로 '도서관'을 활용하지 않았을까? 도서관 체험 면에서 김일성이 학교 수준의 도서관(육문중학)을 경험했다면,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은 최고 수준의 도서관을 경험한 바 있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나라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은 남한과 북한 모두 비슷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통계를 보면 북한의 도서관 인프라가 월등하다. 1950년대 후반 북한은 1차 인민경제계획 5개년 계획을 마련하는데, 도서관의 건물과 장서를 얼마나 확장할지 수치까지 명시해서 추진했다.


상대적으로 남한의 도서관은 1970년대까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모두 열악했다. 1970년대까지 북한 경제 수준이 남한보다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남한이 북한 경제를 압도한 이후에도 남한의 도서관 인프라는 한동안 형편없었다.


두 사람이 합쳐 30년 넘게 한반도 남녘을 통치한 이승만과 박정희는 도서관 정책 면에서 누가 더 낫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일제 강점기와 비교해도 이 시기 남한 도서관이 눈에 띄는 성장을 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을 통해 최고의 도서관 인프라를 체험한 유학파 관료들이 권력자 주변에 포진한 이후에도 ​대한민국 도서관 정책은 '방치'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남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 도서관에 '소홀'했고,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 도서관을 적극 '활용'한 걸까? 이 생각이 맞다면 도서관을 두고 남한과 북한 권력자가 보인 모습은 판이하지만 체제 유지를 위한 '무관심'과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남북은 '닮았다'.

해방 후 북한의 3대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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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종합대학 전자도서관. 김일성종합대학은 ‘본관’을 허물고 똑같은 모양의 ‘전자도서관’을 2010년 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층 높이, 1만 2천637 m2 면적의 본관은 김일성종합대학 부지 중 가장 높은 언덕에 지었다. 본관이 대학의 중심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상징 건물인 본관을 ‘전자도서관’으로 새로 지은 것에서 정권의 관심과 정책 방향을 읽을 수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전자도서관 현관에는 2009년 12월 17일 김정일이 한 말이 적혀 있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 stephan by flickr

해방 후 북한의 3대 도서관을 꼽으라면 평양의 국립중앙도서관과 과학원 도서관,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 세 곳이 꼽힐 것이다. 북한은 1945년 11월 13일부터 운영해온 '평양시립도서관'을 1948년 10월 내각 결정을 통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개편했다.


개편 당시 국립중앙도서관은 교육성 소속이었으나 1949년 1월 문화선전성 소속으로 바뀌었다(교육성과 문화선전성은 합쳐서 '교육문화성'이 된다). 중구역 중성동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은 출범 당시 장서량이 3만 5천 권이었다. 1945년 서울에 개관한 국립도서관 장서가 28만 4457권이었으니까, 평양 국립중앙도서관 장서는 서울 국립도서관 장서의 12% 수준에 불과했다.


평양 국립중앙도서관 장서는 빠르게 늘어 1950년 6월에는 11만 5천여 권으로 3.5배 증가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평양은 폭격으로 초토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도 큰 피해를 입었다. 평양 국립중앙도서관 건물은 파괴되고 전체 장서 중 61%에 해당하는 7만 500권이 불탔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복구 사업 담화를 발표하면서 도서관 복구와 강화를 직접 지시했다.

도서관 사업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앙에 국립도서관을 복구, 확장할 것이며 도소재지, 주요 도시들에 도서관을 설치할 것을 인민경제계획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북한은 1953년 9월부터 국립중앙도서관 복구를 시작해서 1954년 8월 15일 다시 문을 열었다. 1954년 말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은 720m2의 3층 별관을 새로 짓고, 열람실과 서고를 각각 1.5배와 2배 확장했다. 서가를 연이은 길이는 5km를 넘겼다. 한국전쟁 직후 도서관을 빠르게 복구했음을 알 수 있다. 1957년에는 책과 잡지, 신문, 화첩, 악보와 지도, 포스터, 각종 인쇄물과 레코드판을 포함하여 15개 언어, 43만여 부의 자료를 확보했다.


자료량이 늘면서 평양 국립중앙도서관 이용자도 크게 늘어 1956년 한 해 동안 14만 5천여 명이 20만 부가 넘는 자료를 이용했다. 이용자 중 절대 다수인 80%는 학생이었고, 노동자와 농민, 사무원, 학자가 나머지 20%를 차지했다.


이 시기 평양 국립중앙도서관은 관내 열람뿐 아니라 범위를 정해 관외 대출을 허용했고 그 범위를 넓혀갔다. 도서관 이용시간은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였으며, 도서 열람과 대출뿐 아니라 강연회와 독자 좌담회, 문학의 밤 같은 행사를 개최하고 서지학과 도서관학 연구, 출판 사업까지 진행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수백만 권의 장서를 소장할 수 있는 8천여 m2의 서고, 5백여 m2의 국가서고, 200여 m2의 고전 희귀 서고, 1천 명 넘는 이용자를 수용할 수 있는 열람실, 500여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목록실, 휴게실, 마이크로필름실, 악보 음악실과 상설 전시실, 제본실, 인쇄소와 식당을 계획했다. 이 계획을 그대로 추진해서 1963년 10월 1만 8천 m2 규모의 현대적 시설을 갖춘 새 국립중앙도서관을 건립했다. 1973년 북한은 국립중앙도서관의 이름을 '중앙도서관'으로 바꿨다.


'과학원 도서관'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2월 과학원의 부속 도서관으로 문을 열었다. '과학원'은 학술 연구 분야 엘리트가 모인 북한 최대의 연구기관이다. 과학원의 초대 원장은 홍명희, 2대 원장은 백남운이 맡았다.


과학원 산하에는 9개(화학, 공학, 물리 수학, 의학, 역사학, 경제 법학, 고고학 및 민속학, 조선 언어학 및 문학, 생물학) 연구소를 뒀는데, 도서관은 과학원의 학술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과학 전문 도서관으로 출범했다. 1953년 1만 9천여 권에 불과했던 과학원 도서관의 장서는 1957년 25만 권을 넘길 정도로 크게 늘었다.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은 1946년 10월 김일성종합대학 출범 이후 개관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열람실 규모 면에서 북한에서 제일가는 시설을 자랑했다. 문을 열 당시 책이 부족해서 서적 기증 운동을 펼쳐 4만여 권을 기증받았다. 이렇게 모은 6만 3천여 권으로 1947년 3월 도서관을 개관했다. 1957년에는 36만 권 장서를 확보했다.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운영해서 교수와 학생의 연구 학습을 지원했다.


그나저나 1950년대 북한에서 가장 많이 발행되어 읽힌 책은 뭘까? 레닌과 스탈린, 김일성 저작이 상위를 차지했지만 가장 많이 발행된 책은 <위생 독본>이라는 교과서다. 무려 297만 부를 찍었다고 한다.

이상적인 사회주의 도시,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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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과 평양. 주체사상탑 전망대에서 바라본 평양 풍경. 대동강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옥류교이고 강 위에 보이는 섬은 ‘능라도’다. 능라도에는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경기장 ‘5.1경기장’이 있다. 고층 아파트가 늘어선 곳은 ‘창전거리’이며, 멀리 삼각형 형태로 솟은 건물이 북한에서 가장 높은 ’류경호텔’이다. ⓒ Wikipedia

도서관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북한이 자랑하는 도서관이 '인민대학습당'이다. 인민대학습당은 북한의 국가도서관으로 남한의 국립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곳이다. 인민대학습당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인민대학습당이 자리한 '평양'이라는 도시와 그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1980년대 이전까지 평양은 공산국가 진영에서 '이상적인 사회주의 도시'로 손꼽혔다고 한다. 해방 전인 1940년 평양의 인구는 28만 6천 명이었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난 1993년 평양 인구는 10배에 달하는 274만 명으로 늘었고, 2008년에는 325만 명을 넘어섰다. 북한 전체 인구의 13%가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 2012년 기준으로 평양은 2629 km2 면적에 행정구역은 18개 구역과 2개 군으로 나뉘어 있다.


평양을 서울과 비교하면 서울보다 평양의 면적이 4배 넓다. 인구는 평양이 서울의 1/3 수준이니까, 인구밀도가 상당히 낮은 편이다. 평양과 서울의 인구밀도를 비교하면 평양은 1 km2 당 1천234명인데, 서울은 1만 7천288명이다. 서울의 밀도가 14배 높다.


평양의 도시 공간에 대한 책을 낸 건축가 임동우는 사회주의 도시의 3가지 특징으로 생산의 도시(city of production), 녹지의 도시(city of green), 상징의 도시(city of symbolism)를 꼽은 바 있다. 임동우가 꼽은 특징을 중심으로 평양을 살펴보면, 이 도시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평양은 도시 면적에서 산업단지의 비중이 높다. 실제로 평양공업지구는 북한에서 가장 큰 공업단지다. 이 점이 평양과 서울의 차이점 중 하나다. 예로부터 버드나무가 많아 '류경'(柳京)이라 불린 평양은 류경호텔, 옥류관, 청류관처럼 '버들 류'를 넣은 이름이 많다. '류경'이라는 별칭처럼 평양은 나무를 비롯한 '녹지'가 많은 도시다.


서울은 도시 확장을 억제하는 녹지가 그린벨트라는 이름으로 도시 외곽에 띠 형태로 존재한다. 평양의 경우는 외곽의 녹지와 농지를 도시로 끌어들이기 위해 방사형으로 배치했다는 차이가 있다. 평양의 1인당 녹지 면적은 서울을 비롯한 OECD 국가의 평균치보다 2배 이상 높다.


사회주의 도시는 혁명을 선전하고 대중 선동과 집회를 위한 광장과 상징 기념물을 중시한다. 평양 역시 마찬가지이며,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선 후 평양은 옛 도시에 없던 '광장'을 새롭게 확보했다. 평양의 중심축에 자리한 김일성광장과 김일성동상이 서있는 만수대대기념비광장은 그렇게 조성된 공간이다. 김일성경기장과 평양교예극장, 빙상관 앞에 확보한 광장도 같은 맥락이다.


김일성은 교시를 통해 광장과 번화한 거리에 노동자를 위한 궁전, 극장, 도서관, 영화관, 체육관 같은 문화시설을 짓도록 했다. 이런 공간 구성은 인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한다는 사회주의 체제 선전의 측면이 강하다.


북한 전역에는 14만 개가 넘는 선전용 기념비와 동상이 있는데, 이중 상당수가 평양에 있다. 주체사상탑과 조선로동당창건기념탑, 개선문, 천리마동상, 김일성영생탑, 만수대대기념비,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통일의 문이 이런 상징 조형물에 속한다.


만수대에 세운 김일성동상은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노동당창건기념탑과 마주 보는 형상이다. 김일성광장과 주체사상탑이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도시의 축선을 형성하는 것처럼, 만수대 김일성동상과 노동당창건기념탑도 이와 평행하게 도시의 축을 구성하고 있다.


평양 도시계획 중 주목할 부분은 일정 면적과 주민 수에 맞춰 '도서관'을 기본시설로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1960년대부터 평양은 '소구역계획방법'을 바탕으로 도시 설계를 진행했는데, 크기 400~500미터, 주민 수 6~9천 명 단위에는 유치원, 학교와 함께 아동도서관을 두었다. 이보다 큰 구역에는 병원, 영화관, 체육관과 함께 구역도서관, 구역책방을 두도록 했다. 도시 '기본시설'의 하나로 일찍부터 도서관을 명시한 점이 눈에 띈다.


차이점을 먼저 언급했지만 서울과 평양의 공통점도 많다. 남북한의 '수도'이고 둘 다 역사가 오랜 도시다. 가장 많은 인구가 몰려 살고 한강과 대동강이라는 큰 강이 도시를 가로지른다. 서울이 한강을 기준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불리듯 평양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기준으로 대동강 동쪽을 '동평양', 서쪽을 '서평양', 보통강과 대동강 사이를 '본평양'이라고 부른다.


한강에는 여의도와 밤섬이, 대동강에는 양각도와 능라도라는 섬이 있다. 한강에 유람선이 떠다니는 것처럼, 대동강에는 대동강호, 무지개호 같은 '식당배'가 있다. 아파트가 많다는 점도 비슷하며 지역 전화번호도 02로 같다.

우리가 몰랐던 평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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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에서 바라본 류경호텔. ’한국전쟁’(Korean War)을 남한은 흔히 ‘6.25 사변’이라고 하고,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한다. 나라마다 이 전쟁을 얼마나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은 보통강변에 있고 근처에 정주영 회장을 기리며 현대그룹이 세운 류경정주영체육관이 있다. 류경호텔은 330미터 높이의 105층 건물이다. 콘크리트 구조로 경사각 75도, 건축면적은 36만 제곱미터다.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2008년 이집트 국영통신사 오라스콤이 넘겨받아 공사를 재개했다. ⓒ Wikipedia

서기 586년 고구려의 수도가 된 평양은 1920년 6만 명이던 인구가 1945년 해방 무렵에는 34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같은 시기 경성(서울)과 부산보다 평양의 인구 증가세가 더 높았다. 북한 지역을 전략적으로 개발한 일제의 정책 때문인데, 북한의 수도로 자리 잡으면서 평양의 인구는 더욱 늘었다.


한국전쟁 때 미 공군은 태평양전쟁 5년 동안 투하한 폭탄보다 더 많은 43만 개의 폭탄을 평양에 퍼부었다. 당시 평양 인구가 40만 명 남짓이었는데, 1인당 1개 이상의 폭탄이 떨어진 셈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폭격을 퍼부은 미국은 "100년이 걸려도 북한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국전쟁 전 40만 명이 넘었던 평양 인구는 1951년 12월 18만 1천 명으로 급감했다.


1951년 미 극동공군 폭격 부대 지휘관 오도넬(Emmett O'Donnell Jr.)은 미 상원에서 "모든 것이 파괴되어 제대로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증언했다. 전쟁 발발 5개월 만에 미 공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평양은 평양성 중성의 서문인 '보통문'(普通門)을 제외하고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


보통문이 무사했던 것도 미 공군이 폭격의 기준점으로 남겨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전쟁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도 파괴되지 않은 보통문은 그래서 '신문'(神門)이라 불리며, 북한의 국보유적 제3호다. 참고로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는 평양성, 제2호는 안학궁터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김일성은 3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전후 복구 작업에 착수했다. 복구 과정에서 북한은 동구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원조를 받았는데, 이때 세운 평양 건축물 중 상당수가 동유럽 건축 양식인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김일성은 건축가 김정희에게 평양 재건계획을 지시했다. 전쟁이 끝난 후 평양은 김정희가 1953년 작성한 마스터플랜을 바탕으로 재건되었다. 모스크바 건축아카데미에서 건축을 공부한 김정희는 1930년대 일제가 작성한 평양 마스터플랜과 1951년 자신이 작성한 평양특별시 재건종합계획도를 참고로 1953년 새로운 마스터플랜을 작성했다.


김정희는 인구 1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대동강 건너편 동쪽으로 평양을 확장하고 격자형으로 도시를 구획한 후 사회주의 도시 요소를 도입했다. 박정희 시대에 김수근이 정권 차원의 대형 건축 프로젝트를 도맡은 것처럼, 김정희 역시 김일성의 총애를 받으며 평양을 비롯한 안주, 청진의 주요 도시 재건과 대형 건축물을 담당했다.


우리는 북한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시점부터 평양이 북한의 '수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평양은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이 공포되면서 비로소 수도가 되었다. 그전까지 평양은 '임시 수도'였다.


그러면 1972년 이전까지 북한은 어디를 수도로 생각한 걸까? 바로 '서울'이다. 1948년 공포된 북한 헌법 제10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수도)는 서울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60년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기 10차 전원회의는 '통일'에 대비해 '서울시 기본총계획'을 수립하도록 결의하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과 '조선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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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야경. 북한은 어떤 나라인가?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라는 구호처럼 ‘유격대국가’인가, 아니면 ‘선군정치’라는 말처럼 군을 앞세운 ‘정규군국가’인가. 수령을 중심으로 한 ‘가족국가’, 국가적인 의례가 일상화된 ‘극장국가’, 김일성을 신격화한 ‘신정국가’로부터 김정은 체제 이후의 ‘정상국가’까지 북한을 정의하는 여러 개념이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북한을 제대로 모르는 게 아닐까. ⓒ William Proby by flicker

1950년대 북한은 성장 속도가 빠른 나라였다.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의 '원조'와 인민의 지지에 힘입은 바 크지만 1970년대 초까지 북한은 경제력에서 남한을 앞섰다.


1964년 북한을 방문한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Joan Robinson)은 한국전쟁 후 북한의 복구와 경제 성장을 '조선의 기적'(Korean Miracle)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체제 경쟁은 사실상 끝난 걸로 보이지만 남과 북은 '한강의 기적'과 '조선의 기적'으로 불리는 기적 같은 성장을 경험한 공통점이 있다. '빠른 성장' 만큼 '빠른 붕괴'가 문제였지만, 북한은 정치 경제 분야에서 안정기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연면적 5만 m2가 넘는 대형 건축물을 다수 지었다.


인민문화궁전, 조선혁명박물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평양체육관, 만수대예술극장, 4.25문화회관은 모두 이때 지었고, 김일성광장과 함께 평양의 양대 광장이라 할 수 있는 만수대광장과 대기념비도 1972년 완공했다. 기념비적 건축물과 함께 북한은 1970년대부터 15층 내외의 '고층 살림집', 즉 아파트를 천리마거리와 서성거리에 짓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는 창광거리에 30층, 경흥거리에 40층짜리 초고층 살림집을 지었는데, 북한은 1950년대부터 주택 보급 목적으로 아파트를 도입한 걸로 알려져 있다. 다만 남한은 전체 주택에서 아파트 비중이 60%를 넘지만 북한은 평양만 35%가 넘을 뿐 다른 지역은 10%를 넘지 않는다. 도입은 북한이 빨랐지만 아파트 보급률은 남한이 훨씬 높다.


서울의 아파트가 '단지형'이라면 평양의 아파트는 길가에 늘어선 '가로형'이다. 남한은 아파트를 '평수'로 계산하지만 북한은 '방의 개수'로 구분한다. 방의 개수는 부양가족 숫자에 따라 배정한다. 아파트 입주 순서는 재개발 전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이 입주 1순위를 배정받는다고 한다.


서울 지하철보다 한 해 먼저 개통한 평양의 지하철은 총 3개 노선으로 건설됐다. 서울이 1, 2, 3호선 숫자로 노선을 명명한데 반해, 평양은 천리마선(1973), 혁신선(1978), 만경대선(1987)으로 이름 지었다. 서울은 '지명'을 바탕으로 역 이름을 짓는데, 평양은 부흥, 영광, 승리, 통일, 붉은별, 광복, 광명, 낙원 같은 '구호'를 중심으로 역명을 지었다. 평양 지하철역 중 가장 깊은 역은 200미터, 평균 깊이가 100미터에 이르는데, 서울 지하철역처럼 '방공호' 기능을 하기 위함이다.


1980년대 들어 평양은 '국제도시'를 표방한다. 프랑스와 합작으로 국제호텔을 계획해서 고려호텔(45층, 1985)과 양각도호텔(47층, 1995)을 완공했다. 이 시기 지은 건축물은 주체건축이 아닌 국제적 흐름을 따르는 형태로 지었다. 평양의 국제도시 표방은 1989년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전후로 활발했다.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올림픽을 의식하지 않았나 싶다.


북한은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와 대기근으로 1990년대부터 '고난의 행군' 시대로 돌입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 수십에서 백만 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이 희생된 걸로 알려졌다. 경제난과 식량난의 영향으로 류경호텔의 공사가 중단되고 대규모 건축물 공사도 줄었다.


고난의 행군이 끝난 후 1999년부터 북한은 '강성대국' 건설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 체제가 출범하면서 평양의 대규모 공사는 전보다 늘었다. 창전거리(2012년), 은하거리(2013년), 위성거리(2014년), 미래과학자거리(2015년), 고층 건물이 늘어서 '평해튼'이라 불리는 려명거리(2017년)가 완공된 것도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다.


백창민 기자(bookhunter72@naver.com),이혜숙 기자(sugi9531@naver.com)

2019.11.1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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