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울수록 따뜻하다... 한겨울의 역설이 일어나는 곳

[여행]by 오마이뉴스

입김 내뿜으며 커피 한 잔, 이게 바로 겨울 야영의 맛


여행에서 힘듦과 낭만은 대부분 비례한다. 궁극적으로 여행은 쉼이지만 그 과정에서 몸이 겪는 고난은 피할 수 없다. 힘듦의 종류에 따라 각자의 여행 스타일이 달라질 뿐, 어떠한 종류의 고생이라도 겪게 마련인 것이다.


나의 낭만은 추위와 연결돼 있다. 그래서 한겨울에 산 정상에 오르고 영하의 날씨에 야외에서 잠을 청한다.


지난 1월 8일 부푼 기대를 안고 국립화천숲속야영장으로 향했다. 평소 숙영지로 삼던 곳에 비하면 별을 7개 줘도 모자를 정도로 호화로운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전기가 들어오고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데다 샤워장에는 온수까지 나오니 말이다.


이곳은 산림청에서 최초로 조성한 야영 전용 시설물이다. 비슷한 곳으로 청옥산 자연휴양림이 있지만 이곳은 휴양관 없이 오직 야영장만 있다는 차별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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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장에 뜬 보름달. (ContaxS2/RDP3)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이 아름다워 숯에 불을 붙이다 말고 삼각대에 카메라를 올렸다. ⓒ 안사을

본래 이 여행의 목적은 눈 구경이었다. 넉넉하게 일주일의 시간을 잡고, 가장 극적인 설경을 위해 설악산 등반 날짜를 먼저 정한 후 나머지 시간 동안 근처 관광을 하는 여정이었다. 장고 끝에 12일 설악산을 오르기로 하고 그 전에 3박 4일 동안 화천숲속야영장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입실 바로 전날 예약을 해도 자리는 충분했다. 39곳의 자리 중 단 4곳만 예약이 완료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성수기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추첨을 통해 당첨돼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예약완료가 되면 커다란 행운이라도 얻은 듯 주변 사람들이나 온라인에 당첨 사실을 자랑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런 곳을 바로 전날 결제하고 들어올 수 있다는 것 또한 겨울 야영의 묘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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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대신 차에서. (Konica현장감독28/Portra400)쉘터를 생활 공간으로, 차량을 숙박 공간으로 이용한다. ⓒ 안사을

까닭없이 고통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은 변태나 도인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추위와 싸우면서 이렇게 굳이 야영을 하는 이유는 당연히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밤풍경이고, 소소한 것들로는 불쬐기, 드립커피, 누룽지의 참맛 등이 있다.


사설캠핑장과는 다르게 국립 자연휴양림의 야영장에서는 장작을 태울 수 없다. 대신 화로대를 사용해 숯에만 불을 피울 수 있다. '불멍이 빠진 캠핑이라니 너무 시시하지 않나'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아니더라도 여명처럼 곱게 타는 숯불로도 충분히 낭만을 즐길 수는 있다.


추운 겨울 날 아침, 숨만 쉬어도 목욕탕의 굴뚝처럼 입김이 큰 덩어리로 빠져나가는 쉘터 안에서, 드립커피를 내리기 위해 작은 코펠에 물을 끓여 보았는가. 작은 버너에서 나오는 불꽃과 고작 350ml의 물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얼마나 따뜻하겠냐만은, 이곳 캠핑장에서는 춥기 때문에 더 따뜻한 한겨울의 역설이 날마다 일어난다.


필자의 겨울 캠핑 팁 중 하나는 바로 '누룽지'다. 잘 말린 누룽지를 챙겨와서 아침마다 끓여먹으면 추운 겨울밤 웅크렸던 몸과 마음이 풀어짐은 물론이고 아침식사가 훌륭하고 간단히 해결되므로 비용도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물을 넉넉하게 잡아 남은 숭늉을 텀블러에 넣어두면 따뜻한 아메리카노보다 훨씬 든든한 음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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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와 커피물. (ContaxS2/Portra400)난로 위에서 커피물이 은근히 덥혀지고 있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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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커피. (conika현장감독28/Portra400)아웃도어 활동에도 깨지지 않는 스테인레스 드립세트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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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룽지와 텀블러. (Conika현장감독28/Portra400) ⓒ 안사을

야영의 가장 큰 장점은 숙소가 곧 출사지가 된다는 것이다. 텐트의 문을 열면 별이 쏟아지고 달이 이마 위에 떠 있다. 이번 여행은 아쉽게도 별을 찍을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다. 달이 가장 밝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대신 달 궤적을 찍어보고자 했다. 조명이 없이도 숲속을 걸을 수 있을 정도의 달빛이었기 때문에, 장노출로 궤적을 담으면 하늘 아래의 풍경도 환하게 찍힐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숲속야영장은 인공조명이 있고 나무가 많아서 하늘을 찍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3박을 예약했으나 출사를 위해 이틀째에는 최소한의 짐만 꾸려서 소양호로 '차박'을 떠났다. 새벽까지 달 궤적을 담고 날이 밝으면 근처 청평사를 들렀다 올 계획으로 말이다.


인제와 양구를 연결하는 국도 아래쪽, 소양호의 물가로 내려가면 작은 마을들이 드문드문 있다. 가장 유명한 마을은 '물안마을'이다. 물안마을에서 청평리로 가는 길은 왕복 1차로의 매우 좁은 도로인데 이 도로를 타고 얼마쯤 가다 보면 '승호대'라고 이름붙은 공간이 나온다. 전망 데크 등 어떠한 구조물도 없는 좁은 도로가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동쪽 방향으로 소양호의 수면이 탁 트여 보인다. 여름에는 은하수가 떠오르는 방향이다.


승호대에 이르기 50미터 전쯤 딱 한대의 차를 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배터리에 인버터를 연결한 후 전기장판을 폈다. 침낭을 가지런히 펼쳐놓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달이 일찍부터 떠올랐지만 최소한의 어둠이 내려야 노출이 초과되지 않는다. 아래의 사진은 저녁 9시경부터 새벽 1시경까지 셔터를 열어놓은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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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지나간 자리. (SW612/Pro400H) ⓒ 안사을

셔터를 열어놓은 약 4시간 동안 두 대의 차가 지나갔고 자정이 다 되어서는 차 한대가 카메라 근처에 멈췄다. 혹시 삼각대를 잘못 건드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달려가 양해를 구했다.


"선생님. 죄송한데 부탁 말씀 하나 드리려고요. 지금 장노출로 사진을 담고 있어서요. 불빛이 카메라 앞쪽으로만 안 비춰지면 괜찮습니다.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 그렇군요. 괜찮아요. 어차피 카메라가 멀리 있어서 크게 신경 안 쓰여요. 우리도 한 30~40분 바람 쐬다 갈 거예요."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무시는 거예요?"

"네. 차에 누울 수 있게 해놔서요."

"젊어서 좋네요.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예의를 갖춘 대화를 나누고 나면 참 기분이 좋아진다. 타인에게 친절할수록 오히려 나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카메라를 접고 다음날 일정을 위해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새벽 공기는 영하로 떨어져 있었지만 어느 해보다 따뜻한 겨울이었다.

올 겨울 청평사는 늦가을 같았다

승호대에서 사진을 담느라 북산면 쪽으로 한참을 돌아왔지만 야영장에서 청평사까지 바로 가면 10km도 채 되지 않는다. 원래 물안마을에서 청평사까지 가는 길은 제설이 돼 있지 않아 겨울철에는 대단히 위험한 구간인데, 올해에는 길에 쌓인 눈이 하나도 없었다.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다. 온통 단풍나무가 가득한 것을 보면서 가을철에 오면 경치가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폭포는 얼어 있지 않았고 얼마 전 내린 비로 수량이 풍부했다. 1월의 풍경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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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송폭포. (Contax S2/RDP3)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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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대신 얼음. (Contax S2/RDP3)바위를 타고 흘러내린 물이 가을을 품고서 멈추었다. ⓒ 안사을

혹시나 눈 쌓인 청평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산 속이고 무려 춘천이니 아무리 따뜻한 겨울이라 해도 미처 녹지 않은 눈이 기와의 북쪽 면에는 조금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고, 대신 아직까지도 붉은 빛을 간직하고 있는 한겨울 단풍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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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단풍. (Contax S2/RDP3) ⓒ 안사을

가장 좋은 각도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카메라를 움직이며 틀을 잡고 있는데 머리 뒤로 딱다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들렸다. 산사에 이르기 직전 울리는 그 소리는 마치 자연이 내는 목탁소리와 같았다. 문득 사진이 아니라 영상이라면 지금의 이 풍경과 소리를 보다 현장감 있게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10초가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은 다시 마음 속으로 가라앉았다. 현장의 생생함과 정확함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여행기에서만큼은 멈춰 있는 사진 한 장과 몇 문장의 글을 통해 당시의 소리를 함축하고 싶었다.


한겨울 계곡 물이 여전히 싱그러운 이끼를 품은 바위를 돌아나갈 때. 얼었다 녹은 땅 때문에 낙엽을 밟는 소리가 평소보다 눅눅할 때. 이런 소리들의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 방법은 녹음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 개인의 감성과 연상을 더하여 각자 상상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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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계곡. (Contax S2/RDP3)한겨울에도 싱그러운 녹색빛의 이끼가 바위 위에 부드럽게 깔려있다 ⓒ 안사을

겨울인 듯 가을같은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30분 남짓만 걸으면 금세 청평사에 도착한다. 청평사는 오봉산의 암봉을 배경으로 아담하게 서 있다. 사시사철 아름다울 것 같은 모습이다.


절내에 들어서자 지붕 밑에 가득한 빨간 소원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등들은 산중에서 만나는 작은 돌탑들과 같은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이 소품들은 비단 자신을 향한 갈망뿐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소망 또한 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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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의 청평사. (Contax S2/RDP3)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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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등. (Contax S2/RDP3)누구를 위한 소원일까 ⓒ 안사을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 매표소 근처에 있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재미있게도 식당 사장님이 이틀 뒤 전북 전주(필자의 주거지)로 여행을 가신다고 하셨다. 맛집을 추천해 달라고 하셔서 이런저런 장소를 말씀드렸다. 식당 주인 겸 주방장에게 맛집을 추천하다니, 왠지 평범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 슬며시 미소가 새어나왔다.


춘천 시내로 나가서 저녁 찬거리를 산 후 다시 화천 야영장으로 들어갔다. 짐을 그곳에 놓고 다른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다 온 것이 마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숯불에 양고기를 구워먹고 차를 한 잔 한 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잠을 청했다. 코는 시려웠지만 침낭 속은 온화했고, 설악산에 내린 눈이 녹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더 따뜻했다.


이 기사의 사진은 모두 네거티브 및 포지티브 필름을 이용해 촬영 후 직접 스캔했으며 사이즈 조정 등 기본적인 보정만 했음을 밝힙니다. 사진마다 기종 및 필름의 종류를 괄호 내에 표기했습니다.


안사을 기자(tkdmf41@naver.com)

2020.02.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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