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남편 두고 바람 피운 그녀가 원한 것

[컬처]by 오마이뉴스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나에게 결혼은 도피처였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 부모님의 눈빛과 말들에 숨이 막힐 것 같았고, 반복되는 연애의 실패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 무엇도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이곳의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그때 우연히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나는 도망치듯이 결혼을 선택했다.


그는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방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그와 결혼하면 아무도 나를 모르는, 부모님과도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결혼 준비하는 내내 나는 마음이 들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의 심정이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읽으며 되살아났다. 백여 년 전에 지어진 소설인데도 이야기 속 감정과 감각들이 마치 내 사연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샤를르가 처음 베르토에 갔을 때는 그녀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고 아무것도 느낄 것이 없다는 식으로 인생에 대해 잔뜩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이 가져다주는 불안, 아니 어쩌면 이 사내의 존재에 의해서 야기되는 흥분은 지금까지 장밋빛 날개를 지닌 커다란 새처럼 찬란한 시의 천공을 날아다닌다고 여겨졌던 저 멋들어진 정열을 자기 자신도 마침내 갖게 되었다고 믿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영위하고 있는 이 고요한 생활이 지금까지 꿈꾸어 왔던 그 행복이라고는 아무래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64쪽)

결혼하고 얼마 동안은 달콤한 꿈처럼 행복했다. 더 이상 부모님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함께 할 수 있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내가 정착하게 된 낯선 도시는 매일 새로웠고,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도시를 에워싼 공기는 산뜻했다. 하지만 이런 꿈같은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매일 남편이 퇴근하면 입이 아프도록 조잘대며 깔깔대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점점 우리 둘 다 말수가 줄었다. 딱히 할 말도 없을 뿐더러, 그의 사소한 습관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리고, 짜증이 났다. 심지어 '이 사람이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변함없이 나에게 친절했지만, 나는 때때로 그 친절에 영혼이 없다고 느꼈다. 그는 그저 '습관적인 친절'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나의 감정과 생각을 그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내 속마음을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게 됐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대화를 나눈 자리에는 빈 껍데기들만 따분하게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들 생활의 친밀감이 더해질수록 내면의 간격이 벌어지면서 그녀를 남편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샤를르가 하는 말은 거리의 보도처럼 밋밋해서 거기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뻔한 생각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줄지어 지나갈 뿐 감동도, 웃음도, 몽상도 자아내지 못했다. (65쪽)

내가 어쩌자고 결혼을 했던가

오마이뉴스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민음사 ⓒ 민음사

베르토라는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랑 단둘이 살고 있던 엠마 루오는 시골생활이 지긋지긋했다. 그녀에게 즐거움이란 오직 소설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주인공들의 삶과 그들의 불같은 사랑을 상상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부러진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이웃 마을 토트에서 의사 샤를르 보바리가 그녀의 집에 방문하게 됐다. 그녀에게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샤를르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어쩌면 엠마도 나처럼 '이곳'을 떠날 수만 있다면 결혼이든 뭐든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샤를르는 아름다운 엠마에게 한눈에 반했고, 엠마도 샤를르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에서 온 샤를르와의 '결혼'은 분명 그녀에게는 지겨운 시골생활에 다시 없을지도 모르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잔뜩 기대했던 결혼 역시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함께 눈 뜨고 밥 먹는 일이 반복될수록 신혼의 설렘과 긴장은 옅어졌다. 그녀가 부부 생활의 평범함과 권태로움에 놀라며 내뱉은 말은 이 소설의 명대사가 된다.

'맙소사, 내가 어쩌자고 결혼을 했던가?' (70쪽)

부유하지 않은 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일은 엠마가 꿈꾸던 '반짝반짝 빛나는 은그릇과 크리스털 잔'들이 놓여 있는 화려한 식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실은 마치 "생활의 모든 쓴맛을 그녀의 접시에 담아 차려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남편 샤를르는 결혼하고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몰취미한 인간일 뿐이다. 그녀는 공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그것에서 멀어져 갔다. 그녀를 가까이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권태로운 전원, 우매한 소시민들, 평범한 생활 따위는 이 세계 속에서의 예외, 어쩌다가 그녀가 걸려든 특수한 우연에 불과한 반면, 저 너머에는 행복과 정열의 광대한 나라가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욕망에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물질적 사치의 쾌락과 마음의 기쁨을 혼동하고, 습관에서 오는 우아함과 감정의 섬세함을 혼동하고 있었다. (90쪽)

그녀는 샤를르와 결혼하고 딸도 낳았지만, 강렬한 자극을 주는 불같은 사랑만을 좇으며 끊임없이 외도를 하고, 형편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간다. 불나방처럼 그저 욕망에 온몸을 내던지고, 소멸하는 사랑에 상처받은 짐승처럼 흐느끼다가 다시 또 다른 사랑에 몸을 내던지기를 반복했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그녀의 헛된 사랑은 모두 실패하고, 빚은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녀의 숨통을 조인다. 더 이상 사랑에 대한 희망도 없고, 빚을 갚을 능력도 없는 그녀는 음독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뿐만 아니라 집도 경매에 넘어간다. 배우자 샤를르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저 '모든 게 운명 탓'이라며 그녀를 그리워하다 눈을 감는다. 어린 딸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먼 친척 집에 맡겨지지만 형편이 어려운 친척은 그녀를 방직공장에 취직시킨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현실을 부정하고 헛된 꿈만 좇았던 엠마의 탓일까? 그녀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 결혼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흔들리는 그녀를 옆에서 잡아주지 못한 남편 샤를르의 탓일까?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그들을 파멸로 이끌었을 것이다.

황홀한 키스, 그 후

얼핏 보면 '엠마는 사치와 간통을 일삼은 나쁜 여자', '샤를르는 여자 잘못 만나 신세 망친 불쌍한 남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불쌍하긴 하지만 한편으로 샤를르는 너무 무기력했다. 엠마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기는 힘들 것이다. 그에게 엠마는 그저 '아름답고 눈부신 여신'이며, 쉽게 거역할 수 없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그녀가 입은 치마의 포근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자책했고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했다. (55쪽)

사랑이, 결혼이 참 쉽지 않다. 절대 식지 않을 것처럼 뜨거운 사랑도 언젠가는 식기 마련이고, '이 사람이다' 싶어서 한 결혼에도 어김없이 실망은 따른다. 사랑도 삶도 바람 잘 날 없이 위태롭기만 하다. 과연 인간에게 '안정된 삶'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고 한 번도 행복했던 적도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런 아쉬움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의지하는 모든 것이 한순간에 썩어 무너지고 마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


사실 애써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다 거짓이다! 미소마다 그 뒤에는 권태의 하품이, 환희마다 그 뒤에는 저주가, 쾌락마다 그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고 황홀한 키스가 끝나면 입술 위에는 오직 보다 큰 관능을 구하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 남을 뿐이다. (410쪽)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가만히 표지를 들여다본다. 책의 제목을 <마담 보바리>라고 지은 이유는 뭘까? '엠마 루오'가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쳐서 얻은 이름 '보바리 부인'. 그럼에도 끊임없이 부정하고 벗어버리고 싶어 했던 이름, '마담 보바리'. 가만히 책을 매만지며 생각한다. 나의 이름은 뭐지? 나는 어떤 이름으로 살고 싶은 걸까?


박효정 기자(ooooohjenny@gmail.com)

2020.04.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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