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진 '나르코의 선물'... "코로나 시대, 마약왕을 찬양하라"

[이슈]by 오마이뉴스

[코로나 시대의 멕시코] 악랄한 마약 카르텔이 민심을 얻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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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6일 멕시코 할리스코 주 과달라하라에서 한 여성이 유명 마약왕 '엘 차포' 구스만의 얼굴이 그려진 상자들을 정리하고 있다. 이 상자에는 이 지역 취약계층에게 보급할 물자들이 담겨 있다.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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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6일 멕시코 과달라하라 거리에서 엘 차포(El Chapo)의 이미지가 새겨진 선물 박스가 거리의 노인에게 전달되고 있다. 엘 차포는 멕시코의 유명한 마약 카르텔을 이끄는 사람이다. ⓒ EPA=연합뉴스

선물이 뿌려졌다. 보내온 이들이 달랐고 포장도 다양했지만, 그 내용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쌀과 콩 같은 기초 곡물들과 기름, 설탕, 스파게티면, 통조림 같은 식재료들, 거기에 더해지는 화장지나 비누 같은 생필품, 그리고 또한 결코 빠질 수 없는 사탕과 과자들... 여전히 5천만 명 이상의 절대빈곤 인구가 존재하는 이곳 멕시코에서라면, 누가 봐도 선물이었다. 더욱이 그들 중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는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라면 말이다.


지역에 따라 선물의 포장은 달랐지만, 어느 선물이라도 보낸 이가 누구인지,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큼직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멕시코 당국뿐 아니라 미국마약단속국이나 CIA(중앙정보국)에서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 일명 '나르코'라 불리는 마약 밀매 조직의 두목 이름들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뿌려지는 선물

어느 마을이든 선물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도착하면 마을 중심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줄을 섰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고, 왜 주냐고 묻지 않았다. 혹시라도 몸이 불편하여 그곳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도 그들이 직접 가가호호 찾아가 선물상자를 배달해줬다. 크리스마스 즈음의 산타 클로스와 다를 바 없으나, 오직 한가지 다름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중화기로 무장을 하고 스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정도일 뿐.


서로 조직은 다르지만, 일명 '나르코의 선물'이라 불리는 상자가 멕시코 각 지역에 배달되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로 모두가 자택 대피를 하던 4월 하순 경이었다. 조직 간 경쟁이라도 하듯, 자신들의 '지역구'를 기반으로 일제히 배달 서비스를 시작하고 나섰다.


선물을 했으면 증거를 남겨야 할 터. SNS를 중심으로 인터넷에는 그들의 '선행'이 떠돌았고, 순식간에 그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갔다. 이 '코로나 시절'에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하는 배고픔을 구제하니 '의적'이라는 평가도 따라다녔다. 아직 선물 상자를 받지 못한 동네에서는, 오늘이라도 올까, 혹시 내일이라도 올까 하여 목을 빼고 기다렸다.


엄연히 정상적인 정부와 공권력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싶겠지만, 사실 '나르코의 선물'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무장한 조직원들이 트럭 가득 선물을 싣고 자신들의 근거지가 되는 마을들을 다니면서 선물을 뿌렸고, 어린이날이 가까워지면 장난감을 한가득 싣고 와서 나눠주기도 했다. 연말 보너스가 나오는 시기가 되면, 현금 봉투가 전달되기도 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 연방교도소에 종신형을 받고 수감 중인 엘 차포(El Chapo)의 고향에서는 경찰마저도 연말이 되면 줄 서서 엘 차포 조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연말 보너스를 받았다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이미 공공연하다. 두 번이나 탈옥에 성공했던 엘 차포가 다시 체포되어 미국으로 인도되기 전, 그의 고향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인도 반대 시위'를 벌인 것은 사실 오랜 시간 그가 뿌렸던 선물과 돈 봉투에 대한 증거라 할 수 있겠다.

멕시코판 의적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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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원, 마약왕 구스만에 종신형 선고. 지난 2019년 7월 17일 엘 차포 구스만은 미국 뉴욕연방법원에서 종신형과 126억 달러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구스만이 2014년 탈옥했다가 다시 잡혔을 때의 모습이다. ⓒ EPA=연합뉴스

도둑이나 갱단 두목이 의인화 혹은 신격화되는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각국 정부에 대한 불만과 맞닿아 있다. 멕시코도 예외가 아니다. 갱단이 의적으로 둔갑하고 그 두목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격상되어 사후에도 그에 대한 기념 형상물이 버젓이 만들어져 팔린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찬양 내용을 담은 유행가가 공중파 방송을 통해 불리는 일들이 여전히 허다하다. 어찌보면,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이 오늘 날 선물을 뿌리는 마약 카르텔과 선물을 기다리는 시민들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코드라 할 수 있다.


다만, 과거 '의적'으로 표현된 갱단들과 달리 오늘 날 멕시코 전역에 포진한 마약 카르텔의 무장력은 정부군에 못지 않게 강해졌고 각 지역에서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정부군과 충돌하고 있다. 물론, 그 와중에 마약 카르텔 간의 갈등도 심각하여 그로 인한 조직원이나 시민들의 사망 피해도 만만치 않다. 1년에 공식적으로 집계되는 피살자 숫자가 3만~4만 명에 이르는 상황이 잔인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전쟁 상황이 아닌 이상,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는 숫자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자신들의 '지역구' 관리에 더욱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멕시코 당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부터다. 당국과 무력 충돌이 격화되면서 기존 거대 조직들의 지도부가 검거되거나 살해되었고, 이 과정에서 조직의 소멸이나 재편성이 불가피해졌다. 한마디로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춘추전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조직이 쪼개지거나 새로운 조직들이 등장하면서 지역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 역시 치열해졌다. 물론 결과는 멕시코 전역에서 하루 평균 100명 이상으로 치솟는 피살 건수의 증가로 이어졌지만, 이 전쟁은 끝을 보지 못한 채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다.


그 사이 정권이 바뀌면서 현 정부는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전쟁으로부터 슬며시 발을 뺀 셈이지만, 그들 간의 춘추전국 시대는 아직까지 끝을 보지 못한 채 전쟁국가보다 더 많은 인명피해를 양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져야 하는 조직원의 확보일 터. 이를 위해서라면 지역 거점 확보가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젊고 혈기 왕성한 조직원 확보가 절실한 와중에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 뿌려지는 선물들은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젊은 조직원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에 가깝다. 가난한 부모가 사주지 못하는 선물을 가져다 주는 '나르코' 조직이라면, 호감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번 선물공세가 충격적인 까닭

그렇게 멕시코에서는 지난 십수 년 사이 '나르코의 선물'이 횡행했다. 그럼에도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50일 이상 자택 대피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뿌려진 선물들이 주는 충격은 그간 공권력의 감시가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지방에서 뿌려지던 선물들이 대도시에서도 버젓이 등장했다는데 있다. 특히 지난 4월 말 멕시코 제 2도시라 할 수 있는 과달라하라 바로 옆에 붙은 위성도시 사포판(Zapopan)에서 뿌려진 '나르코의 선물'은 큰 걱정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관광지로도 유명한 사포판의 한복판, 그것도 정부 기관인 사포판문화예술회관 국기게양대 바로 아래서 '나르코의 선물'이 뿌려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줄을 섰고, 중화기로 무장한 조직원들이 선물을 나눠줬는데, 거기에 새겨진 이름은 엘 멘쵸(El Mencho, 본명 Nemesio Oseguera Cervantes). 다름 아닌 멕시코 제1 마약 카르텔 CJNG(Cartel Jalisco Nueva Generación)의 두목 이름이었다.


멕시코 당국뿐 아니라 미국 CIA와 마약단속국에서도 세계 10대 지명수배자로 지정하고 수백만 불의 현상금을 걸고 찾는 인물이었다.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수장보다 더 위험한 수준으로 격상되어 수배된 자의 조직원들이 대도시 한복판에서, 그것도 백주 대낮에, 정부기관의 상징인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서 '나르코의 선물'을 뿌렸던 것이다. 물론, 주변에 CCTV가 있었지만, 정부군이 출동한 때는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선행'이 SNS를 타고 멕시코뿐 아니라 세계 전역으로 퍼지면서 또 다른 추종자들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희대의 탈주극을 두 번이나 벌인 뒤, 결국 미국으로 인도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미국에서 보안 수준이 가장 높은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 엘 차포(El Chapo, 본명 Joaquín Guzmán Loera) 조직도 그들의 근거지인 멕시코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후 매우 적극적인 선물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례적인 것은, 이미 그의 이름을 따 상표 등록이 허용된 상품 중 그의 이미지가 새겨진 마스크까지 '나르코의 선물' 상자에 포함돼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엘 멘쵸가 이끄는 조직과 쌍수를 이루는 이 조직 역시 대도시 깊숙한 곳까지 '나르코의 선물' 박스를 뿌리고 있다.


4월 20일 멕시코 대통령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pador)는 '나르코의 선물'의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이에 가담하는 마약 카르텔 조직들에게 "잘난 척 하지 말 것"과 "이 하찮은 선물 따위로 용서 받을 생각은 하지 말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지만, 선물 공세는 멕시코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다.

코로나 시대의 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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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태평양 유명 휴양도시 아카풀코의 공동묘지. 5월 23일 시정부는 300기의 구덩이를 추가로 확보할 것을 결정했다. 멕시코는 문화적으로 사후 화장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기 때문에 각 지방 정부들은 코로나바이러스 확진 이후 사망한 경우라도 매장을 허용한다. ⓒ Cortesia Ayuntamiento de Acapulco

2020년 2월 28일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첫번째 확진자가 발생한 멕시코는 6월 6일로 '코로나 시대' 100일째를 맞이했다. 이미 혹독한 대가를 치른 아시아나 유럽 국가들이 첫번째 환자 발생 후 대략 50~60일 정도에서 1일 확진자 증가 정점에 닿은 후 하향하여 안정기에 접어든 반면, 멕시코는 여전히 가파른 속도로 증가 속도를 올리고 있다.


50일간 자택 대피 명령을 내렸던 정부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감염과 폭동'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배 고파서 못 살겠다'는 시민들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가게들은 다시 문을 열었고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렇게 '뉴노멀'이 시작되었다.


6월과 함께 시작된 '뉴노멀'의 시대에 하루 사망자 숫자는 여전히 500명을 웃돈다. 확진자 숫자도 4000명을 넘어섰다. 치명률도 12%에 가까워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 가공할 만한 숫자 앞에서, 차라리 코로나바이러스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 같다. 그간 속은 셈 치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사라져버린 백만 개의 일자리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신산한 그들의 삶을 더욱 옥죄기 시작했다. '뉴노멀'의 시대라면 해결될 것 같았던 배고픔이 오히려 더 사나워질 듯하다.


이 와중에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르코의 선물'이라도 부지런히 뿌려졌으면 하는 기대를 갖는 게 당연하다. 그간 정부는 나르코들의 악랄함을 언급할 때마다 하루에 100명 넘게 쏟아지는 피살자 통계를 인용했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 숫자가 이미 그 수준을 한참 넘어서면서 전쟁 국가를 웃돌았던 피살 건수는 오히려 희석되어 버렸다. 게다가 올해 경제 성장은 마이너스 9%에 이를 것이라니, 배고픔이 두려워지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누구라도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들이 곧 의인이고 영웅일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들의 선물이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못 박았지만, 민심은 어쩌면 어느 날 홀연히 다가오는 '나르코의 선물' 쪽으로 기울어짐이 자명할 것이다.


림수진 기자(jbchamsori@gmail.com)

2020.06.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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