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3개 아파트를 1720만원에... 여기선 참 쉽습니다

[비즈]by 오마이뉴스

싱가포르 국민의 약 80%가 사는 공공아파트(H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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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B 단지의 모습. 국민의 80%가 HDB에 삽니다. ⓒ 이봉렬

성인이 된 딸 둘이 있습니다. 큰딸 예경이는 국적이 한국인데, 작은딸 예림이는 시민권을 받아서 이젠 싱가포르 시민권자입니다. 한 배에서 나온 자매라고 해도 서로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앞으로 살아야 할 세상이 다르니 국적과 관련해서도 서로 다른 결정을 하는 게 이상할 건 없습니다. 예림이가 시민권을 받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습니다. 공항에서 입출국 수속할 때 서로 다른 줄에 서는 것 정도가 눈에 보이는 변화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요즘 예경이가 예림이를 부러워합니다. 한국의 집값이 올라서 내집 마련은 물론이고 전셋집 하나 구하는 것도 힘들다는 뉴스가 연일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림이는 집 걱정은 아예 하지 않거든요. 세계에서 제일 물가가 비싸다는 싱가포르에 살면서 어떻게 집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해답은 싱가포르의 공공아파트 HDB에 있습니다.


싱가포르 국민의 약 80%가 HDB에 살고 있습니다. 나머지 20%의 국민은 HDB보다 몇 배 이상 비싼 민간 아파트 혹은 단독 주택에 삽니다. HDB는 민간 아파트나 단독 주택에 비해 가격이 싸고, 정부가 HDB를 중심으로 대중교통이나 관공서, 공원 등 생활기반시설을 만들기 때문에 서민들이 살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싱가포르 시민권자인 예림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5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다가 집을 산다는 가정 하에 내 집 장만을 위해 얼마가 필요한지 알아보겠습니다.

세심한 정부 지원

싱가포르에서는 HDB를 분양 받는 것이 이미 지어진 걸 사는 것에 비해 30% 이상 저렴합니다. 분양을 받기 위해서는 가족이 있는 21세 이상의 시민권자에, 정부가 정한 소득 상한선 (최대 월 S$ 1만4000, 한화 1204만 원) 이하여야 합니다. 독신이라면 35세 이상 되어야 분양 자격을 줍니다.


HDB는 방 1개부터 4개까지 크기나 종류가 다양합니다. 방 3개가 있는 95㎡ 크기의 HDB 분양가가 평균 S$ 30만 (2억5800만 원) 정도 합니다. 물론 이 돈을 다 주고 집을 사지는 않습니다. 집값의 75%를 HDB 혹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는데 최장 30년에 이자는 2% 수준입니다.


나머지 25%인 S$ 7만5000(6450만 원)도 큰 금액입니다. 이제는 정부의 지원금을 받을 차례입니다. HDB는 국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정부가 주택개발청에서 공급하는 아파트라 공적 지원이 있습니다.


EHG(Enhanced CPF Housing Grant)라는 이름의 지원금은 월 평균 소득에 따라 다르게 지원이 됩니다. 물론 소득이 적을수록 더 많은 지원금을 받습니다. 5년차 직장인으로 월 S$ 4000(344만 원)이라고 가정을 하면 S$ 5만5000 (4730만 원) 정도가 지원금입니다. 함께 가정을 이룰 사람(남편)에게도 소득이 있다면 이것도 더합니다. 둘이 합쳐 S$ 8000(688만 원)을 번다면 S$1만 5000(1290만 원)이 지원금으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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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G(Enhanced CPF Housing Grant) 지원금은 소득에 따라 차등 지급됩니다. ⓒ HDB홈페이지 갈무리

분양을 받는 게 아니라 이미 지어 놓은 HDB를 살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를 재판매(Resale) HDB라고 부릅니다. 분양가가 S$ 30만(2억5800만 원)인 HDB는 재판매 시장에 나오면 대략 S$ 40만(3억4400만 원) 정도로 거래가 됩니다. 그래도 걱정은 없습니다. 앞서 소개한 EHG에 더해서 FG(Family Grant)라 부르는 가족 지원금이 있습니다. 집의 크기에 따라 S$ 4만(3440만 원) 또는 S$ 5만(43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세보다 싸게 분양을 해서 나중에 팔 때의 시세차익을 보장해주고 재판매 HDB를 살 때는 추가로 지원금을 줘서 분양가보다 올라 있는 가격에 대한 부담을 덜어 줍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PHG(Proximity Housing Grant)라 부르는 지원금이 있어서 부모가 사는 곳에서 반경 4km 이내에 있는 HDB를 살 때 S$ 2만(1720만 원)을 지원 받습니다. 자녀가 있다면 S$ 3만(2580만 원)을 지원 받습니다. 가족끼리 가까이 거주하면서 서로 돌보기를 권하는 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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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G (Proximity Housing Grant) 지원금은 가족이 모여 살도록 권유하는 제도입니다. ⓒ HDB홈페이지 갈무리

이런 지원금을 다 받아도 집값을 내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이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의 국민연금과 비슷한 CPF입니다. 집값의 20%까지 CPF에 적립되어 있는 돈을 빼서 쓸 수가 있습니다. (CPF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CPF의 적립요율이 월급의 최대 37%(!)이기 때문에 5년을 회사 다니면서 CPF를 냈으면 집값을 내는데 충분합니다.


방 3개짜리 아파트를 분양 받으면서 정부의 지원금과 주택대출, 그리고 CPF 적립금을 이용하면 실제로 준비해야 하는 현금은 S$ 2만(1720만 원) 정도면 충분합니다. 여기에는 2%가 채 안 되는 세금과 필수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화재보험료가 포함된 겁니다. 직장 생활 5년 하면서 이 정도만 저축하면 집을 살 수가 있으니 예림이가 집 걱정을 할 리가 없는 겁니다. 게다가 대출 받은 75% 역시 CPF를 이용해서 갚아 나갈 수 있으니 원리금 갚는 걱정도 덜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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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라 부르는 싱가포르의 민간아파트. 단지내 수영장을 비롯해서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만 가격은 HDB보다 훨씬 높습니다. ⓒ 이봉렬

사지(buy) 않고 산다(live)

물론 규제는 있습니다. 5년 동안은 집을 팔 수가 없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꼭 집을 팔아야 한다면 주택개발청이 되사줍니다. 시세차익을 얻지 못할 뿐 손해를 보는 건 아닙니다. 5년 후에 되팔더라도 시세 차익의 일부는 주택개발청에서 정산해서 가져 갑니다. 한 번에 두 개의 HDB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분양은 평생 두 번까지만 가능합니다.


HDB는 집은 개인 소유지만 땅은 정부 소유입니다. 토지임대 환매조건부 분양방식인데 99년이 지나면 HDB의 소유권이 정부로 귀속됩니다. 99년은 개인이 아파트를 내 집으로 삼아 살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입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 집은 사는 (buy) 것이 아니라 사는 (live) 곳입니다.


물론 싱가포르에도 비싼 아파트가 많고 집을 통한 투자와 재산증식도 있습니다. 지난해 다이슨 창업주 제임스 다이슨이 싱가포르에서 가장 크고 비싼 펜트하우스를 구입해서 화제가 됐는데 그 가격이 S$ 7380만(약 640억 원)이었습니다. HDB를 제외한 나머지 20%에 해당하는 민간 아파트와 단독주택이 이런 식으로 시장에서 거래가 됩니다.


한국에도 HDB와 비슷한 신혼희망타운이 있습니다. 정부가 제공하는 분양형 공공주택인데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연 1.3% 고정금리로 최장 30년간 집값의 70%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어 젊은 층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하지만 공급량이 적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 모두가 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2022년까지 총 15만 호를 공급하는 게 목표라고 합니다. 570만 인구의 싱가포르에 HDB가 백만 가구 이상인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현 정부 들어 수많은 부동산 대책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집값은 잡히지 않고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청년들은 아예 집 사는 걸 포기한다고 합니다. 신혼희망타운 같은 공공주택 보급을 획기적으로 확대하고 싱가포르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각종 지원책에 국민연금 활용 등의 아이디어를 더한다면 좀 낫지 않을까요?


한국 국적의 언니가 싱가포르 국적의 동생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봉렬 기자(solneum@gmail.com)

2020.07.1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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