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끝없는 폭력에 이 여자가 선택한 최후의 방법은

[컬처]by 오마이뉴스

[리뷰] <인비저블맨>(리 워넬 감독, 2020, 미국)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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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틸 이미지 ⓒ 유니버설픽처스코리아

'바람피우면 남편한테 죽는구나.'


21년 전, 나는 이 무도한 전제를 두렵게 받아들였던 걸까? 당시 삼십대 싱글이었던 나는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 <해피엔드>를 보고 당혹스러웠다. 주인공 보라(전도연 분)는 옛 애인(주진모 분)과 재회하고 다시 과거의 감정에 휩싸인다. 불륜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가 개봉한 1999년은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가장이 속출하며(당시 남성 못지않은 많은 여성들이 실직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고개 숙인 남자'가 감상적으로 회자되던 IMF 시절이었다. 무책임한 국가가 위기로 내몬 남성들은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마땅히 위로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설정되었다.


실직한 여성 또한 삶의 위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들은 마치 실직해도 돌아갈 안락한 가정이 있는 것처럼 왜곡되었다. 그런 분위기를 틈탔던 것일까 영화의 서사는 잔혹했다. 그렇게 보라는 남편 민기(최민식 분)에 의해, 단지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어떤 변명이든 이유든 단 한 번도 물어보지도 들어주지도 않은 채, 처참히 살해당한다.


아내의 외도를 용서할 수 없다면 헤어지면 된다. 용서할 수 없으니 아내를 죽일 수 있다고 전제한 영화의 서사는, 아내의 생살여탈권을 남자인 가장이 지니고 있다는 뿌리 깊은 가부장의 망령에 휘둘려 탄생했을 것이다. 이후 나는 보라처럼 남편에게 혹은 애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여자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화보다 더한 현실에 진저리를 쳤다. 돌이켜보면 <해피엔드>는 그 역설적 제목이 역겨울 만큼, 여성혐오살해를 전시한 나쁜 영화다.


<해피엔드>처럼 대놓고 완전범죄를 노려 치밀하고 참혹하게 아내를 죽이기도 하지만, 내면을 파괴시켜 죽이기도 한다. 아내를 없애기 위해 정신병자로 몰아 정신병원에 영원히 가두어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매장하는 방법,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 '남편이 나를 죽이려 해'라는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결국 자멸하게 되는, 남성 동맹이 고안한 페미사이드의 서막. '가스라이팅'은 가부장인 남성의 말을 사회가 전적으로 승인하는 부정의에 기반한다.


남편이나 애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빈번해진 지금도, 여전히 여성혐오 폭력이나 살해를 '묻지마 살인(폭력)'으로 가장하고 있다. 아무 잘못 없는 여성이 애인이나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드라마나 영화 속에 여과 없이 등장한다. 이렇게 맞고 죽임을 당하는 페미사이드의 서사를 통쾌하게 반전시킨 영화를 만났으니, 바로 <인비저블맨>이다. 하다 하다 남편이 투명 인간으로까지 변신해 아내를 죽이려 하는 스릴러다. 그러나 이번에 아내는, 결코 죽지 않는다.

남자의 피 묻은 손에서 살아남은 세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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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틸 이미지 ⓒ 유니버설픽처스코리아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와 남편 에드리안(올리버 잭슨 코헨)이 사는 집은 집이라 부르기 어색하다. 건물 전면은 유리로 되어 있고, 집을 둘러싼 담장은 노련한 장대높이뛰기로도 넘을 수 없는 높고 견고한 콘크리트 벽이다. 집 전면은 영화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의 저택처럼 유리로 되어있고, 층고 또한 매우 높아 위압감이 든다. 집에 사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전면이 유리로 된 이 집은, 화장실이나 욕실 외 어디로도 시선을 피할 곳이 없다. 그럼 누구의 눈이 세실리아를 쫓고 있는 걸까?


이들의 집은 주위 근거리 어디에도 이웃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나 홀로 집'이다.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위치해 있어 일부러 보트를 타고 접근하지 않는 한, 집 안을 보기란 불가능하다. 이 집에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바다만이 지켜볼 뿐,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모든 소리를 잠식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꽤 근사해 보이나 감시당하는 세실리아에겐 수용소와 다를 바 없는 곳이다.


게다가 집 밖은 물론이고 집안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는 집 밖의 외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집 안의 사람을 향한 것임을 감지하게 한다. 이 큰 저택에 사는 사람이 세실리아와 에드리안 단 두 사람이라면,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24시간 아내를 감시하려는 남편의 눈이 곧 유리로 대체된 셈이고, 그도 모자라 실내외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는 남편 에드리안의 눈인 셈이다. 남편 에드리안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는 이 집은 세실리아에게 집이 아니라 감옥이다.


이런 집에서 어떻게 숨 쉬고 살아가겠는가. 세실리아는 철두철미한 탈출 계획을 세우고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다. 가스라이팅에 매몰되지 않고 용감하게 탈출하는 그녀의 모습은, 누군가(남성)에 의해 구출되기를 기다리는 나약한 피해자의 전형을 버리고, 살아남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고 온몸을 활용하는 악착같은 결기를 내보인다. 비록 나쁜 남자에게 침탈당한 인격일망정, 자신의 운명을 강자에게 양도하지 않고 끝까지 용감하게 응전하는 세실리아의 모습은, 여성혐오폭력에 어떻게 대처하고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인상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는 세실리아의 탈출과정에서 광학자 에드리안의 범죄 증거물을 슬쩍 노출시킨다. 카메라가 부스에 들어있는 옷걸이 모양의 홀더를 무심히 비추는데, 마땅히 걸려있어야 할 옷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실은 없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세계적 광학자인 에드리안이 아내를 감시하기 위해 발명한 투명 슈트. 이 보이지 않는 투명 슈트의 잔혹한 공격에 세실리아는 어떻게 맞서 살아남을 것인가. 그녀는 말한다 . "나는 네가 보여."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겨우 안전가옥으로 도피해 숨어있는 세실리아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에드리안은 죽음을 가장해 접근한다. 유산을 세실리아에게 상속하겠다는 미끼로 유인하는 바람에, 세실리아의 안가는 노출되고 만다. 카메라가 세실리아를 줄곧 쏘아보는 시선은 이미 투명 슈트를 입고 침입한 에드리안의 시선임에 틀림없다.


에드리안이 세계적인 광학자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투명슈트를 만들었을 것을 도저히 알 길 없는 세실리아는, 점점 대담해지고 포악해지지만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폭력의 눈길과 손길에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공포로 심약해진 그녀는 '왜 나지'를 되뇌며 피해의식에 침습되기도 하지만,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에드리안이 노리고 있음을 각성해나간다.


이 각성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침탈당하지 않을 권리'는, 누군가(다른 남자)의 구제로 얻게 되는 시혜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끝까지 몰아붙여 쟁취하는 '싸우는 권리'다. 에드리안은, 이 정도로 겁을 줬으면 극도의 공포로 피폐해진 세실리아가 곧 백기를 들 거라 예상했지만, 이번에도 그의 생각은 오차를 일으킨다. 철옹성이라 생각했던 감옥을 세실리아가 치밀한 계획으로 뚫고 탈출한 것처럼, 이번에도 결코 그에게 포획되지 않는다.


에드리안의 보이지 않는 폭력이 거세질수록 놀랍게도, 그녀는 더 영리해지고 강해진다. 완력이 대단한 악당을 제압할 무술이 없더라도 (이런 상황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 그녀는 불리한 자신의 처지에서 어떻게 악당과 맞설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실행한다. 그녀와 주위 사람들을 조여 오는 투명 슈트의 정체에 확신이 서자, 그녀는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그 집으로 대담하게 잠입해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보이지 않는 공포의 실체를 찾아낸다.


급박해진 에드리안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에드리안의 함정에 빠진 세실리아는 살해 현장에서 검거되고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마지막 카드로 세실리아에게 항복하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는다. 마침내 인내심을 잃은 에드리안은 실수를 저지르고, 그의 범행 수법을 감 잡은 세실리아는 투명의 비가시성을 가시의 세상으로 끌어낸다.


누구도 믿지 않던 투명 슈트의 정체가 마침내 그 마각을 드러낸다. 고작 슈트발이나 세워 폭력을 휘두르던 에드리안의 저열함은 슈트를 빼앗기면 힘을 못쓰는 악당처럼,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모습은 권력이라는 슈트를 입은 현실의 남자들과도 흡사하다. 고급 슈트를 입고 부끄러움 없이 인면수심의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 슈트를 빼면, 권력이라는 외피를 벗기면, 고작 강자에겐 비굴하고 약자에겐 군림하려는 남루한 식민지 남성성일 뿐인 것을.


세실리아는 에드리안의 자백을 받아내고자 마지막 기회를 준다. 하지만 그가 끝까지 기만하려 들자, 그녀는 그의 죗값을 직접 받아내기로 한다.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도한 권력자 남성에게 법의 힘이란 결국, 약자의 고통으로만 귀결될 뿐임을. 그렇기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징벌은 피해의식을 탈각한 약자의 고도의 정치성이다. 더 많은 세실리아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한마디로, 죽지 말자는 말이다.


윤일희 기자(jupra1@naver.com)

2020.07.15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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